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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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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눅 10:38-42)

성경을 읽다보면 한 아버지의 자식인데도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했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말라기 1장 2-3절에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9장 12-13절에 『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에서를 향해 측은지심이 발동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에도 마르다에게 동정심이 기우는 경우가 없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를 대하는 태도에서 은닉된 뜻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진 베다니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친자매인데도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들 자매는 예수님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마침내 이들에게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들은 자기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마련했습니다(요 12:2). 그리고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마르다는 음식 준비에 바빴습니다. 
마르다가 이처럼 예수님을 위해 식사준비로 바쁘게 움직일 때 마리아는 주님의 『 발 아래 앉아 』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동생의 이런 행동을 마르다는 굉장히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마르다와 함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마리아 혼자만 예수님 앞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동방사회에서 윗사람이 땀 흘리며 일 하는데 아랫사람이 편히 쉬고 있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마르다는 예수님께 자신의 솔직한 지금의 심경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장 40절에 『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바로 오늘 설교제목이 된 『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Ⅰ. 예수께서 마리아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르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10장 42절에 『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 발 아래 』 앉은 것은 그때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오빠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 장사 지낸 후 예수께서 그들 집에 오셨을 때도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요 11:32).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을 예수께서 찾으셨을 때에도 그녀는 주님의 『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습니다(요 12:3).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그 분의 발 앞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언니 마르다와는 다른 태도로 주님을 섬기며 그의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갔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런 깊은 의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언니는 일하는데 동생이 앉아 있는 행위 자체가 괘씸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에 대하여 비록 가볍기는 하지만 분명히 불평을 했습니다. 그런 마르다를 향해 예수님은 본문 10장 41-42절에 『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향한 칭찬과 격려이면서도 가벼운 책망이기도 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행위를 좋게 여기면서도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우선순위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도 중요한 봉사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마리아처럼 예수님 앞에 나와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Ⅱ.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자신을 대접하는 우선 순위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0장 42절에 『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 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처럼 항상 주 앞에 나아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만 하는 것이 참 제자가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확신 가운데 기도한 후에는 마르다처럼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칭찬하면서도 꾸짖으신 것은 그녀의 행동은 장한 것이었지만 그것 이전에 마땅히 있었어야할 주님과의 참된 만남이 우선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실 마르다는 마리아와 같은 예수님과의 긴밀한 관계형성의 단계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마르다는 자신도 모르게 큰 잘못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하는 일이 제일 옳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피곤하신 예수님을 편히 쉬게 해드리고 그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가장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 듣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식사준비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언니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주님을 시중들었던 여인은 마르다였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은 여인은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주님과의 기본관계를 중요시하며 남의 일에 관계치 아니하고 "주 안에 거하는" 기쁨에 충만했습니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절대적으로 옳고 마르다는 잘못되었기 때문에 모두 마리아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칭찬하시고 마르다는 책망하신 것은 마리아가 한 일이 우선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코 마르다의 행위가 필요 없거나 잘못되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믿음과 행위를 같이 요구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한다고 했습니다(약 2:2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 2:17).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위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Ⅲ. 믿음에 기초한 행위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장 39절에 『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장 42절에 『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24절에 『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에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3장 23절에 『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7절에 『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7절에 『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40일 금식 후에 마귀에게 『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3)는 시험을 받으실 때도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고 했습니다. 

또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도 점심 때를 잊으셨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이때 한 제자가 친족들이 자기를 찾는다는 말에 『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 12:49-50)고 했습니다. 

복음을 듣는 자를 친족 이상으로 두신 것입니다. 또 주님은 어떤 때는 비유로 말씀하신 후 그들에게 『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막 4:9)고 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6)라고 하시며 복음 듣는 자의 복됨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235장에도 생명의 말씀을 들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 만드는 일에만 분주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마르다를 향해 가벼운 책망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기독교는 듣는 종교입니다. 듣지 못하는 자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는 타계에서 들려오는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 계시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1) 마르다의 문제는 상업화된 봉사입니다. 

마르다의 대접은 매우 현실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는 열심입니다. 마르다의 직접적인 행위가 일견 좋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의도하는 일이 아닌 것은 결국 잘못된 것입니다. 
상업화 되었다는 말은 봉사 자체가 봉사자 자신이 주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상업은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는 봉사는 참된 봉사가 아닙니다. 손해보고 하는 장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하는 봉사는 상업화된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2) 마르다의 태도에 대한 책망입니다. 

마르다는 자기 뜻대로 마리아가 도와주지 않는데 대해 불평했습니다. 마르다에 대한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어느 날 마르다는 방을 정돈하고 주님을 맞을 양으로 기다릴 때 홀연 밖에서 폭풍우가 일어나더니 누가 문을 요란히 두드렸다. 혹시 주님이신가 하고 문을 열었을 때 문전에는 남루한 옷을 입은 걸인이 있어 먹을 것을 구걸했다. 
마르다는 "나는 걸인을 돌볼 여가가 없다. 나는 이제 주님을 대접하련다."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조금 후 역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여니 이번에는 어떤 어린 아이가 남루한 옷을 입고 몹시 시장한 모습으로 그에게 음식을 청구했다. 
마르다는 귀찮은 듯이 "나는 지금 주님을 맞으려하는 것이니까 너를 돌볼 여유가 없노라"하고 

얼굴을 찌푸리면서 무정스럽게 문을 닫으려할 때 주님이 인자한 모습으로 나타나시며 마르다에게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 25:45)고 하였다"라고 했습니다. 

3) 마르다는 마리아의 행위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10장 40-42절에 『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9절에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를 돕도록 명하여 달라는 마르다의 요청은 거부되고 오히려 마르다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먼저 그의 말씀에 참예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의 어떤 제자들 못지않게 굳건한 믿음을 소유한 자매들입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마르다와 나눈 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1절에 『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마르다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최초로 부활 신앙을 고백한 여자입니다. 그녀는 죽은 오라비로 인해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면서도 마지막 부활 때는 자신의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4)

이때 주님은 그녀에게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서슴지 않고 『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인 줄 내가 믿나이다 』(요 11:27)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 16:16) 위에 부활 신앙까지 더한 것으로 실로 위대한 신앙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행위를 인정하신 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셨을 때 니고데모가 값비싼 향품을 그의 시신에 바른 것은 용기 있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끝까지 그를 따르겠다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는데 니고데모는 숨은 제자로서 위험천만한 형장 전면에 나서서 예수님의 장례를 감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그 일을 했으니 니고데모보다 더 보람되고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마리아가 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은 과장된 찬사가 아닙니다(마 26:13; 막 14:9). 마리아가 예수님께 쏟은 향유는 세상 끝 날까지 없어지지 않는 최고의 향기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마리아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마 26:13; 막 14:9).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주님의 훌륭한 제자들입니다. 본문을 통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교훈입니다. 

첫째,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을 어떤 경우에든지 최우선의 자리에 두라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선한 일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주의 뜻을 깨달아야 합당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주의 뜻을 깨닫는 자만이 자신의 모든 것, 마침내 자신까지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좋은 편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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