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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망설이지 마세요! (삼하 6:1-5, 12b-19, 막 6:14-29, 엡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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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마세요! (삼하 6:1-5, 12b-19, 막 6:14-29, 엡 1:3-14)

<망설이다가 망한 사람>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신앙이 어정쩡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싶지만 죄는 청산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이 이러한 망설임을 잘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순결하게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고 싶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더 세상적인 것 누리고 나중에 힘 빠지고 늙어지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다 받고 싶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대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권리는 찾고 싶지만 의무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내가 다급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셔주시길 바라지만, 나는 하나님과 항상 함께 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에게 하나님은 보험회사 직원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자동차 보험이든 상해 보험이든, 어떤 보험이든지 간에 주기적으로 보험회사 직원을 만나거나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보험에 가입할 때를 제외하고서는 커피 한 잔 함께 마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통사고를 비롯해서 심각한 사고가 일어나면 경우는 달라집니다. 제일 먼저 부리나케 찾는 것은 보험회사 직원의 전화번호이지요. 다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지요! 
     
이와 같이 만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험회사 직원과 같은 관계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축복을 받기 어렵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가 다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은 없습니다. 우리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에만 하나님께 매달리라는 말도 없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요구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급할 때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로 마가복음에 나오는 헤롯 임금의 이야기입니다. 헤롯 왕은 얼마든지 멋지고 행복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지만,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불행한 사람으로 남게 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설교자들이 좀처럼 설교하기를 꺼려하는 본문으로 유명합니다.
     
먼저 17절로 29절을 봅시다. 헤롯 왕이 세례 요한을 가두었습니다. 17-18절을 보면 헤롯 임금이 자신의 제수씨를 아내로 맞은 사실을 세례 요한이 꾸짖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왕비로 삼은 것이 옳지 못하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듣도록 비판적인 설교를 했다는 말이지요! 
     
사람이 옳은 말을 하고 의롭게 살면 세상이 듣고 존경해야 되는데 정반대인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충언과 직언을 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한다고 권력자들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이 호의호식하고 높은 자리에 중용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의로운 비판에 대해서 헤롯 임금과 그의 아내 헤로디아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먼저 헤로디아는 19절 말씀에 보면 세례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호시탐탐 세례 요한을 제거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남편인 헤롯 임금이 세례 요한을 보호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20절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헤롯 임금이 세례 요한을 존경했다는 말이지요!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왕비로 삼은 것은 결코 잘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도 알고 하늘도 알고 온 세상이 다 압니다! 하지만 헤롯의 서슬 푸른 권세 때문에 누구 하나 무서워서 말을 못합니다. 오직 한 사람 세례 요한만이 용기 있게 외쳤습니다. 
     
비록 자신의 비행을 지적하는 사람이었지만 헤롯은 요한의 의기(義氣)를 인정했다는 말이지요. 세례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인 것을 알고서는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보호해주려고 했습니다. 더 놀라운 말은 세례 요한이 자기의 비행을 공격하는 설교를 들을 때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달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까지 볼 때 아직 헤롯 임금의 양심이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헤롯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가 바른 길을 가지 못합니다.


<흔들리는 사람들, 헤롯과 빌라도> 
     
헤롯이 자기의 생일에 이스라엘의 모든 고관대작들을 초대했습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당대의 최고 실세들이 헤롯의 생일잔치에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이 기막힌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 기쁜 날 헤로디아는 자기 딸로 하여금 춤을 추게 했습니다. 틀림없이 뭇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도발적인 춤을 추었겠지요. 헤롯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신하들이 헤로디아 딸의 춤에 넋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소원을 말하면 나라의 절반까지도 주겠다고 약속을 해버립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즉각 엄마에게로 가 무엇을 달라고 청할까를 묻자,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 하라고 말합니다. 
     
25절을 보세요. “그가[헤로디아의 딸이]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어머니의 말을 듣자마자 다급하게 자기의 소원을 헤롯 임금에게 다그쳐 말합니다. 그런데 헤로디아 딸의 소원을 들은 헤롯의 말이 흥미롭습니다. 
     
26절을 보세요.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헤롯은 개인적으로 세례 요한을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너무 경솔하고 충동적인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군주가 대소신료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약속을 했다면 이것은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나라 안에 최고의 권력을 가진 실세들이 다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 권력자의 비극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항상 희생양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의 환심을 사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을 처형한 헤롯 임금과 예수님을 처형한 빌라도 총독 사이에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은 모두 우유부단한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 희생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이 바른 말 하는 것을 듣고서도 오히려 두려워하고 존경했습니다. 자기의 비행을 책망하는 설교를 들을 때 양심이 뜨끔뜨끔해져서 괴로웠지만 옳은 말이었기에 달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헤로디아와 그 딸, 그리고 잔치자리에 참석한 신하들이 문제였습니다. 자기가 무책임하게 내뱉은 약속도 있지만 주변의 실력자들을 위무(慰撫)해야 할 정치적 책임도 있었습니다. 빌라도 총독 역시 아무리 살펴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될만한 죄목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주고 싶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들이 문제였습니다. 국민 정서를 외면하고 자기 혼자의 옳은 생각만 고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양심과 정치적인 실리 사이에서 고민하고 주저하다가 결국은 사형 선고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 망설이는 빌라도의 모습을 새 번역 성경 마 27: 24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과 또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자신의 내적 양심에 따라 용기 있게 행동하지 못하고 외적인 상황에 급급해서 눈치를 보고 주저주저하는 빌라도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롯 임금이나 빌라도 총독은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함으로써 양심을 따라 옳은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진리의 길이 아닌 편리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 아닌,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옳습니다. 헤롯은 진리와 하나님께 관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을 멀리 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존경했지만 그를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너무 이 세상일에 관심이 많다보니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너무 중요시하다보니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했습니다. 
     
헤롯의 경우에는 세례 요한의 목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목소리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우리의 잠자는 양심을 깨웁니다. 설교를 듣다가, 성경을 읽다가, 친구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가, 심지어 찬란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다가, 아니면 서산에 지는 아름다운 낙조를 보다가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들 사이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하나님의 목소리를 놓친다는 사실입니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목소리,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목소리 보다는 세상의 소음에 더 쉽게 빠져드는 것이 우리의 약한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망설이면 안 됩니다!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의 소리,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과감히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할 때 생명이 있습니다! 행복과 구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헤롯 일가가가 의로운 사람 세례 요한을 죽였다는 과거의 사실을 떠올리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14절로 16절을 보면 예수님의 이름이 너무 유명해지니까 여기저기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설왕설래 말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서 돌아왔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나 옛 선지자들 중에 하나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16절을 보면 헤롯 자신은 자기가 목을 벤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의 이런 생각을 전한 다음에 마가복음 기자는 헤롯 자신이 요한을 참수한 사건을 회상하는 식으로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헤롯에게 세례 요한의 참수 사건은 두고두고 악착같이 따라붙는 악몽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춤을 출 것인가?> 
     
오늘 봉독한 구약의 사무엘하의 말씀과 신약의 마가복음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춤이 나옵니다. 먼저 다윗은 한 곳에 모셔두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던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왔을 때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임금이 채신머리없이 백성들 앞에서 춤을 춘다고 왕비인 미갈이 흉을 볼 정도였습니다. 다윗의 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해주시고 구원해주신 것이 너무 기뻐서 스스로 우러나 춤을 추었습니다. 
     
하지만 헤로디아 딸의 춤은 자발적인 춤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간교한 계략에 말려들어가 사람들을 유혹하는 춤을 추었습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도발적인 춤을 춘 결과는 의인 세례 요한을 죽이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살리는 춤이 있는가 하면 죽이는 춤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춤은 그 동기나 결과에 있어서 이렇게 다릅니다! 오늘 우리의 춤은 다윗의 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서 영광을 돌리는, 자발적인 춤이 되어야 합니다! 헤로디아의 딸과 같이 사람들을 홀리고 사람들을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한창일 때 조지아 주에 두 형제가 살았습니다. 형은 그 당시 주류 사회의 분위기와는 달리 인종차별은 철폐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흑인들을 비롯한 소수 인종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동생은 조지아주에서 알아주는 법률회사에 변호사로 취직해서 명성을 쌓아나갔습니다, 두 형제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유색인종의 권익을 돌봐주던 형이 인종차별과 관계된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 형은 변호사인 동생에게 유색인종을 변호하는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백인중심의 법률회사에서 일하던 동생 변호사는 괜히 잘못 끼어들어 갔다가는 자기의 직업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형의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형은 동생에게 네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의 양심이 있다면 제발 이 일에 뛰어들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때 동생은 이렇게 대꾸하면서 형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까지 따라갈 거예요. 하지만 그 십자가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십자가이지 제 십자가는 아니에요. 제가 십자가에 달릴 필요는 없잖아요.”(I will follow Jesus to his cross, but it is his cross. I have no need to be crucified.) 

동생의 대답을 들은 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야말로 예수님을 숭배하기만 했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는 아니구나.”(Then you are an admirer of Jesus, but not his disciple.) 
     
그렇습니다. 우리는 헤롯 임금과 마찬가지로 진리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은 있지만 그 진리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지는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저해서 안 될 것입니다. 진리를 알았고 우리의 잠자는 양심을 깨우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그 목소리에 응답해야 합니다. 주저해서 안 됩니다! 두 가지 사이에서 망설이면 안 됩니다! 헤롯이나 빌라도와 같이 역사의 죄인이 되어서 안 됩니다! 축복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다함께 오늘 봉독한 엡 1: 3절을 읽으심으로써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이제 주저하지 마시고 이런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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