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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로운 관점으로 (고후 4:16 - 고후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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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관점으로 (고후 4:16 - 고후 5:5)  

사람이 이 세상을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끝일까?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한 실험이 있다. 즉 임사 체험자들인데 그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이것이다. 사람이 운명할 때 육체는 죽지만 사람의 영은 살아있어 육체의 무너진 집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공상 또는 망상처럼 생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학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과학이란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하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더욱 더 보이는 육체만을 위해 살고 육체라는 장막 집만 단장한다. 보이는 육체가 이끄는대로 살되 영혼이 이끄는대로 살지 않는다. 즉 겉사람만 중요시 여기지 속사람은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육체라는 집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아무리 인삼을 비롯한 보약으로 단장하고 리모델링, 성형 수술을 해도 한 순간에 무너지는 집이 우리 인생의 육체이다. 그러므로 관점을 다르게 해야 한다.  

1.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시 여겨야 한다. (고전4:18, 5:1)

고후5:1에서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육체를 장막 집이라고 하였고 그 집이 무너지는 날, 하늘에 있는 집,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으로 간다고 하였다. 고전2:3~5을 보라. 삶의 노년이란 다 허물어지는 집이고 죽는다는 것은 육체는 땅으로,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에 너무 주목하지 말아야 한다. 영혼의 머무는 집으로서의 육체는 장막에 불과하다. 장막이란 수시로 철거되는 집이다. 임시막이다. 이런 집에 거하는 영혼이 육체와 이탈될 때 아버지 집, 하나님의 집으로 떠나간다는 것을 중요시 해야 한다.

바울은 고후4:18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즉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 안 보이는 것이다. 육체라는 겉사람이 아니라 육체 속에 거하는 영혼의 사람, 속사람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나, 영원하도록 존재하고 있는 영체로서의 나에 집중해야 한다. 무너지지 않는 내 영혼, 소멸되지 않는 내 영혼이 보이는 장막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잘 되도록 새로운 관점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 속아 향락, 미모, 권세에 속아서 음부의 지옥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천사의 인도를 받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집에 들어가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2. 죽는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소망으로 나아가자. (고후5:2)

바울은 고후5:2에서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 하였다. 바울은 어떤 면에서 하늘의 집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집에 들어가는 것을 사모하는 바울은 인생이란 짐이 고달파서 벗고자 함이 아니라고 하였다. 삶이 너무 무거워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덧입으려는 소망 때문이었다. 즉 죽은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었다. 썩은 몸, 낡아지는 몸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함이었다. 고후5:4에서 이것을 대망한다는 것을 “탄식한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어서 아버지의 나라로, 어서 하나님의 집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 그의 신음 소리였다는 말이다. 

육체를 입고 사는 것은 죄성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은 은혜를 외면하고 죄악으로 가게 한다. 탄식이란 육체의 죄성에서 벗어나려는 신음 소리이다. 완성된 구원을 대망하는 소리다. 바울의 사생관이 여기 있다. 죽는 것은 슬프지 않다. 죽으면 천국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도착하는 것이다. 바울은 주님께로 가는 것을 사모하였다. 아니 살아있는 이 세상의 삶보다 더 좋은 일이라고 소망하였다. 

빌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놀라운 고백이다. 어찌하여 바울은 이렇게 철저히 죽는 것을 거리끼지 않을까? 나는 지금 죽으라고 하면, ‘아니 조금 더 있다가 할 일이 남아서요.’라며 핑계를 될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을 분명히, 그리고 똑바로 알고 있다.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에서 사망의 원수는 박살이 난 것을 확신하고 있다.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부활을 믿는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겼다. 그를 믿는 자는 죽음이 문제가 안된다. 죽은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었으니 죽음은 새로운 삶의 변화다. 우리는 가야 할 처소가 있다. 그러기에 그 처소를 간절히 사모하게 된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주님을 떠나보내고 주님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십자가의 죽음이 눈 앞에 있는데도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죽음이란 신앙의 새 관점을 가진 이에게 근심해야 할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 집으로 가는 출발이다. 천병상 시인의 시처럼 이 땅에 소풍을 왔다가 돌아가는 날이다. 장막을 거두고 하늘 맨션, 예비된 곳으로 처소를 바꾸는 날이다. 영혼이 머물러 있던 장막 집을 벗어버리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떠나는 여행의 시작이 죽음이라는 것도 안다면 소망이 생긴다. 설레임이 생긴다. 우리는 바울처럼 하늘의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면 죽음을 뛰어넘는 특별한 삶을 살 수 있다.
  

3. 성령이 소망의 삶을 보증하셨음을 알라. (고후5:5)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준비의 삶이 이 세상의 삶이다. 소망으로 아버지 집을 사모하며 살기에 여기서의 삶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충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새 관점은 주와 함께 머물 하나님의 집이다. 그런데 이런 소망의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된다. 보는 것으로만 행하는 내가 믿음으로 행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소망의 삶의 보중으로 성령을 주신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우리가 내세, 소망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떠나가는 주님을 대신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하나님이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그 보혜사 성령,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오시면 확신이 생긴다.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 성령은 우리의 보증이 되신다. 즉 아버지의 집, 하나님이 지으신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의 것임을 보증하신다. 그 집을 간절히 덧입기를 사모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보증하신다. 겉사람보다 속사람이 더 중요하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 장막 집보다 하늘의 집이 더 중요한 것임을 보증하신다.

보이는 것은 다 변질되고 퇴화되고 소멸되어가도 보이지 않는 영은 죽지 않는다는 보증을 성령님이 해주신다. 이 보증으로 영적 진리를 알게 되니 삶의 새로운 관점으로 산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영으로 죽지 않게 된 나는 나의 몸, 썩고 사라질 육신의 장막 집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게 됨을 보증 받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약속이다. 

고전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죽음은 사탄의 최고 무기였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속이지 못한다. 사탄이 죽음을 앞세워 100년 밖에 안되는 삶이라고 허무와 비관, 우울과 슬픔으로 공격해 왔으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주 안에서 잠시 잠자는 것이요 새로운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떠나는 여행의 시작이다. 인생이란 우울할 수가 없다. 성령이 보증하신 내 삶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나아간다. 그러기에 고후5:6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라고 하였다. 주눅 들거나 슬프거나 망설이는 삶을 살지 않는다.   

이 땅에서 육체를 벗고 하나님의 집을 수 백번 다녀온 이가 있다. 그는 스베덴 보리다. 그는 스웨덴의 수도에서 태어난 과학자로 아이작 뉴튼과 같은 최고 천재 과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57세 하늘에 다녀오는 체험을 한 후 지옥과 천국을 기록으로 남기고 하늘 나라의 삶, 영생의 삶을 전하는 이가 되었다. 그는 말하길 나같은 과학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영계의 진리를 알고 보니 이는 학문이 아니고 인류의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이다. 이 특별한 소명은 내가 과학자로 공헌하는 것보다 수 천, 수 만배 더 중요하다고 하고 그는 과학자의 길을 멈추었다. 그의 책, 「위대한 선물」에 실린 찬사의 글을 보면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다. 스베덴 보리를 알고 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천국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천국에 가면 나는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닌 것도 알았다. 나는 그의 저서를 읽은 후 죽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천국의 여행기인 책만 읽고도 삶이 담대해진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갈 곳이 분명하게 있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고 성경책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다. 거기다가 성령으로 보증해 주시는 소망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영혼의 때를 위해 사는 나는 초점이 달라져야 한다. 주님, 아버지 집, 주님과의 만남을 향한 여기에서의 삶이란 성장과 더 나은 변화와 더 나은 삶의 준비로 서야 하지 않겠는가?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서야 하지 않겠는가? 

어리석고 더러운 삶의 집, 육체를 위해 살던 삶의 집을 가볍게 하고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삶을 다시 꾸리는 전환과 결단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버지 집에 들어가는 내 영혼이 주님과 닮은 모습이 되어 그 얼굴과 용모, 옷들에서 거룩한 빛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새로운 관점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내 인생을 새롭게 정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리석은 자가 되어 지상 백 년동안이 삶의 전부인 줄 알고 육체만을 위한 삶을 추구하다가 영원한 천국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지혜로운 자가 되어 이 지상에서 영생 천국으로 나가기 위해 백 년을 투자하는 영혼의 때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양화지 묘역에 가 보라. 이국 땅인 조선에 와서 생을 마친 선교의 사람들, 그들은 어리석은 투자를 한 것인가? 엘리엇(J.Eliot) 선교사는 휫튼 대학을 수석으로 마치고 교수 회의에서 학교 교수직을 제의 받았던 신앙인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식인족인 아쿠와족 선교를 나갔을 때 선교지에서 순교를 당하였다. 그때 발견된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써 있다.

“영원을 향한 나의 삶의 투자를 향해 어리석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 모두 무너질 육체를 위해 투자하는 삶을 버리고 내 영혼을 위해, 수많은 영혼을 위해,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상 받는 영혼을 위해 투자하고 살자. 새로운 것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관점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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