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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하기 때문에 용납하는 것들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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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기 때문에 용납하는 것들 (눅 5:1-11)

오늘 드릴 말씀은 지난 주 새벽기도회에서 전한 말씀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지난 주 새벽기도회 시간에는 디모데전서에 있는 말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라는 구절을 가지고 일주일 내내 공부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런데 제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도대체 이 구절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집안의 가장이 가족들을 불러다 놓고 ‘아빠가 돈을 잘 못 벌어와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니까 족한 줄로 알아라.’ 이렇게 말하면 아내에게 얻어맞지는 않더라도 가족들에게 인기를 얻는 데에는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 아빠 최고다!’ 이런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처녀에게 청혼하는 청년이 ‘저에게 시집을 와 주시면 호강을 시켜드리지는 못하겠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을 테니 족한 줄로 아십시오.’ 이렇게 말한다면 누가 시집을 오겠습니까. 호강을 시켜준데도 올까말까 한 판에. 

만일 기업체의 CEO가 임직원들을 모아놓고 ‘제가 여러분에게 더 나은 대우를 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지만 여러분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임직원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노조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주주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주가는 폭락할 것이고 아무도 그 회사에 가서 일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말할 때 ‘제가 공약한 대로 여러분을 더 잘 살게 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지만 그래도 여러분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족한 줄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국민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마 탄핵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누가 그런 사람을 뽑아주겠습니까. 뭣 하러 대통령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유일하게 우리가 이러한 발언을 용납하는 경우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지니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수긍하는 것이고 가장이 이런 말을 했다면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기업인이 이런 말을 했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면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하고 수긍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실천하느냐. 그건 별개의 문제에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충분히 하실 수 있고 우리가 그 말씀을 무시할 수 없고 받아들여야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가족계획에 대하여, 피임에 대하여, 인구문제에 대해서 염려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가족계획을 강조합니다. <생기는 대로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60년대 표어입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요즘은 좀 달라졌지만. 또 에이즈 같은 질병예방에 대해서 염려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피임에 사용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성적인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많은 젊은이들 당연히 피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만이 유일하게 가족계획과 피임을 반대합니다. 이것이 천주교의 공식입장입니다.

과연 전 세계의 천주교인들 중에 몇 명이나 이 지시를 순종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교회가 하는 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하고 용납합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 거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니까 당연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그게 아니고 교회가 나서서 피임과 가족계획을 장려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 될 것입니다. 교회가 너무 인간의 현실에 대하여 현실적이고 쉬운 말을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의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교회 가르침이 인간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가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물 타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함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교회의 메시지인지 세상의 메시지인지 구별하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소위 성공의 비결 같은 메시지, 요즘 몇 년째 서점에서 제일 잘 팔리는 책이 성공학에 대한 책입니다. 사람들이 굳이 교회에 오지 않아도 성공의 비결, 자기개발에 대한 노하우는 얻을 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뭣 하러 교회까지 여기에 동참해야 된다는 얘기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물 타기를 해 가면서. 이게 다 사람의 현실에 다가가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러는 중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세상의 지혜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워진 면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다음에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육지에서 조금, 많이는 아니고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그리고 그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육지에서 조금 띄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됩니다. 이건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가 우연히 이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여기에는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육지 즉, 땅,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띄웠다는 말은 하나미의 말씀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이유는 사람의 생각, 사람의 현실, 사람의 합리성, 사람의 필요성, 사람의 입장 이 모든 것과 약간 거리가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의 생각, 필요, 현실을 그대로 부합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의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읽어보신 분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장생활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으셨고 결혼생활에 대해서 일절 언급하지 않으셨고 자녀교육에 대해서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가정의 경제, 국가 경제, 민주주의, 정치, 문화, 예술에 대해서, 우리가 평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거의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희한한 일이지만 사실이에요.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셨지만 예수님은 한 번도 건강에 대해서나 위생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셨지만 한 번도 가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경제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성들을 위하셨지만 여성의 권익, 지위 향상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식민지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애환을 이해하셨지만 이스라엘의 독립이든 로마에 대한 저항에 대하여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는 어려운 말씀이로다 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가난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고 애통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다른 것입니다.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거룩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납득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고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실천하고 그것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쉽게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습니다. 저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불평이 많은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왜 그렇게 어려운 말씀들만 하시느냐. ‘오른뺨을 돌려대라’ 이런 말씀, 얼마나 어렵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친구도 사랑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까. 또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갖는 자마다 간음했다’ 그럼 남자를 보라는 얘기입니까. 저는 이런 것에 대하여 이렇게 불가능한 말씀만을 하실까 불만이 많았는데 지금은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우리의 현실 사이의 거리, 거기에 거룩함이 있는 것입니다. 임의로 이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이 오히려 오류와 오해를 낳습니다. 우리가 좁힐 수 있는 게 있고 좁혀서는 안되는 게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 그건 좁혀야 됩니다. 남녀 간의 격차, 이것도 좁혀야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격차, 좁혀야 됩니다. 

그러나 거룩함과 세속함의 격차, 그것은 좁히려고 하면 안 됩니다. 가톨릭 성당 내부에 들어가 보면 신부님이 집전하는 강단은 성도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해놓았습니다. 그 사실을 아십니까. 어떤 성당은 아예 강단 주변에 철창까지 쳐놓았습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오늘 본문에서 그 원리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육지에서 거리를 띄우시고 거기에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느냐.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시장 잡배들과 어울려서 말씀하시는 것과는 다른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거룩한 성격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와 전혀 상관이 없는 고상하고 고결한 말씀뿐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불신자들의 결정적인 실수에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어렵다, 거룩하다, 나와 상관이 없다고 아예 관심을 꺼버렸어요. 이것이 불신자들의 미련함이요 오만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것은 실수에요. 미련한 실수, 오만한 실수에요. 

우리가 조금만 기다리고 조금만 견딜 수 있다면 조금만 더 겸손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무리를 가르치신 다음에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가 밤새 수고를 했지만 얻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아시고 무리를 다 가르치신 다음에 베드로에게 그의 가장 문제의 핵심의 해결책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았으나 소득이 없었던 사람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도움이 되는 말씀을 던져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회가 끝나서 다 돌아간 후의 일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무리와 같이 떠나갔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리와 같이 떠나가지 아니하고 좀 더 시간을 내서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말씀을 그에게 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에게 좀 더 기회를 드리지 않습니다. 쉽게 단정내리고 쉽게 싫증내고 쉽게 떠나갑니다. 저는 성도님들의 그 동기를 이해합니다. 효과적인 사람일수록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아주 유효한 방법이에요.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거두는 것. 

그러나 신앙생활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거두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건 하나님의 나라에는 통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가 끝났다고 곧바로 떠나가는 사람, 불필요한 모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 나와 상관이 없는 교회행사에는 신경을 끄는 사람, 이게 소위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인데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육지로부터 거리를 띄운 다음에 하신 말씀은 들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집회가 끝난 후에 예수님이 베드로 개인에게 깊은 데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주시는 레마의 말씀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속한 고결하고 고귀한 말씀만 하는 게 아니에요. 땅에 속한 말씀도하십니다. 

우리와 관계된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모르는 것이고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일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덤으로 선물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건 받아본 사람만이 압니다. ‘주가 나와 동행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받아본 사람만 압니다. 이러한 역사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베드로가 밤새 수고를 했으나 얻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저는 열일곱 살에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겠다고 헌신한 다음부터 인생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저의 진학이든 진로든 그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 예수님께 헌신한 다음에 쉽고 평이하게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반대로 제가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방법으로 살 때는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성경말씀 그대로입니다. 높아지려고 하면 낮추시고 낮아지면 높이시고 우리가 살고자 하면 죽고 죽으면 삽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거룩한 말씀입니다. 어려운 말씀이에요. 진리의 말씀이에요. 우리가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청종해야 됩니다. 그 말씀을 존중하고 마음을 열고 최대한 따라야 됩니다. 그러노라면 주님께서 내게 축복이 되는 말씀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나의 삶에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인도를 하실 때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베드로가 경험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것도 염려하지 않고 예수님을 좇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이 되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요 우리는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하여 신앙이 장족의 발전을 할 수가 있습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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