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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되어라, 우는 사람이여!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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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되어라, 우는 사람이여! (마 5:4)

우리 민족은 눈물을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새들이 지저귀는 모습을 표현할 때, 영어에서는 ‘새들이 노래한다’(Birds are singing)라고 표현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새가 운다’고 표현합니다. 우리 말 표현에 운다는 표현이 참 많습니다. 새들만 우는 것이 아니라, 벌레도 울고, 매미도 웁니다. 겨울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문풍지를 표현할 때도 ‘문풍지가 운다’고 하고, 귀에서 소리가 나면 ‘귀가 운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주먹까지도 웁니다.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아서 너무 힘들게 살았기 때문에 운다는 표현이 우리의 정서를 나타내는 말인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으로 울 일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 때문에 울고, 자식 때문에 울 일도 있습니다. 남편 때문에 울고, 살림이 힘들어 울고, 마음이 아파서 울고, 억울해서 웁니다. 내 맘대로 되지 않아서 울고, 화가 나서 울고... 그런데 남자들은 울고 싶어도 마음껏 울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입니다.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 모르지만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남자는 마치 찌질이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눈물은 우리 영혼에 내리는 단비와 같습니다. 메마른 대지에 비가 와서 생명을 살려내는 것처럼, 눈물은 우리 영혼을 살려냅니다. 먼지로 가득한 하늘에 비가 옴으로 모든 먼지가 제거되고 하늘이 깨끗해지는 것처럼, 눈물은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줍니다. 화가 났을 때 눈물을 흘리며 실컷 울고 나면 화가 수그러들고, 슬픈 일로 인해 가슴이 답답할 때 눈물을 흘리며 울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집니다. 하는 일이 풀려지지 않아 힘들어 고통스러울 때 눈물을 흘리며 울고 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눈물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그런데 왜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복된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첫 번째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눈물을 흘리며 우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되다’는 말씀만큼이나 ‘눈물을 흘리며 우는 사람이 복되다’는 말씀 역시 우리가 수용하기 결코 쉬지 않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 누가복음 6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누가복음 6:21) 

여기서 ‘울다’라는 단어는 성경언어로 ‘클라이오’입니다.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와 같은 슬픔으로 우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무덤에 묻히셨는데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고 있어야 할 돌문이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 클라이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귀신들려 귀신에게 고통 받고 있던 자신을 치료해 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저주 가운데 살아야 할 자신을 건져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재산 전부를 바쳐서라도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붙잡혀 가시더니 십자가에 처형되어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막달라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더구나 예수님의 시신에라도 향유를 발라드리고 싶어 안식일이 지난 후에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는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기가 막히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넋을 놓고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아닙니까?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시는 모습을 막달라 마리아는 골고다 언덕에까지 올라가서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진 시신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신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도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그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라도 발라드리기 위해서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해서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시신이 없어진 것도 슬픈 일이지만, 돌아가신 예수님께 자신이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파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클라이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후에 너무 깊은 슬픔 가운데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렇게 슬픔 가운데 울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당신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더 이상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파 울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울고 있기에 복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 울고 있는 사람이 ‘나에게 복된 사람이라고 말해주니 고맙소’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오? 내가 복된 사람처럼 보인단 말이오?’라고 화를 낼 것입니다. ‘누구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느냐?’고 역정을 낼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울고 있는 당신, 복된 사람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사람에게 복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사라져버렸습니다.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은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느라,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고통을 함께 느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6-17) 
  
감정을 잃어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지 않습니다. 형제가 아파해도 그건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버립니다. 오히려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듭니다. 정죄하고 판단해서 더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오후 늦게까지 말씀을 듣고 저녁녘이 되어서야 돌아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째 되던 날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마리아 자매가 살고 있는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와서는 예수님을 보고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마리아가 우는 모습을 보시고는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너무너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곧 살려내실 것입니다. 베다니에 오실 때에도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기 때문에서 내가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리러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동생을 잃고 슬픔 가운데 있는 마리아 때문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자 예수님의 마음에도 슬픔이 밀려왔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여러분, 다른 누군가 때문에 울어보셨습니까? 마음 아파하는 그를 불쌍히 여기며 울어보셨습니까? 울어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여러분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면 여러분은 진정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누가복음 19:41) 지금은 평화로운 것 같지만, 그 안에 불의와 거짓이 만연되어 있어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군대를 이끌어다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멸망이 곧 임박해 있음을 말입니다. 그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고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멸망을 향해 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울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세상의 쾌락에 동조하여 함께 즐기는 것이 아니라, 죄악과 불법이 만연된 세상이 안타까워 울어보셨습니까? 지금도 휘황찬란한 세상의 영광 뒤에 숨어 있는 비극을 바라보며 울고 계십니까? 겉은 화려하고 살기 좋은 세상 같은데, 멸망의 그림자가 조금씩 조금씩 드리워짐을 바라보며 울고 계십니까?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드십니까? 그들을 바라보며 불쌍해서 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보다 잘 산다고 부러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건강하고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부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명이 멸망을 향해 가고 있음에 안타까워하며 울 수 있어야 합니다. 
  
멸망을 향해 가는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우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복되어라, 지금 우는 사람이여!” 

오늘 본문에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애통한다’는 말도 ‘슬퍼하며 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누가복음 6장에서 쓰고 있는 것과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클라이오’라는 단어를 사용한 반면 오늘 본문에서는 ‘펜데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펜데오’라는 단어는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 중 가장 큰 슬픔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펜데오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Septuaginta)이란 성경이 있습니다. 그 성경에서 창세기 37:34절에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들로부터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들에게 찢겨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자기 옷을 찢으며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랫동안 요셉을 위하여 애통해 하며 울었습니다. 여기서 애통해하며 울었다는 단어가 펜데오입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너무너무 커서 가슴에 담아 둘 수가 없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고통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애통하는 자’라는 말은 그저 형식적인 슬픔이나 보통의 슬픔을 겪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 ‘모원단장(母猿斷腸)’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이 말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옛날 중국의 진(晉)나라 환온(桓溫)이 촉(蜀)나라를 정벌(征伐)하기 위해서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양쯔강 중류의 협곡(峽谷)인 삼협(三峽)이라는 곳을 지날 때 한 병사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아 왔습니다. 그런데 어미 원숭이가 붙잡혀간 그 새끼를 따라서 슬피 울면 백 여리를 뒤따라왔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 이를 즈음에 어미 원숭이는 몸을 날려 새끼가 붙잡혀 있는 배 위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미 원숭이는 자식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애를 태우며 달려왔기 때문인지 배에 오르자마자 안타깝게도 죽고 말았습니다. 배에 있던 병사들이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창자를 끊어낸 것입니다. 배 안에 있던 군사들이 놀라 환온에게 보고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환온은 새끼 원숭이를 풀어주고, 새끼 원숭이를 잡아왔던 병사를 매질한 후에 내쫓아 버렸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온 말이 모원단장입니다. 어미 원숭이의 창자가 다 끊어졌다는 뜻인데, 자식을 잃은 슬픔을 표현할 때 종종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이렇게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슬픔으로 인해 울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악을 깨달을 때입니다. 
  
죄악의 무서움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슬픔 없이 잘못을 뉘우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죄악을 깨닫는다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슬픔으로 울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붙잡히기시 전에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심지어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님께서 군병들에게 붙잡히시자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뒤늦게 붙들려 가시는 주님 뒤를 멀찍이서 따라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갔지만, 그 집 여종 앞에서 ‘나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고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러자 닭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세 번 주님을 부인한 후에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때에는 정말로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기는커녕 주님과 함께 죽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주까지 하며 주님을 부인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이 때 ‘통곡하다’는 말은 ‘클라이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곡하는 것은 ‘클라이오’라는 단어만 가지고는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심히 통곡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도 그랬습니다. 다윗은 시편 6:6절과 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다윗은 일생에 하나님께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충신이었던 우리아의 아내와의 범죄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날 때에 그 죄를 감추려 하지 않고 회개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게 되자 한 번의 눈물로 회개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자신의 침상과 요를 다 적실만큼 그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간음죄에다 살인죄까지 저질렀다면 그는 사회에서 매장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다윗은 자신이 왕이라는 권력을 가지고 그런 끔찍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거기에는 밤마다 침상과 요를 적시는 철저한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다윗 왕과 대비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보다 먼저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울입니다. 그가 군대를 이끌고 아말렉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쟁 때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아말렉과 싸울 때에 모든 것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까지도 모두 죽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왕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온 것은 물론이고 양과 소 가운데서 기름진 것과 좋은 것들은 죽이지 않고 잡아왔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을 찾아가서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사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 행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양과 소를 끌고 왔습니다.’(사무엘상 15:20-21) 죄를 백성들 탓으로 돌렸습니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의 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합니다. 그 때서야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고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회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후에 사무엘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사무엘상 15:30) 

이건 죄를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인정은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진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 앞에서 자신이 부끄러움 당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백성들 앞에서 자신을 높여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감사하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자신의 전쟁의 영웅으로 인정하도록 말입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이 철저하게 낮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티끌만도 못한 부끄러운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매일 눈물로 침상을 적실 정도로 회개한다 하더라도 그 죄를 다 용서받기에 부끄럽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보다는 자신의 체면이 더 중요했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왕의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자신을 백성들 앞에서 영웅으로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다윗은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눈물의 회개를 통해서 그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1) 이 말씀은 이렇게 바꿔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을지라도 눈물로 회개하여 용서받는 사람이 진정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우리는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손을 물로 씻으면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땀을 흘리고 난 후 사워를 하거나 목욕을 하면 깨끗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워를 하고 목욕을 해도 우리 몸에는 60억 마리가 넘는 미생물이 여전히 붙어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1시간만 지나면 엄청난 미생물이 우리 몸에서 번식을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현미경을 통해서 들여다보면 우리 몸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마음과 삶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깨끗한 것처럼 보여도 현미경보다 더 정밀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더럽고 지저분할 뿐입니다. 감추어진 죄악이 모두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멀리 보기 위해서는 망원경을 통해서 봅니다. 작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현미경으로 봅니다. 우리 눈으로 보이지 않은 몸 안에 있는 것은 내시경을 통해서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죄악덩어리인지는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반드시 우리 마음에 애통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죄악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 자신의 보습을 진실되이 보며 애통해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용서를 선언해 주시고, 그에게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복되어라, 우는 사람이여! 복되어라, 애통하는 사람이여!’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울음은 결코 부끄러움이 아님을 기억하십시다. 눈물과 울음은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며, 우리의 영혼에 하늘의 위로를 선물로 가져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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