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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위기의 순간에 만나야 할 하나님 (창 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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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위기의 순간에 만나야 할 하나님 (창세기 16:1-16)

 
< 들어가는 말씀 > 

1.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에 인생의 선배를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면 마음의 문제들이 많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에 언제든지 만나 주시고, 또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물어 주십니다. 

2.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가정은 큰 어려움이 닥쳐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언약을 맺은 지가 10년이 지나도록 깜깜 무소식입니다. 그동안 아브라함과 사래의 몸이 노쇠해서, 이제는 정상적으로는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초조해진 사래와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 자녀를 가질 계획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갈이 임신을 하게 되는데, 오히려 이것이 가정불화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갈은 임신한 후에 태도가 변해서 여주인을 멸시하고, 사래 또 이걸 못참고, 하갈을 학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하갈은 그만 집을 뛰쳐 나와서, 자신의 친정인 애굽으로 가려고 술 광야를 걸어가는데, 임신한 여인의 몸으로 그 광야 사막을 걸어간다는 것은,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죽겠다는 말입니다. 이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신 것입니다. 

3. 우리도 살다가,, 이런 위기의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다리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억울한 일을 당해서 속이 상해서 죽어버리고 싶고, 일이 꼬이고, 뒤죽박죽이 되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에, 우리를 찾아와 만나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의 위기를 만났을 때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 우리가 만나야 할 하나님은 > 

I. 먼저, 우리가 삶의 위기가운데 만나야 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질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1. 하나님은 질문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무위이 무위불"이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요, "道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와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으면서도, 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것 같은데,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때로 속삭이시기도 하고, 때로는 큰 소리로 외치시기도 하지만, 흔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그 질문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바른 길을 가도록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갈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 바로 질문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8절에,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이 하갈의 발걸음을 돌려 놓았습니다.


2. 창세기 말씀에는 이런 하나님의 질문이 여러 군데 나오는데, 특히, 우리 인간의 실존에 관해서 중요한 세가지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1) 첫번째 질문은, 창세기 3장 9절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이 두려워서 숨었을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신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 인간의 실존에 관한 최초의 물음입니다. 죄를 짓고 본연의 길에서 벗어난 아담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성도가 본연의 길에서 벗어나서, 죄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하나님께서 한국의 교회들에게 이 질문을 하신다고 믿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 오늘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다른 말로,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과연 교회는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2) 두번째 질문은, 창세기 4장 9절에 나오는,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이 하신,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동생을 사랑하고 돌보고 보호해야 할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생을 죽인 그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네 이웃이 어디 있느냐?" -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인 책임에 관한 하나님의 최초의 물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주시면서, "네 이웃이 누구냐"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하여 이 질문을 하신다고 믿습니다. - "네 이웃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수원서부교회를 세우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주셨는데,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항상,, "네 이웃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항상 물으실 것입니다. 

3) 그리고 세번째 질문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하갈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8절에,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보스톤 미술관 (Boston Museum of Fine Art)에 가면, 고갱이 그린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고 합니다. 고갱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그린 작품이라고 하는데요, 인간의 이성의 능력이 대단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 인간의 좌절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좌절과 절망중에 있는 하갈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에 하갈이 뭐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8절에서,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하갈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과거)에 대해서는 잘 대답을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 (미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답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하갈에게 주시는 것은, 전부 하갈의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을 하갈에게 그대로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의 약속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미래를 위해서,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9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기서 “복종하라”와 6절의 “학대받다”는 단어의 어근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이전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그 학대속에서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하갈은 다시 사래에게로 돌아갑니다.
 

3.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는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도 하갈처럼 과거의 관점으로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래 밑에서 당한 억울함과 분노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현재를,, 도망치는 삶으로 결정하고, 그래서 자신의 미래를,, 사막이라는 죽음의 곳에 내동댕이쳐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의 관점에서 오늘을 살도록 하십니다. 미래에 약속과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늘 내 가정이 지긋지긋하고, 내 직장이 정말 그만두고 싶고, 내 관계들이 진저리가 쳐지지만, 기꺼이 참고 견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방송 프로듀서이면서 작가인 박해선 씨가 쓴 <그리움에게 안부를 묻지 마라>는 책에서, "과거는 고체이고, 현재는 액체이고, 미래는 기체다. 어쩔래.. 고체 속에는 생명이 없다" 라고 했습니다.

과거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는 우리에게 백지수표입니다.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얼마든지 바꾸고, 얼마든지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관점에서 오늘 내 삶의 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어느 날 산에 올라갔다가 큰 돌을 보고는, “다윗이 여기 있구나”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나갔다고 했겠지만, 미켈란젤로는 그 산에 버려진 돌을 그냥 흔한 돌로 보지 않고, 그 돌에서 장차 자신이 조각할 <다윗상>을 미리 본 것입니다.

윤동주는 <서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 했는데, 별을 노래하던 사람들의 그 노래처럼,, 죽었던 한국이 이렇게 살아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뼈가 살아나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오늘 죽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나의 삶의 현실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가 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가 어디로 가느냐?' 하는 그 질문안에,, 답이 있고, 약속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 질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II. 두번째로, 우리가 삶의 위기가운데서 만나야 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오늘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많은 주석가들은,, 아브라함의 믿음 없음을 지적합니다. "아브라함의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얼마나 큰 짐을 주게 되었는가?" "아내의 죄에 동조했던 아브라함의 불신앙을 보여준다."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오늘날 아랍인의 조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중동문제 - 아랍의 회교도들과 서구 기독교간의 갈등 문제를 모두, 아브라함의 실수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때 하갈과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중동문제가 아브라함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군 전쟁과 같은, 후대 사람들의 탐욕이 빚어낸 비극이지, 그게 왜 아브라함의 책임입니까? 

어쨌든, 본문의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없음"이 주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고, 거기서 문제를 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주제입니다. 비록 아브라함 가정의 위기가 가장으로서의 리더쉽이 부족하고, 믿음이 부족해서 그랬다 할지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고, 우리의 실수와 실패까지도,, 전화위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과 사랑은, 여종인 하갈에게도 동일하게 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갈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첫번째 사람인데요,  하나님은 하갈에게 미래에 큰 복을 약속하시고는, 9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지긋지긋하던, 학대 받던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정의 문제에 손 하나 대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고통의 문제가 다 해결되고 말았습니다. 하갈은 집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사래의 수하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3. 하갈은 하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처한 현재의 불행한 상황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하갈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고통 당할 때에,, 내가 아파서 그렇게 힘들어 할 때에, 내가 외로워서 몸부림칠 때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 있었다. 내가 너의 아픔을 보았고, 내가 너의 아픔을 알고, 내가 너의 신음하는 고통을 들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때 하갈은, 하나님이 나의 모든 아픔을 알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내가 당한 모든 억울한 일을 보고 계셨구나, 내가 고통당하고 억울할 때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에서 한 여인을 만나는데, 그 여인도 하갈처럼 고통당하던 여인입니다. 그 수가성의 여인도 주님을 만난 후에, 그녀의 아픔과 수치심과 상처가 다 회복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갈도,, 그 하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현재의 삶을 이해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갈은, 하나님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났던 그 우물의 이름을 "브헬라헤로이"라고 짓는데, “하나님이 보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필요를 보시고, 공급하시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하갈은 자신이 낳은 아들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짓습니다. "하나님이 듣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필요와 곤고를 들으셨다”는 고백입니다.
 

4.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아픔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이 시간 오셔서,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고 물으실 때에, 여러분은 무슨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내어 놓으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아픔을 주는 사래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원망스러운 아브라함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당한 그 삶의 문제들은, 우리가 도망치고 부정하고, 분노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갈처럼, 수가성의 여인처럼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삶의 고난가운데서,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우리가 학대 받을 때에, 우리를 보고 계셨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픔이 축복이 되고, 고통의 자리가 예배의 자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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