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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 (벧전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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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하나님의 능력 (벧전 1:1-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엿새 동안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최선을 다하여 에덴 동산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아담 즉 우리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웠습니다. 좋았습니다. 풍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이 그것을 누리고 즐기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세상 속에서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완벽하고도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그와 같은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핵심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그 특별한 관계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그 특별한 관계가 모든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같은 명령을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까닭은 단 하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유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 하나님과 우리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하여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네가 하나님이 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말고 깨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게 됩니다. 여기서 범죄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범죄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누리는 권세를 잃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을 형벌로 받게 되었습니다. 땅은 엉겅퀴가 자라나 끊임없이 땅과 세상에서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하였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세상은 추하고 불행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며 살던 세상은 ‘저 여자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상대방을 죽이려고 드는 살벌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명으로 충만하던 세상에 죽음의 고통과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탄의 계획과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관계는 쌍방적인 것입니다. 쌍방적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중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은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인간을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두실 수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마음 먹으셨습니다. 아니 마음먹으신 것도 아닙니다. 그게 처음부터의 하나님의 마음이셨습니다.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셔야 하셨던 일은 사람이 끊은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을 죄와 죽음으로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믿음과 구원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여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두 가지가 꼭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용서와 회개였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하는 일이 있어야만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용서와 회개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얼마큼 사랑하는가가 어디까지 용서하는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극단적인 사랑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것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용서 받지 못할 인간의 죄는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사탄도 송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정리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아멘.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 가져온 사망과 죽음과 실패의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죽음과 실패의 시스템만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과 회복의 시스템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스케이트를 타다가 넘어졌었습니다. 뒤에 오던 사람의 스케이트 날에 손이 찔려 찢어져 몇 바늘 꿰메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회복되었습니다. 흉터만 조금 남고 아무렇지도 않게 회복이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 축구를 하다가 상대방과 부딪혀 새끼 손가락이 부러졌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회복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질병에 걸려 고통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질병은 다 지나갔습니다. 잠시, 잠시 왔다가 때가 되면 다 지나가곤 하였습니다.
마음에 병이 든 때도 있었습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때도 있었습니다. 살고 싶지 않으리만큼 세상이 힘들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도 있었습니다. 깊은 절망감에 과연 다시 내가 좋은 세상에서 웃으며 살 수 있을까 회의가 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다 지나가고 회복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와 같은 현상을 보며 세월이 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연치유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세월과 자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다 회복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게 정말 자연 때문일까요? 자연히 되는 것일까요? 세월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회복이 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모든 회복은 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세상 속에 구원과 회복의 메카니즘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모든 약한 것과 아픈 것과 잘못된 것들이 다시 다 회복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회복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까닭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 약하고 아프고 힘들어 하는 것을 두고 보시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죽고 망하고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불행해 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하십니다.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에 우리 기독교의 최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생각할 때마다 십자가가 저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읽습니다. 제가 읽은 십자가의 메시지는 ‘난 너 죽고 망하는 꼴 못 봐. 무슨 수를 써더도, 어떤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너는 내가 꼭 구원하고 말꺼야. 살려내고 말꺼야.’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때문에 구원의 뜻과 의지를 가지셨다고해도 하나님이 만일 전능하시기 않으시다면 그 뜻과 의지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여 그런 뜻과 의지와 고집을 가지신 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살리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는데 어떻게 사망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실패와 좌절과 고통과 어두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참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정말 앞이 캄캄한 때가 있었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지고 없어졌을 때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도 함께 아파만 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십자가가 제게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그 십자가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믿어졌습니다. 제 마음 속에서 ‘내가 이런 일 때문에 죽고 망할 존재라면 우리 예수님 날 위해 십자가 지시지도 않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이 제게 힘이 되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1-2) 아멘.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과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앓이라.”(고전 15: 55-58) 아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3-5) 아멘.

믿음 없는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죽음과 절망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은 생명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모든 절망은 희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반박하실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점점 약해져가고 있고 늙어져가고 있고 결국은 죽게 되어 있지 않느냐? 세상과 사람은 생명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할는지 모릅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그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죽음까지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시작으로 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영원과 영생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 속에 소망이 있고,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3-5) 아멘.

우리나라는 세계 자살율 1위 국가입니다. 학생들도 자살하고, 연예인들도 자살하고, 재벌 총수도 자살하고 심지어 전직 대통령도 자살하는 나라입니다. 무슨 자살 공화국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우리나라가 그 어느 나라보다 스트레스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절망이란 ‘소망없음’입니다. 절망은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입니다.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정말 사람들은 소망이 없어서 절망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소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망이 있는 줄을 몰라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이면 소망이 보입니다.

구상이라고 하는 시인의 시 중에 ‘말씀의 실상’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시입니다.

영혼의 눈에 끼였던
무명의 백태가 벗어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에나 접한 듯
새삼 놀라웁고

창밖 울타리 한 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 꽃도
부활의 시범을 보는 듯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한 우주 허락의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상징도 아닌
실상으로 깨닫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에게 닥쳤던 모든 고난과 아픔과 상처와 절망은 언제나 늘 지나갔습니다. 모든 것들은 회복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이런 저런 힘든 일들이 파도가 밀려오듯 제게도 밀려옵니다.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힘들지 않습니다. 힘들지 않기 때문에 힘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나갈 것임을 알기 때문에 죽을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셨음을 믿기 때문에 삶의 자리가 어떠 함에도 불구하고 제 삶의 자리는 늘 소망입니다. 소망함으로 제 삶은 늘 생명입니다. 늘 푸른 생명입니다.

믿음이 능력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당연히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힘들 땐 힘들어야만 합니다. 아플 때 아파야만 합니다. 그러나 소망으로 기다리고 버티면 그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갑니다. 세월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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