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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겔 2: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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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겔 2:1-10,120715)  


< 균형 잡힌 신앙을 가지십시오 >  

본문에는 에스겔 선지자가 어렵고 외롭고 두려운 소명을 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에스겔 1장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놀라운 형상을 보고 엎드러졌습니다(겔 1:28).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그때 제일 처음 들린 음성이 “인자야!”란 음성이었습니다. ‘인자’란 말은 에스겔서에서 90회 이상 나옵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연약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자’라고 불렸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네 발로 일어서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게 곧 일어서게 하실 것을 왜 먼저 엎드러지게 했을까요? 하나님은 누군가를 쓰실 때 항상 먼저 낮추었다가 높이는 방법을 즐겨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쓰시는 인물이 되려면 성령 충만으로 자신을 깨뜨린 후에 다시 일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체험을 통해 힘을 얻은 후 세상에 나가 비전을 성취함으로 영성을 실상으로 만드십시오. 영성을 실상의 힘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영성은 헛된 영성입니다.  

저는 자주 “성도는 신앙도 좋아야 하지만 신학도 좋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헛된 영성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학과 교리도 잘 활용되면 유익이 많습니다. 가끔 교리가 신앙을 얽매고 성령을 제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교리는 개인의 감정적인 중뿔난 신앙을 막아주고 신앙의 균형을 잡아주는 좋은 역할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면 무엇이 생깁니까? 교리가 생깁니다. 그 교리가 선용되면 다수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 회의 후에 이방인 수용에 관한 지침을 정한 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25절).”고 했습니다. 당시 첨예한 의견대립은 있었지만 그 분분했던 변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그저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 선언합니다. 회의를 할 때 큰소리도 날 수 있지만 일단 결론이 나면 딴 소리가 있으면 안 되고 “이렇게 결정했습니다.”란 말만 할 줄 아는 덕성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어떤 주장을 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정되었으면 끝난 것이고 만장일치로 가결했으면 더 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합의점을 찾은 후부터는 누구도 딴 말을 못하게 세운 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물론 교리는 완전한 것이 아니지만 불완전한대로 교리는 필요합니다. 교리를 굳건히 내세울 때 자기주장이 강한 신앙인이 ‘자기’를 교리로 삼으려는 폐단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딴 소리를 내고 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본 교리를 성실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교리를 무조건 나쁘게만 보려는 이단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교리 문제 연구를 외면해서 그 문제를 형식적인 신앙인들에게 넘겨버리고 자기 혼자만 영성이 충만하다고 하면 무슨 발전과 지속성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른 비전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에서 위대한 신학자도 한 명쯤은 나와야 합니다. 신학을 외면하고 신앙만 내세우면서 감화력과 영향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았어도 배운 사람이 받으면 “아! 그런가 보다!”라고 하는데 대부분 못 배운 갈릴리 시골 출신인 예수님의 제자들이 받으니까 “저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것을 보십시오. 세상이 그렇기에 성도는 외적인 초월성과 내적인 내재성을 다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분당 샛별교회는 신앙과 신학을 동시에 중시하고 영성과 교리를 동시에 중시하고 위대한 능력자와 위대한 신학자를 동시에 배출해야 합니다. 둘 중의 하나를 무시하면 이원론에 빠져서 균형 잡힌 믿음을 잃고 결국 인물 되는 길에서 멀어집니다.   

좋은 공동체가 되려면 ‘위대한 설교가’도 필요하지만 ‘위대한 신학자’도 필요합니다. 자신 속에서도 ‘설교가의 영성’과 ‘신학자의 영성’을 동시에 가져야 복된 성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도 탁월하십시오. 배움을 멀리하고 영성만 자랑하지 마십시오. 역사성과 영속성과 영향력을 가진 공동체가 되려면 신학이란 딱딱한 식물도 소화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균형 잡힌 성도를 배출하는 것에 그 공동체 사역의 성패가 달려있고 그 공동체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그처럼 엎드러졌다가 일어난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소명을 주시면서 장밋빛 전망 대신에 아주 현실적으로 본문 3-5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에스겔아! 패역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얼굴이 뻔뻔한 백성이다. 그들은 마음이 강퍅하다. 이제 그들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고 전하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하라.”   

그 소명이 얼마나 두렵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말씀합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이 구절에서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가장 필요한 음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음성입니다.  

왜 사람에게 두려움이 생길까요? 대개 보면 2가지의 결핍 때문입니다. 그 2가지란 ‘사명과 사랑’입니다. 사명감이 강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얼마든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두려움 중에 최고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의 산을 정복하면 다른 두려움의 산도 거뜬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2대 원천도 바로 ‘사명과 사랑’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저의 어머님이 청평 인근에 있는 강가의 큰 바위 옆에서 수영하다가 깊은 곳에서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졌습니다. 그곳은 반경 5-6미터가 아주 깊은 곳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주위에 많았지만 다들 놀란 표정만 하고 아무도 어머님을 구하러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수영을 잘하는 아버님은 바위그늘 밑에서 낮잠을 즐기고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머님을 구하러 가면 죽는다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다른 가족 2명도 그 장면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바로 그때 중학생이던 저의 누님이 본능적으로 다가가서 어머님 손을 무작정 잡았습니다. 수영이 능숙하지 않은 사람끼리 손을 잡으면 더 위험합니다. 저는 그때 두 분을 한꺼번에 다 잃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물살에 떠밀려 몇 미터 아래의 안전지대로 들어와 두 분 다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그 뒤 약 40년이 흘러서 8남매 중에 그 누님이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보면 가끔 하나님의 특별한 운명적인 끈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로는 엄청나게 사랑합니다. 그러나 위급할 때는 그냥 지켜보기만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계산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밉니다. 마음에 진실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고 행동에 나서게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이 두렵거든 사랑하는 일에 나서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의 뜻을 따라 헌신하는 일에 나서면 그에게 어떻게 축복과 평안이 없겠습니까?
  

< 하나님만 두려워하십시오 >   

그렇게 담대함을 권면한 후에 하나님은 계속해서 에스겔에게 말씀합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그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심판의 메시지를 가지고 반역의 백성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그 소명의 길이 얼마나 싫겠습니까? 그래서 그 싫은 길로 가게 하는 강력한 싸인(sign)과 위로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싸인과 위로를 주시려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고 말씀했습니다(8절).  

그 말씀과 함께 환상 중에 한 신비한 손이 그를 향해 펼쳐졌습니다. 그 손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었습니다(9절). 그 두루마리 책이 에스겔 앞에서 펼쳐지는데 보통 두루마리에는 한쪽 면에만 글이 쓰여 있는데 그 두루마리에는 안팎에 모두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10절). 전할 말씀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 글을 보니까 그 두루마리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에스겔이 전할 소식은 우울한 심판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런 환상을 보면서 결국 에스겔은 더욱 강한 소명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에스겔이 자신의 사역을 외적으로 키우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특별한 체험만 이렇게 열심히 선전하고 다니면 됩니다. “여러분! 제가 신기한 체험을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입신한 후 다시 일어났는데 하나님의 손과 그 손이 두루마리 책을 펼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두루마리 책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체험을 강조하며 자신을 ‘말씀의 종’이라고 하면 크게 성공할 것입니다. 사실 그런 체험 선전에 빠져서 분별력을 잃고 우르르 몰려갔다가 망가진 영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국 사람들은 특별한 체험을 특별히 좋아합니다. 그 특별해지려는 마음이 바로 사탄의 출입통로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특별한 체험에 있지 않고 일상이 하나님의 은혜의 순간들이고 기적들임을 깨닫고 그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감사하며 열심히 사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목자들은 자기 체험의 특별함을 강조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스스로 종교 권력이 되려고 합니다. 그런 술수에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일확천금 사상과 특별하려는 마음과 인기와 외형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살다 보면 항상 희망적인 말만 많이 듣고 싶지만 때로는 십자가를 도전하는 말도 기쁘게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기가 없는 좁은 문이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권력의 압력을 받고 두려운 일도 생길 수 있지만 하나님이 그 두려운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반드시 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어떤 세상 권력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믿는 사람답게 사십시오 >   

살면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영혼이 미신에게 넘어갑니다. 미신이 싹트는 2가지 토양이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의 토양이고 또 하나는 기복주의의 토양입니다. 미신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돈을 벌게 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신 공동체에서 돈을 버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미신을 강조하는 다단계의 총수와 같은 거짓 목자입니다. 결국 미신은 거짓 목자가 물질을 취하고 자기를 높이려고 애용하는 방법입니다.  

왜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까? 거짓 목자들이 두려움을 이용해 마음과 영혼과 물질을 뺏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짓 목자의 모습은 마치 나쁜 카센터 사장이 “바퀴를 갈지 않고 오일 체인지를 하지 않으면 사고 나요.”라고 겁주면서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과 같습니다. 정직한 카센터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기에 성공하기 힘듭니다. 그처럼 바르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불편과 불이익을 당해서 고민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희가 이 장소를 매입할 때 대출받은 돈이 있는데 매년 그 대출금을 연장합니다. 그러려면 교회실태 조사서를 매년 내야 합니다. 그 조사서에는 교인수, 헌금 등이 기록되어 신용평가 자료로 씁니다. 그런데 작년에 네트영어 안식년을 맞아서 수입과 지출이 크게 줄어서 고민했습니다. 그것을 사실대로 쓰면 불이익이 생기기에 분을 바르는 분식회계의 유혹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결국 정직하게 원래대로 은행에 자료를 넘겼습니다.   

곧 은행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교회 신용등급이 떨어져서 대출금의 일부상환을 하라는 얘기였습니다. “네트영어가 안식년을 맞아서 회계 상의 수치만 떨어진 것이지 교회 재정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자기들은 총액 기준으로 보니까 어떻게든 서류상의 숫자가 맞춰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검찰이나 세무서나 은행에서 나와 조사하는 것도 아니기에 “하나님도 이해해주시겠지.”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숫자 몇 개만 바꿔서 서류로 제출하고 은행도 모른 척 눈감아주면 되지만 그것을 못해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살다 보면 이런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 일에 쉽게 타협하면 그 서류를 받으면서 은행원들이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을 실족시키는 셈이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힘든 일이 예상되어도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선한 곳에 뜻을 두면 최선의 길이 반드시 열릴 줄 믿습니다. 그리고 바른 길을 고집함으로 생기는 두려운 일들은 나중에는 선한 영향력을 얻는 축복의 재료가 될 것입니다.  

살면서 완벽하게 살 수는 없지만 최대한 성도답게 살려고 하십시오. 권력을 두려워하거나 탐하지 말고 믿는 사람답게 살려고 하십시오. 성도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불이익도 많이 당하겠지만 하나님은 신실한 성도에게 반드시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좋은 인맥과 생각을 초월한 은혜를 주셔서 당대와 후대에 더욱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바르게 살면서도 성공하는 성공모델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선한 도전을 하고 혼탁한 사회에 맑은 물을 흘려보내는 맑은 샘 근원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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