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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의 밤이 올 때, 더욱 주님을 바라보라 (시 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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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밤이 올 때, 더욱 주님을 바라보라 (시 40:1-17)

성경은 부분 적으로 보기보다 전체적으로 보아야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시편 40편은 2절이 유명합니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구절입니다. 
(개역개정판) 시 40: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그러나 시편 40편의 진정한 은혜는 이 시편을 끝까지 읽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윗의 고백에 너무나 충만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시 40:1 내가 간절히 주님을 기다렸더니, 주님께서 나를 굽어보시고, 나의 울부짖음을 들어 주셨네. 
3 주님께서 나의 입에 새 노래를, 우리 하나님께 드릴 찬송을 담아 주셨기에,
5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많이 하시며, ...내가 널리 알리고 전파하려 해도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8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9 나는 많은 회중 앞에서,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아시듯이, 내가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을 보니, 추측컨대, 다윗이 사울의 박해를 피해 도피생활을 하고, 미친 척도 하고, 동굴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가,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다가 길보아 산에서 패하여 전사함으로 사울의 시대가 끝나고 다윗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부른 노래가 아니었나 추측이 됩니다. 
“기도 응답을 노래하고! 찬송이 터져나오고, 주님의 뜻을 해하는 것이 즐겁고, 평생 주님만 전하며 살고 싶습니다!” 고백합니다. 여기까지는 분위기가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11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에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12 ...눈 앞이 캄캄합니다. ...나는 희망을 잃었습니다. 
13 ...주님,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17 나는 불쌍하고 가난하지만, 주님, 나를 생각하여 주십시오. ...
나의 하나님, 지체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 성경을 묵상할 때, 많은 분들이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까?
설교 준비하는 저도 한동안 메시지의 핵심을 잡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로 이 혼란스러움, 그것이 메시지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큰 기쁨을 경험한 자에게도 영적 시련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16세기의 성인으로 추앙되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영혼의 어둔 밤]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혼의 어두운 밤은 더 이상 낯선 표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시련의 때가 오듯이 믿음의 여정에서도 어두운 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눈이 뜨이면 너무 기쁘고 황홀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영생이 있고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은 내 마음에 임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충만함이 곧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침체가 옵니다. 마음의 기쁨이 사라지고 버림받은 느낌, 두려움, 수치심, 불안감, 아무리 주님의 이름을 불러도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도대체 하나님은 계시나? 어디 계시나? 왜 침묵하시나? 
영혼의 밤이 있습니다.

다윗 뿐 만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100세에 이삭을 얻고 다시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듣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었고, 요셉은 13년간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갔었고, 예레미야는 진흙 구덩이에 빠졌었습니다. 엘리야도 열왕기상 19장 4절에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기도했고,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셨지 않았습니까?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도 수년 동안 깊은 내적 어둠에서 갈등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했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느꼈으며 더욱이, 하느님이 진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단계를 겪게 하실까요?
큰 죄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가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과정에서 체험하는 단계라고 이해했습니다. 영혼의 밤을 만나니 비로서 아직 죽지 않은 자신의 모습, 실체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영혼의 정화가 일어나고, 온전히 자아가 십자가에 처리되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혼의 밤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밤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니 주셨다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혼의 밤이 와도 오히려 기뻐하게 할 수도 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5:11-12 “성경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실제로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행 5:40-41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성경에서만 아닙니다. 증인들이 많습니다.

18세기 초 요한 웨슬리가 동생 찰스 웨슬리와 더불어 신앙운동을 벌이던 시절에 그의 사역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당시 성직자들은 존 웨슬리를 이단으로 간주했으며 교회 밖으로 내쫓았다. 그에 대한 온갖 좋지 못한 소문들이 떠돌았고 온갖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정부는 물론 사회와 교회의 지도층에서는 그를 반대하는 책과 전단들을 뿌리며 그의 선교활동을 방해했다. 
폭도들 때문에 그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러한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하나님을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어느 날 요한 웨슬리가 말을 타고 가다가 문득 지난 사흘 동안 자신이 아무런 핍박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사흘 동안 아무도 그에게 벽돌이나 계란을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즉시 말에서 내려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자신이 핍박을 받지 않은 것이 죄를 짓고 타락했기 때문이 아닌지 기도로 하나님께 묻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게 있으면 알게 해 달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했다.

마침 길 건너편에 있는 울타리 한쪽 끝에 서있던 어느 사내가 그 기도 소리를 듣고서 존 웨슬리인 것을 알아보았다.“잘 됐어. 저 감리교 목사를 이번 기회에 단단히 손을 봐주고 말겠어.”그리고는 사내는 벽돌 하나를 집어 들고서 웨슬리를 향해 힘껏 던졌다. 고약한 사내가 던진 벽돌은 다행히 웨슬리를 살짝 비켜서 날아갔다. 
그러자 웨슬리는 그 사내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크게 기뻐하며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하나님 감사합니다. 괜찮았군요. 제가 아직도 당신의 임재 가운데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의 밤이 올지라도 얼마든지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한동대의 김영길 총장님, 한동대가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대학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려다 보니, 평범하지 않은 설립과정들과 재정난들을 겪으면서 온갖 구설수와 어려움을 급기야 일간지에 김영길 총장님을 비난하는 성명서가 실리기까지 되었습니다. 그 때 아내되는 김영애 권사님은 통곡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영길 총장 본인은 보통 사람 같았으면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을 일을 당하고 들어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하시고 코까지 골며 주무시더랍니다. 사모님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시고도 아무렇지도 않아요?’고 물으셨답니다. 총장님의 대답이 정말 걸작이셨습니다.‘죽었는데 뭐 ....“ ”.하나님께 내 이름을 쓰시도록 올려 드렸는데, 그분이 높여 주실 때만 나를 드리고, 낮추실 때는 드리지 않을 작정이었소? 내 이름의 주인 되시는 분이 내 이름을 가지고 볶아 잡수시든지 삶아 잡수시든지 나는 아무 권리가 없소!”

밤은 괴로워하고 소리지르고 몸부림친다고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밤은 밤대로 주시는 유익이 있으리라 믿고 여전히 찬양하고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 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 불평하여 말지어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러나 영혼의 밤이 올 때, 주님을 바라보면 이길 수 있음을 알아도 주님을 바라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도 사람인지라 영혼의 밤이 오면 혼자서 이기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린 자가 영혼의 밤을 만나 흔들리는 자를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속회가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밤을 맞은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외면하면 안됩니다. 품어주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마이클 야코넬리의 [영성]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영국의 한 목사가 어느 주일 성도들에게 이제 자신은 더 이상 기독교를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사임하겠다는 광고를 했다. 
성도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장로들은 목사에게 예배를 마친 후 성도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지는 제안을 했다. 모두들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목사의 사임은 받아들여질 것이고, 퇴직금 문제가 거론되고, 새로운 목사를 찾는 일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장로들은 목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목사님, 기독교는 진리가 아니라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몹시 힘들었을 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목사님이 계속 우리 교회에 남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대신에 매주 우리에게 기독교에 대한 목사님의 의혹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목사님과 논쟁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목사님에게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계속 듣고 싶습니다." 

그 후로 3년 동안 목사는 자신이 의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설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설교를 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다시 믿음을 찾았습니다. 지금까지 복음을 믿고 신뢰해 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믿음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는 침체에 빠져 허덕였고, 피곤에 지쳐 있었고, 혼란과 의심이라는 모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가 침체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침체를 벗어나 다시 힘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시 머물러 있어야 할 곳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된 비범한 교회는 진리와 씨름해야 할 목사의 필요를 이해했다.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그들은 진리를 믿었다. 또한 기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감수해야 했던‘후퇴’에 대해서도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의심에 빠졌던 목사가 마침내 다시 믿음을 찾았을 때,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내 이 성도들 속에 숨어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저에게도 이렇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원하십니까?

영혼의 밤이 왔다고 느낄 때, 서로 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면 아무리 캄캄한 밤을 맞아도 반드시 마음 속에 빛나는 태양이 떠오를 때를 맞이하게 됩니다.

다윗이 이러한 시험을 이긴 비밀은 영혼의 밤이 왔을 때 주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16절 그러나 주님을 찾는 모든 사람은,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은 쉬지 않고 이르기를 "주님은 위대하시다" 할 것입니다.

예수 믿고도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 진짜 예수님을 붙잡으셔야 합니다.

부산제일교회, 사찰 집사님, 어떤 사람이 지하 교육관에서 술이 취해 잠을 자기에 깨워 나가달라고 했더니, 멱살을 잡고 소리지르기를 “나 전도사야, 나 시험들었어, 시험들어 그런 거라고, 왜 이래!” 하더랍니다. 이러면 해결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도록 도와주세요. 나를 위하여 함께 기도해 주세요!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려주세요!”하면 됩니다.

휴대폰, 항상 전원 점검하지 않습니까? 전원이 나간 휴대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휴대폰 전원 보다 더 점검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영성일기를 쓰면서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익숙하게 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답답할 때가 와도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만도 놀라운 일입니다.
슬퍼하고 우울해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사랑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니 기적입니다.
영성일기가 매일 매일의 영적 거울과 같아서 어둠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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