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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의 덫 (삼하 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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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덫 (삼하 11:1-15)


그 때에 다윗 왕이 왜 전투에 출전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그 동안 있었던 이웃 나라들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했기 때문에 약간 교만해졌던 것 같습니다. 사무엘하 8장 14절 하반절 말씀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그렇습니다! 다윗은 어디로 가든지 이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잘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럴 것이라고 이미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다윗이 잘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싸움을 이기게 하셨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여간 다윗 왕은 교만해졌고 싸움의 상대인 암몬 자손을 얕봤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온 이스라엘 군대가 출전하는 전투에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은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저녁 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옥상에서 거닐었다는 것을 보고 그가 게을러졌던 것 같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 지방의 풍습을 생각하면 그런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한낮의 더위를 피해 낮잠을 잔 후 저녁 시간에 일어나 일을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 때에 다윗 왕의 눈에 희한한 광경이 들어왔습니다. 한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일부러 훔쳐보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자세히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여인의 벗은 모습은 다윗의 눈에 심히 아름답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내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 결과 충성스러운 부하 장수인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다윗 왕은 거기서 끝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지 않았습니다. 부하의 아내라는 사실을 안 이상 더 이상 욕심을 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추한 욕망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전령을 보내서 여인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왕의 권세로 여인을 데려왔다는 말입니다. 마침내 그 여인을 데려와서 동침했습니다.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 다윗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죄가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웬 일입니까? 다윗 왕과 동침하고 집으로 돌아간 그 여인이 덜컥 임신을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사람을 보내 임신한 사실을 다윗에게 알렸습니다. 여인이 임신한 사실을 왜 다윗에게 알렸는지 성경에 기록된 바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짐작하건대 남편이 있는 여인으로서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다윗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뭔가 대책을 빨리 세우도록... 

밧세바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다윗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이 취한 행동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죄를 범한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임신이 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 올려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밧세바의 임신이 다윗 때문이 아니라 남편 때문인 것처럼 꾸미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우리아는 정말 충직한 군인이었습니다.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을 묻자 우리아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삼하 11:11)

그러자 다윗 왕은 다시 계략을 세웠습니다. 우리아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아내와 동침하게 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교활한 술수와 우리아의 우직한 태도는 그 옛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던 요셉을 연상시켜 줍니다. 여기서 젊은 요셉을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 역을 다윗이 맡았고 요셉 역은 우리아가 맡았습니다. 다윗은 타락의 늪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갔고 반면에 우리아는 마땅히 지킬 도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다윗 왕은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수단을 썼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아로 하여금 전투 중에 죽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 뭐라고 썼습니까?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삼하 11:15) 우리아의 죽음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 죽은 것 같았지만 실상은 다윗의 더러운 죄를 숨기려는 음모에 희생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권력자가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힘없는 백성의 고귀한 생명을 빼앗는 일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백성을 희생시킨 왕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의 가정에서, 또 그의 자식들 사이에서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이 계속되는 비극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의 악랄하고 교활한 계략은 일단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우리아는 계획대로 전투 중에 죽지 않았습니까? 말 그대로 완전 범죄가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밧세바를 다윗이 아내로 맞기까지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외면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사무엘하 11장 27절 하반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일의 시종을 쭉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시종일관 지켜보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교만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만해질 것 같으면 덫에 쉽게 걸릴 수 있습니다. 다윗이 부하들과 함께 출전했을 것 같으면 결코 유혹의 덫에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만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잠언 기자도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그 당시 암몬 자손과의 전투는 요압과 그의 부하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다윗이 잘 싸워서 싸움에서 모두 이긴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도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유혹의 덫에 한 번 걸리면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아니 유혹의 덫에 걸리면 죽습니다. 유혹의 덫에 걸리면 남도 죽이고 나도 죽습니다. 때문에 애당초 덫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죄를 범하면 그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물론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만물을 지으시고 또 만물을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범죄 사실을 숨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철저히 회개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죄를 자복하고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애당초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그 하나는 잘못을 들킨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을 들키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른 길에서 벗어난 그릇된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 왕의 경우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윗은 죄 없는 우리아를 죽여서라도 자기가 범한 죄를 숨길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다윗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늘 우리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신문을 펼치기가 두렵습니다. 정치인들의 추태는 이제 별로 충격을 주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신문을 펼치면 하루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성추행, 성폭행, 그리고 그에 따른 살인에 관한 기사가 그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범죄를 부채질하는 음란, 퇴폐, 향락 문화가 과연 어디까지 갈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습니까? 오늘 한국 교회의 타락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도 바로 교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성범죄가 아닙니까? 참으로 얼굴을 들기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도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 6:3) 어떤 일이 있어도 교만해지면 아니 됩니다. 주님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 특히 죄를 범한 인물이 다윗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이 실족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특히 눈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 5:29 상반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함으로 말미암아 온갖 유혹을 이기고 마침내 승리의 면류관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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