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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의도 : 회심, 칭의, 입양 (롬 8: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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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도 : 회심, 칭의, 입양 (롬 8:28-2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8-29)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우리는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를 성경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하여 타락한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대속의 죽음으로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 구원은 몇가지 단계로 진행되는데, 일반적으로 소명--중생--회심--칭의--입양--성화--견인--영화의 순서로 말하여집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소명과 중생의 단계를 우리의 정서적 심리적 문제들과 연계시켜 살펴보았습니다. 소명 교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통제에 절대 순종하기 위해 절제력을 키워야 함을 배웠고, 중생 교리를 통하여 우리는 성령님의 빛을 받아 우리 속에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는 부분을 자각(自覺)하고 이를 주님께 숨김없이 개방해야 할 필요를 배웠습니다. 

이 시간은 구원의 순서 중 회심과 칭의와 입양의 단계에 관한 성경적 관점을 찾아보며, 각 단계와 연계되는 우리의 정서적 심리적 치유의 문제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회심 (돌이킴, Conversion) 

어느 눈 내리는 주일 아침, 챨스 스펄젼은 작은 교회당에 도착했습니다. 설교자는 이사야 45:22을 설교의 본문으로 잡았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비록 설교의 어투와 논리는 변변치 않았으나 설교자의 태도는 너무나 진지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설교자는 발코니에 앉아 있던 스펄젼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젊은 친구! 자네는 몹시 비참하게 보이는군···만일 오늘 본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자네는 계속 비참할 것이야.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게나. 그러면 살 것이야.” 

그때 청년 스펄젼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그의 영혼에 덮여 있던 흑암은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구원을 찾은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의 돌이킴에 관한 이야기에서 보듯이, 회심은 거듭난 사람이 의식적인 행동을 통하여 회개와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돌이킴은 두 가지 돌아섬을 의미합니다. 하나는 죄로부터의 돌아섬이며 또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에로의 돌아섬입니다. 회심은 자기 중심주의와 죄의 삶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의식적인 선택을 의미합니다. 회심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역사로 가능해지지만, 사람이 실제로 반응하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롬 10:9-10, 13=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넓은 의미에서 회심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합니다: 마음이 조명을 받아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인가를 알게 되고, 죄의 쓰라린 결과들에 대해 진정으로 슬퍼합니다. 죄를 겸허하게 고백하고, 죄를 증오하여 죄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전심으로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즐거움을 삼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회심의 요소들을 살펴보면, 회심이 하나님의 일임과 동시에 사람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회심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비록 돌이킴이 거듭남의 외형적 증거이긴 하지만 거듭남을 통하여 심겨진 새로운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서만이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러한 새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을 통한 능력으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힘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엡 3:16). 

그런데 좁은 의미에서 회심을 중생으로부터 구별짓는다면 회심은 사람의 사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돌이키다’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74회 사용되고 오직 다섯 번만이 하나님의 행동으로서의 돌이킴을 지칭합니다. 또한 신약에서는 이 단어가 26회에 걸쳐 돌이킴을 인간의 행위로, 오직 두 서너 번의 경우에 하나님의 사역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회심의 교리는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심지어 우리의 기본적인 성격 구조까지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는 일어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옛 습관과 삶의 방식을 바꾸려 하면 몇 번이고 실패를 반복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대해 종종 자포자기 합니다. 

그런데도 회심을 하면 성격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심 이전과 이후에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기로 자신을 헌신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심에 수반되는 변화들은 역동적인 변화입니다. 옛 성품에서 새 성품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고 첫 아담의 모습에서 마지막 아담의 모습으로 우리는 변화합니다. 하지만 심리적 수준에서 즉각적이고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즉시 되돌리거나 완전히 회복시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형상을 향한 회복과 갱신(renewal)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이 결과로 나타나는 심리적 변화는 급진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기본적인 성격이 늘 아주 안정적인 사람들에 비해 정체감이 약한 사람들에게서 변화는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회개는 우리에게 생활방식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회개를 경험한 사람은 세상에 등을 돌리고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것이 인간 의지의 문제가 됩니다. 생활방식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마음속에서 이루신 성격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돌이키셨습니까? 가장 중요한 변화는 행동적인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마음의 문제입니다. 회심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한 방향 전환의 문제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분상 변화를 경험한 자이고 새로운 마음과 정신을 갖게 된 자입니다.
 

2. 칭의 (稱義, Justification)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 

여기 ‘의롭다 하심’을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성경은 칭의와 입양이라는 두 가지 순간적인 역사를 믿음의 행사에 관련짓습니다(롬 8:12-16; 갈 3:26-4:7). 이것들은 둘 다 과정이라기보다 단일 사건들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의롭다고 선언됩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의로운 존재로 보심으로 하나님의 가족에 입양된 것을 선포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칭의도 입양도 수혜자 입장에서 자격의 합당함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합당함에 근거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칭의와 입양은 동반적 교리(companion doctrines)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우리의 정서적 치유를 위해 갖고 있는 함의(含意)는 개별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60번에 있는 칭의에 대한 서술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Q.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됩니까? 

A.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신앙에 의해서입니다. 나의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거스려 심하게 범죄했던 것들로, 또한 그것들 중의 어떤 것도 결코 지킨 일이 없었던 것으로 나를 고소한다고 해도, 그리고 내가 모든 악에 여전히 마음이 쏠리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데도 순전한 은혜로, 마치 내가 죄를 지은 적이 전혀 없었거나 죄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순종하셨던 것과 같이 온전하게 순종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와 의와 거룩을 주시고 그 공로를 내게 돌리십니다. 내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전부는 믿는 마음으로 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칭의에 관한 마틴 루터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루터는 자신의 영혼의 평안을 소유하기 위해 모든 것을 했으나 평안은 없었고 죄의식은 여전히 깊었습니다. 루터는 딱딱한 마루에서 잠자는 것과 금식 그리고 심지어 손과 무릎으로 바티칸의 계단을 오르기까지 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로마서를 펼쳤고, 그곳에서 그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읽었습니다(롬 1:16). 그리고 다음 구절(17절)에서 그는 갑자기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의는 흠 없는 완전한 의로서,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셨고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루터는 더 이상 자신의 선행으로 영혼에 있어서 평안의 기준을 찾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종교개혁이 탄생했습니다. 평강과 기쁨이 그에게 넘쳤습니다. 롬 1:17은 이제 그에게 낙원의 문이 되었고 성경을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칭하십니다. 그런데 이 칭의의 교리는 우리 마음속의 죄책감을 다루고 이 죄책감을 제거하는 일과 연계됩니다. 

죄책감은 그 사람에게 우울증을 일으키고, 자존감을 갉아먹음으로 정서적 건강을 해칠 수 있는 파괴적인 감정입니다.  

죄책감에는 참된 죄책감과 거짓된 죄책감이 있습니다. 후자는 사람의 비판과 비난의 결과로 나타나는 죄책감을 의미합니다. 뚜르니에(Tournier)에 의하면 거짓된 죄책감은 우리가 사회적 금기사항을 위반하거나 열등감을 겪거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 또는 자신에게 용납되지 않는 이유를 발견할 때 일어납니다. 

반면에 참된 죄책감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처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또는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을 때 참된 죄책감을 느낍니다. 심리학의 인본주의 운동이나 소위 ‘자아’ 운동은 어떠한 죄책감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대안이 없는데, 참된 죄책감을 해결하는 데는 특히 무능할 뿐입니다. 

부모나 자기 인생의 중요한 사람에 의해 거부되거나 망신을 당하게 되면 그 경험이 내면화되어 자기 거부(self-rejection; “나는 가치가 없다.”) 또는 자기 수치(self-shame; “나는 항상 실수한다.”)의 감정과 같은 심리적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 어디에도 심리적 죄책감이 바람직하거나 건설적인 감정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에 따르면 세상적인 근심은 죽음에 이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즉 경건한 슬픔(=신학적 죄책감)은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고후 7:10).

신학적 죄책감은 하나님의 법을 객관적으로 어기는 것에서 일어나는데, 이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했다는 느낌이 야기됩니다. 만약 우리가 신학적 죄책감에 적절하게 반응한다면 이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거에 마음속에 일어나는 죄책감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 오셨습니까? 

어떤 성도는 죄책감이 느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고 자신을 거부한다는 확신으로 투사합니다. 이것은 두려움과 공포감을 일으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그분의 용납과 인정을 보장해 줄 인생을 목표로 하여 노력하게 됩니다. 

또 어떤 성도는 죄책감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그 행동을 계속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구약의 사울과 같이 참된 믿음과 회개의 마음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성도는 죄책감이 자신의 자족감(self-sufficiency)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에 하나님과 거리를 두기 위해 모든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어떠한 깊은 관계도 회피하려 합니다.

위의 세 가지 중 어떤 것도 죄책감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절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죄책감의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즉각 그리고 분명하게 회개하도록 하고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을 화해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화해하는 데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죄책감은 잊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 덕분에 은혜로 의롭다 칭함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속에 죄책감이 일어날 때 우리는 잘못을 회개하고, 화해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 전반에 걸쳐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계속해서 경험할 것이지만, 그것이 자기혐오나 그밖의 파괴적인 감정으로 이끌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로 성취된 것을 영원히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3. 입양 (양자됨, Adoption) 

입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행위입니다. 양자됨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신분에 놓여져서 그 신분에 수반되는 모든 특권들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는 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양자됨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양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로서,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수효 중에 들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을 누릴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입양 교리의 성경적 근거는 많습니다. 

엡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롬 8:15-17=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여기 ‘양자의 영’은 신자들이 매일 매순간 인도함을 받는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그 영을 받았으며, 그 영을 통하여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동일한 성령님이 우리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우리 자신의 영들과 더불어 계속하여 증거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면 어떤 혜택들이 따라옵니까? 

양자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권세를 가집니다(히 4:16, 요일 5:14).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보호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마 6:25~34, 벧전 5:7).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땅에서 우리가 여전히 겪어야 하는 역경들은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훈육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쳐졌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켜집니다(고후 1:22, 엡 1:13).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의 입양을 통하여 우리의 갈급한 자아가 부르짖고 있는 소속에 대한 욕구는 채워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소속되도록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하십니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진정한 가족의 영원한 일원으로 그분께 속합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자존감을 되찾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통제력을 회복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자녀’ 관계 안에서 갈급한 자아의 모든 부족함은 충족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분과 서로에게 신비스럽고도 역동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연합시키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그분의 가족으로 친히 입양하십니다. 이 가족의 일원들은 새롭고 특별한 종류의 소속감을 경험합니다. 

신약성경은 의미심장하게도 교회를 하나님의 권속(household)이라고 부릅니다. 가족 체계를 암시하는 이 단어는 ‘오이코스’(oikos)라는 단어의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oikos'의 여섯 가지 파생어가 에베소서 2장 19~22절에 나옵니다. 이 구절의 강조점은 교회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이거나 지어진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엡 2:19~22=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paroikoi)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oikeioi)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epoikodomethenthes)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oikodome)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katoiketerion)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sunoikodomeisthe).”

여기 나타난 건물과 성전이라는 비유는 크리스천들의 영적 연합을 나타냅니다. 영원한 영적 가정의 이미지는 기독교 교리와 예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가족을 특징짓는 사랑은 혈연관계조차 초월합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가족의 연합에 대한 그분의 관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함께하는 삶의 핵심적인 요소가 사랑임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12-13=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신비로운 연합을 통하여 “내가 당신에게 속한다.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속한다” 라는 강력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맏형’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속감에 대한 인간의 깊은 욕구는 첫사람 아담의 이야기에서 이미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아무리 풍요롭게 축복을 받았지만 혼자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며 베풀 수 있어야만 합니다. 소속감이 없다면 크리스천들은 활기를 잃고 감정적인 문제를 형성하며 대체적으로 무능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성원인 성도들이 서로서로 자신의 삶과 인생 전반을 나누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의도는 인류 구원에 있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절대 순종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명--중생--회심--칭의--입양--성화--견인의 단계를 거쳐 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회심의 교리는 범죄함으로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을 부분적이나마 다시 실현하는 수준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칭의의 교리는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입양의 교리는 교회 공동체의 필요성을 환기시켜주며 소속감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줍니다.  

여러분은 변화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죄책감에 대해 적절히 반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늘의 입양을 통하여 하나님을 친밀하고 다정한 아버지로 부르는 새 관계를 부여받았습니까?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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