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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생활의 챔피언이 되려면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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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챔피언이 되려면 (히 12:1-3)


요즘 우리의 일상의 삶을 균형을 흩뜨리는 것이 두 가지인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상 기온인 열대아 현상입니다. 숨이 막할 정도로 더운 바람이 부는데 뭐,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아오면서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이 더위는 앞으로 우리의 생활 습관과 성격마져 바꾸어 놓을 것 같습니다. 정말 덥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런던 올림픽 경기입니다. 올림픽이 열리는 영국은 우리와의 시차가 8시간이 되기 때문에 지금 11시 30분이면 영국은 새벽 3시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생중계를 보려면 밤을 새워야 하기 때문에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낮과 밤이 다른 생활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릴 때만해도 금메달 하나를 따는 게 왜 그렇게 힘이 들었습니까? 우리 선수 가운데 금메달 하나만 따도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옛날에 비교하면 참으로 隔世之感이 듭니다. 왜 이렇게 올림픽이 온 세계를 열광케 합니까? 이것은 국가 간 스포츠 경기는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런던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의 승리와 땀, 눈물을 보면서 우리 모두 가슴 뭉클한 체험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경기를 보면서 때로 우리의 콧등이 찡한 것은 그들의 빛나는 메달 뒤에 피나는 땀과 눈물이 담겨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시련을 딛고 선 선수들의 후일담은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줍니다. 한 수영 선수는 8년 전 출발선상에서 실격당한 뒤 통한의 눈물을 보였는데 이번에 또 출발 선상에 실격을 당할 때, 얼마나 심적인 부담이 컸겠습니까? 다행히 판정의 오류를 받아들여 경기에 출전을 해서 엄청난 심리적 부담을 떨쳐 버리고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루어 값진 메달을 거머쥐는 모습은 우리 민족을 다시한번 하나로 묶는데 손색이 없었습니다. 특히 만년 2인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신에게 기회가 올 것을 묵묵히 기다리며 33세라는 운동선수로서는 환갑이나 다름없는 그 자리에서 메달을 거머질 때 우리는 또 한번 눈시울을 ?셔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챔피언이 되겠다는 것은 운동선수만의 꿈이 아닙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의 챔피언이 되고 싶어 목숨까지 내어놓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히브리서 12장은 신앙 챔피언들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가자"(12:1) 여기 허다한 증인들은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많은 신앙 선배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당당히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증인이니까 그들을 모델 삼아 신앙생활을 잘 하라 이겁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절에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합니다. 그냥 사는 것도 힘들지만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너무나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길에서 실패합니다. 넘어질 때도 많습니다. 낙심할 때도 많습니다. 이 믿음의 길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돈도 아니요, 사람도 아니요, 명예도 권세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여러 가지로 비유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은 마라톤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라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달려야 합니다. 한순간만 잘해서 반짝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지점이 있어서 그 곳에 이르기까지는 경주를 쉴 수가 없습니다. 중단 할 수가 없습니다. 멈추어 설 수가 없습니다. 경주 과정에는 가파른 언덕길도 나오고 때로는 멀리 볼 수 없는 굽어진 길도 나올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출발한 사람이 여기저기 탈락하여 쓰러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와 함께 출발했던 사람이 나보다 앞서 가게 되면 열등감에 휩싸여 의욕을 잃기도 합니다. 

또 인생의 경주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을 어기면 어김없이 탈락하게 됩니다. 규칙 안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던 통과해야만 되는 길이 있고 거쳐야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을 잃어버리면 목표지점까지 갈 수도 없지만, 중간에 포기하면 지금까지 달려 온 모든 것이 허사가 됩니다. 장거리를 뛰는 사람들은 체력의 안배를 통해서 끝까지 잘 뛰는 것이 중요합니다. 뛰는 동안 내내 자기 자신과 싸워야만 하는 고독의 질주, 이것이 마라톤입니다. 

우리 믿음의 인생길이 바로 이와 같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그냥 걷기도 �暳永�믿음을 가지고 걷기란 정말 쉬운 일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권면합니다.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이 말을 원어로 해석한다면, ‘믿음의 창시자이며 그 믿음을 이끄시고 완성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의 경주를 본인이 직접 시작하셨습니다. 

본인이 그 경주를 다 뛰셨습니다. 본인이 완수하고 완성하셨습니다. 승리하셨고 이 모든 일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나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십자가에서 다 사하여 주심으로 믿음의 경주로 초청해 주셨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오늘도 걸어갑니다.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칠 것을 확신하며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바라봅니까? 나 자신을 바라보지 않습니까? 우리의 환경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낙심과 실망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규칙을 잘 지키셨습니다. 

그 규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앞에 주어진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됩니다. 기쁨이 되고 오늘 내가 믿음의 길을 걸어야 되는 이유가 됩니다. 지치고 힘들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에게 오늘 3절 말씀은 권면합니다. 생각해 보라고. ‘생각해 보라’는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날로기조마히’ 라는 단어는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셨던 믿음의 여정과 오늘 나의 여정을 비교해 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아버지 없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비천하다 할지라도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부모에게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는 생명의 위협을 받아 도망 다녀야만 했습니다. 고향에 살지도 못했습니다.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자매를 부양해야만 했습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한 이름 없는 도시에서 태어나 같은 지역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집도 없었을 뿐더러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위에는 언제나 고통당하고 귀신들린 사람들, 아픈 사람들로 가득 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취급 받기도 했습니다. 정신 이상자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가족들로부터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결국 배신을 당했고 가장 고독한 순간, 십자가에서 고통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결국 그는 죽임 당했습니다.믿음으로 살기가 너무나 힘들고 때로는 지치고 어려워 포기하고 싶을 때, 이런 주님의 인생여정과 비교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다하신 주님, 인생의 고비마다 우리보다 앞서 가셔서 아픔과 고통을 체험하신 그 주님과 오늘 나를 비교해 본다면 이 경기를 포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시금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둘째로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경주에 장애가 되는 것을 벗어 버려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1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경주하는 인생여정에서 경기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환경입니까? 우리의 실패입니까? 고난입니까? 질병입니까?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흔히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고난이, 이 어려움이 믿음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어렵게 만든단 말이야. 이것만 아니면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을 텐데.’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은 믿음의 여정을 조금 힘들게 할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더 붙들게 만듭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가진 믿음을 다시 돌아봅니다. 고난으로 흐트러졌던 신앙생활을 다시 묶습니다. 내 삶 속에 정리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내어버리는 용기를 갖게 만듭니다. 순종하지 못했던 내 자신을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바라보게 만들면서 믿음의 경주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고난입니다. 늘 태양만 비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땅은 곧 사막으로 변할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은 우리로 자라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경주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해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거운 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과도하게 무거운 것이나 거대한 짐을 말합니다. 운동선수는 가능한 한 무게를 줄이기 위해 러닝과 팬티까지도 가볍게 만듭니다. 짐을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과 사귀고, 하나님 음성을 듣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그리고 찬양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우리 육신은 즐거워할지도 모르지만- 즉, 믿음 생활 하는 데에 무거운 짐이 되어 이로 인해 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여기 또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말씀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란 무엇입니까? 경주자를 따라다닙니다. 그의 마음을 분산시킵니다. 에워싸고 넘어지게 만드는 죄를 말합니다. 죄는 경주자가 달릴 때 펄럭거리는 옷을 상징합니다. 펄럭거리는 옷을 입고 뛰다가 옷이 몸에 휘감겨 넘어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죄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없다면 죄 지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우리를 얽어맵니다. 

자유 없는 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번 걸리면 우리를 절대 놓지 않습니다. 끊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셋째,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질 상급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바라보아야만 됩니다. 왜냐하면 이 경주는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승점에 도달할 때까지 인내함이 없이는 완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앞에 주어진 그 소망, 우리에게 주어진 그 상급을 바라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힘들고 지쳐 중�洑怒層�모릅니다. 

본문 2절 말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말씀합니다. 인내란 ‘휘포모네’로 참을성, 일관됨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내가 걸어가는 걸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지를 알지 못하면 인내를 못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그 고난과 고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끝까지 참으신 이유는 바로 고난과 고초를 통해서 죄인들이 놓임 받고 자유하며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인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소망 없이는 인내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즐거움입니까? 어떤 상급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장차 그를 부활시키셔서 보좌 우편에 앉히실 상급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사람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그 소망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응원부대가 있어야 인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경주가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또 하나의 장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두운 시대를 살았지만 믿음으로 승리하며 결국은 승리의 월계관을 썼던 믿음의 영웅들, 그들이 이미 경주장을 떠나 스탠드에 서서 오늘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들을 격려하며 응원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는 그동안 이미 살폈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보다 앞선 선배들의 신앙의 그 걸음은 값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앞서 인도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홍해 바다로 가시든, 골리앗 앞으로 가시든, 사자 굴로 가시든, 풍랑 위로 가시든, 골고다로 가시든 그 환경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 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경주에서 실족합니까? 예수님 대신에 세상의 욕망이나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불의 전차>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작품입니다. 에릭 리들은 영국대표로서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경기의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100m 경기 일정이 발표되었는데, 첫 예선 일자가 주일날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정을 보자마자 “저는 주일에는 안 뜁니다.”라고 단호한 결정을 알렸습니다. 

그의 그런 결정은 그의 주일을 지키기 위한 자기희생적 결정이었고 주일은 주님의 날이므로 주님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그의 신앙의 고백이며 표현이었습니다. 이 출전포기를 들은 영국전체의 반응은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를 가리켜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신앙을 소매 끝에 달고 다니는 신앙심 깊은 척하는 위선자”, “조국의 명예를 버린 위선자”라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릭 리들은 그러한 냉소적인 비난에 전혀 굴하지 않고 100m 예선 경기를 하던 7월6일 주일에는 한 교회에서 간증설교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에릭 리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에릭 리들은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닌 200m에서 동메달을 땄고, 400m에도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400m에서는 다른 선수들의 들러리였습니다. 드디어 결승전이 왔습니다. 그가 트랙에 들어설 때 그를 차료하던 안마사가 쪽지 한 장을 주었습니다. 거기엔 이런 글 하나가 실려 있었습니다. 『구약에 이런 글이 있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히 여기리라.” 최선의 영광이 있기를 빌면서』 

에릭 리들은 신들린 사람처럼 무서운 속도로 첫 코너를 돌았습니다. 경기를 지켜보던 전문가들은 “에릭이 저런 속도를 유지하다가는 도중에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며 불안감을 표현하였습니다. 에릭 리들은 우승후보들을 제치고 47초6 이라는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400m 우승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처음 200m는 제힘으로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파리 올림픽 400m 계주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고 챔피언이 되어서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던 스코틀랜드의 ‘엘릭 리들’은 영웅이었습니다. 조국의 영웅이었고 올림픽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이 끝나 그가 고국에 돌아왔을 때 이상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인 그에게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받은 메달보다 더 위대한 메달이 있다. 더 위대한 영광이 있다. 너는 복음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느니라.” 그는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중국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복음을 들고 중국으로 떠납니다. 친구들과 친척들은 그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보장된 출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그의 앞에 놓여진 안정된 삶, 이 화려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떠나는 그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섬기고 도와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일본 사람들이 그를 스파이로 몰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파했고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감싸 안고 말씀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감옥 안에 신앙의 공동체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불행히도 에릭 리들은 일본이 패망한 것을 보지 못하고 42세의 젊은 나이로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숨질 때 그의 얼굴은 빛이 났고, 그는 찬양과 경배 속에서 자기의 인생을 마무리했습니다. 에릭에게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감옥 옆에 있는 자그마한 동산에 그를 묻었습니다. 그들은 이 무덤 위에 초라한 비문을 하나 새겼습니다. 그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웅 에릭 리들 여기에 잠들다.” 하나님의 영웅! 그에게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붙여 주었던 이 명칭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숨이 멈추고 심장의 박동이 멈추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내 인생이 끝나는 그 순간에 땅에서 잠시 누렸던 쾌락이나 잠시 쥐었던 직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순간 내 인생은 얼마나 보람과 가치와 의미가 있던 삶일까요? 내 인생은 마지막에 어떻게 결산 될까요? 마지막 순간에 돌아보는 나의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헛된 것을 붙잡고 산다면 그것만큼 허망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푯대가 아닌, 잠시 있다 사라지는 푯대가 아닌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푯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 푯대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신앙의 푯대입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함과 사랑을 배워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인생의 모든 푯대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췄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목숨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자기에 주어진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려온 신앙의 선배들은 앞으로 자신들에게 주실 하늘의 영원한 썩지 아니할 영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오늘 힘들고, 어려워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어도 내 인생을 한번도 실패자라 말씀하신 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능력 앞에 다시 한번 믿음의 끈을 동여 메고 달려나가는 삶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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