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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무 아래 있는 사람 (왕상 19:4-5, 요 1: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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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래 있는 사람 (왕상 19:4-5, 요 1:45-49)

오래 전 중학교 다닐 때에 산에 나무심기 하러 간 기억이 많습니다. 그 전에는 우리나라 산에 나무가 없어 벌거숭이였었는데 식물일 뿐만 아니라 여느 날에도 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나라 산에 나무가 참 많습니다. 우리나라 국토의 65%가 산과 숲입니다. 세계적 산림국인 스웨덴의 숲의 비율이 68%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도 이제 산림국이 되었습니다. 어느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가 세계 7대 조림국이라고 합니다. 
  
나무는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입니다. 세상을 푸르게 하고, 공기를 깨끗하고 시원하게 하고, 홍수를 방지하고 물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나무는 건축이나 조각 등의 재료로 사용되고, 땔감으로도 쓰입니다. 
  
우리나라 숲의 한해 공익 가치가 50조 원이라고 합니다. 숲을 돈으로 환산해도 엄청난 국가 자산이라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숲이 단순한 휴식 공간이나 자원이 아니라 치유 공간으로 변신하였습니다. 숲의 특유한 향인 ‘피톤치드’는 식물이 해충이나 곰팡이에게 저항하려고 스스로 만든 휘발성물질이라고 합니다.‘피톤치드’란 말은 그리스어로 식물이란 뜻의 ‘피톤’(phyton)과 살균력을 뜻하는 ‘치드’(cide)의 합성어입니다. 숲은 인간을 치료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브리다’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신께서는 숲속에 당신의 약국을 차려놓으셨지. 누구나 건강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이야”. 숲은 인간을 치료하는 약국입니다. 피톤치드는 혈압과 혈당을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또 피톤치드는 심장병이나 대사증후군의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숲이 주는 치료효과는 육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큽니다. 숲에서 영적으로 치료를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숲은 많은 사람을 육적으로 치유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치유하여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위대한 성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타락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변화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의 ‘참회록’ 8장에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한 없이 눈물을 흘린 그의 경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득도하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탈무드에는 무화과 아래는 공부하기 좋은 장소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무 아래서 공부하고 책을 읽는 것은 낭만적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갈릴리 가나가 고향이었고, 빌립을 통하여 예수님을 소개 받고 전도를 받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는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의 다른 이름은 바돌로매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인 공관복음에는 그의 이름을 바돌로매라고 하고, 요한복음에는 나다나엘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가 그의 이름에서도 드러납니다. 지금 가나에 예수님이 첫 번째 기적을 베푸신 곳에 가면 입구에 ‘나다나엘 바돌로매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이 동네 사람이었고 그의 다른 이름이 바돌로매인 것을 증명합니다.  
  
45절에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합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길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본 것을 와서 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와서 보라”고 한 마디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는 것이 없도다”라고 하십니다. 나다나엘에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놀란 가슴에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십니다. 이 여름 나무 아래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나다나엘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 순전한 성품을 가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47에는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합니다. 나다나엘은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기도 전에 예수님을 가장 낮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가장 높여주시고 극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 삼으실 때 나다나엘만큼 칭찬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제자는 없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을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경솔하였으며, 예수님을 가장 낮추어 말하는 무례함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장 낮추는 자를 가장 높이셨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목회이며, 예수님의 인간관계입니다. 우리의 사업이나 모든 인간관계의 비결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낮추는 자를 높여주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높이는 일에 인색한 사람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남을 칭찬하고, 높여주고, 배려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 이스라엘 사람의 조건은 간사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새 이름입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할 때에 얻은 새 이름입니다. 야곱은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축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간사함이 충만했습니다. 육적 이스라엘은 간사한 사람이었지만 영적 이스라엘은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참’이란 헬라어로 ‘알레도스’라는 말이며, ‘간사한’이란 ‘돌로스’입니다. ‘알레도스’는 겉과 속의 일체를 의미하며 진지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돌로스’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를 말합니다. ‘트로이 목마’와 같이 ‘속임수’나 ‘간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간사’(奸詐)의 사전적 의미는 ‘교활하게 거짓으로 남의 비위를 맞춤’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 가도록 인도하기 위해 주신 성경을 삶의 수단으로 이용하여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가 간사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를 좋아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일러주십니다. 첫째는 아이를 좋아하는 것은 정서적 영적 건강을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둘째는 어린아이와 같은 경이감과 열정을 가지는 일은 멋진 일입니다. 셋째는 가장 위대한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어린아이의 순수성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순수성을 상실해가는 것 같습니다. 산타클로스나 루돌프 사슴은 아예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스키장에 가자고 엄마를 졸라댑니다. 엄마는 “성탄 전날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가지고 오니까 기다려야 해”하고 얘기했던 아이는 “엄마, 내가 바보인줄 알아? 산타클로스는 지어낸 얘기지? 우리 유치원 친구들은 다 스키 타러 간단 말이야”하고 엄마에게 투정하더랍니다. 
  
우리교회 어떤 초등학교 아이가 어느 날 교회에서 저를 만나 한참 쳐다 보더니 “목사님, 요즘 많이 늙으셨네요”라고 합디다.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얘기하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아이들에게서 어린이다움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아이들의 잘못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이 아이들이 볼 것이 없습니다. “사탕줄게”하고 따라오라고 하면 절대 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어른들의 마음이 검다는 것을 어른들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나영이 그리고 최근의 아름이가 누구 때문에 죽었습니까? 어른 때문입니다. 내가 내 자녀에게 “어른들을 믿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다른 아이도 집에서 그렇게 배울 텐데 다른 아이가 어른인 나를 믿겠습니까? 아이들이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간사하게 변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 기억은 낙원이란 말보다 순수라는 말이 더 옳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는 순수 그 자체입니다. 사람의 영혼이 맑고 마음이 깨끗하면 누구나 순수합니다. 누구나 간사함이 없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할 때에 그는 율법에 젖어 나사렛을 비하한 사람이었지만 금방 따라갔습니다. 그의 관용성과 진지성이 돋보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의 한 마디에 따라갔을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보기 위하여 따라나섰습니다. 구도자의 자세가 지극했습니다. 이런 성품이 참 이스라엘 사람의 조건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창세기 28장의 벧엘에서의 야곱의 경험을 묵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잠언 2:22에는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간사한 사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순수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다. 성품이 깨끗해야 좋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다나엘의 좋은 성품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자랐습니다. 우리도 나무 아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자라는 여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메시아를 대망하며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49에는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신속한 신앙의 결단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나다나엘의 대답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결단하는 말입니다. 
  
“랍비여”라는 말은 “나의 존경하는 분”이란 뜻의 아람어입니다. 초기 유대교에서는 첫째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상급자를 지칭할 때 이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둘째는 제자가 스승을 칭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는 제자들이 스승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주로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비하하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보자 공손히 스승으로 불렀습니다. 
  
나다나엘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나사렛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하였을까요? 신령한 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한 고백이나, 마르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줄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한 고백이나,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한 고백보다 더 위대한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사역 중기에, 마르다도 예수님의 사역 중기에 그리고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의 사역을 경험하고 한 고백이지만 나다나엘은 예수님과 함께 하기 전 만나는 순간에 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 대망은 이스라엘의 숙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힘이었습니다. 구약의 역사는 메시야를 대망하는 역사였습니다. 이런 메시야 대망은 신약시대까지 이어져 오는 사상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인지 아닌지 확인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1:3에는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였지만 세례요한은 단호하게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수가 우물가의 여인은 요한복음 4:25에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4:26에는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확인하십니다. 4:29에는 그 여인이 마을에 들어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확인한 메시야를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예수님의 메시야성 즉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성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을 때에 누가복음 7:16에는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베푸신 메시야적 기적입니다. 
  
기근은 팔레스타인의 일상입니다. 성경의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모두 기근을 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야관에는 메시야가 오시면 그들의 기근을 해결한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그래서 메시야적 기적이라고 합니다. 시각장애인을 눈을 뜨게 한 기적도 메시야적 기적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모든 기적이 메시야적 기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생애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것들입니다. 
  
메시야 대망은 유대 신앙의 핵심입니다. 메시야를 대망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메시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입니다. 삶의 의미입니다. 경건의 영입니다. 믿음의 결정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가치 있는 상대입니다. 가치 없는 상대는 기다리지 않고 가치 있는 상대는 얼마든지 기다립니다. 냉면이나 설렁탕 한 그릇을 먹기 위하여 30분을 기다려 10분 만에 먹고 나옵니다. 기다릴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인내와 기다림이란 그리스도의 제자의 증명서였습니다. 
  
기다림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내년 덕분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년은 달라지겠지, 내년에는 가난을 벗어나겠지 라는 희망이 사람을 살게 합니다. 사람에게는 기대감이 사라지면 죽습니다. 
  
헬라신화의 오디세이는 10년 동안 전쟁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의 아내 헬레나는 여러 가지 유혹을 뿌리치고 베를 짜면서 10년을 기다리다 남편을 만납니다. 아름다운 기다림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망부석’이란 말이 있습니다.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8:19에는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것은 바울 시대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의 절대 조건의 하나는 메시야를 대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이런 조건을 충족한 것입니다. 
  
2세기의 순교자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Martyr)는 원래 이교도 가정에서 테어나 철학을 비롯한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젊은 학자로 세상 학문에 심취해 있을 때에 회개하여 유명한 변증학자 되었습니다. 그이 ‘변증론’(Dialogue with Trypho)은 현존하는 가장 오랜 변증론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165년경에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 에베소 해변을 홀로 산책하고 있을 때에 한 노인이 나타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노인의 말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에게 헌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의 그 해변은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무화과나무 아래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대망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그 자리가 필요하며 그 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 

클레어보의 버나드는 기독교사의 마지막 교부이며 중세의 고결한 인물입니다. 그는 2차 십자군전쟁을 주창한 교회의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수도사이며, 신학자이며, 교회지도자이며, 행동가이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지도력과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숲 속 수도원에서 많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숲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다. 숲과 돌은 어떤 스승한테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하였습니다. 

더위가 막바지입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폭염주의보가 내려집니다. 이런 더운 여름 나무 아래는 숨을 돌이키고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좋은 자리입니다. 우리가 나무 아래서 그리고 숲을 찾을 때마다 나무와 숲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의 나다나엘처럼 나무 아래에서 고결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기르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의 재림을 대망하는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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