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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이단종교와의 싸움 7 고향에서 새로운 삶을 위하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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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종교와 싸움 7
병원에 생활은 변함이 없이 하루 하루가 힘이 드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나의 팔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사 바늘로 인하여
팔의 이동도 편안하지 못하였으며
늦은 밤까지 팔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입원을 하고 3개월이 지나면서
나는 조금씩 앉아 있을 수 있었으며
나 혼자 휠체어도 조금씩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휠체어를 타는 날 나는 힘이 없어 실신을 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힘이 없어 실신을 할 만큼 나에게
인간이라고 하기에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이 있었습니다
삼 개월 가까이 금식을 하면서
나의 육신은 약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건강하던 나의 육체는 다 없어지고
뼈에 가죽만 붙어 있는 것 같았으며
온 몸에는 핏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노랗게 물든 모습이었습니다
수술을 받고 조금 안정을 찾으면서 살고 있었는데
아내가 서울에 있을 때 다녔다는 교회의 사람들이 문병을 오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그분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육성기도를 할까요?
방언기도를 할까요!
나는 이상하다 기도를 정하고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생전에 어머님께서 익산의 순복음 중앙교회를
개척을 할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구 년 동안 열심히 교회를 섬기시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는데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방언기도를 정하고 기도를 하는데 나의 마음속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 속으로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며칠 후 그 분들이 또 다시 왔습니다
나는 그 예배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마음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분들이 예배를 드리고 간 다음
나는 아내에게 예배가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니
다음에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을 하니
아내는 병원에
나를 혼자 남겨주고 화를 내며 익산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딸아이를 키워줄 사람이 없었기에 회사에 다니는
처제에게 월급을 우리가 줄 터이니
우리 아이를 키워달라고 부탁하여 처제가
익산의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만난 장애우는
아내와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회복을 하기 쉽지 않으니까
집에 내려가서 데리고 올라 오라 하였습니다
나와 같은 장애우들이 운전을 하는 자동차를 얻어 타고
병원에서 입원을 한 후
처음으로 외출증을 끊어 익산의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병원에서 만남이 있었던
장애우는 나를 익산에 내려주고
군산에서 일을 보고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을 때 살았던
집에 처음으로 내려와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처남과 아내의 앞에서
아픔이 있었던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 밤에 처남과 나는 긴 시간 동안 술을 넘치도록 마셨습니다
취하도록 마셨습니다
내가 살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내가 미웠습니다
아내의 마음을 달래어
다시 서울 병원으로 올라가기는 하였지만
우리들의 영적인 전쟁은 시작이 되고 있었습니다
길고 긴 병원 생활이 따분하여 환자들끼리
눈이 오는 겨울에 팔에 힘을 키워야 한다며
병원에서 경비들 몰래 빠져나와 북쪽에서 남쪽 끝까지 한남대교를
휠체어를 타고 건너기도 여러 차례 하였습니다
한남동의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고급 주택가 골목을 휠체어를 타고서
밤 시간에 다니기도 하였으며
포장마차에 가서 국수도 먹고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힘들게 병원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처제가 우리 소현이를
익산의 집에서 키우고 있었는데 시집을 가게 되었다고
더 이상 아이를 보아줄 수 없다고 하기에 돌이 지난 아이를
서울 병원으로 데리고 와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아이와 같이 병원에서 지내니 힘든 일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아이가 울면 같은 방에 있는
환자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니
울지 못하게 하여야 했으며 밥을 해서 먹는 문제로 인하여
불편한 것이 너무도 많았기에 하루 하루가
전쟁 아닌 전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회사와의 보상 문제를 빨리 해결을 하고
병원 문을 나서고 싶었습니다
법원에 보상 문제로 인하여 소송을 시작하였으나 재판을 하는 기간이
보통 일년 육 개월 이상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소송이 시작되면 병원에서 퇴원을 하여야 했기에 소송을 취소하고
회사와 보상문제를 합의를 이루게 되었으며
일 년 육 개월 병원의 삶을 접고
내가 이십 년을 넘게 살았던
고향 전북 익산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예비 장애인에서 일급 장애인의 몸이 되어 이 땅에 살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몸은 없어지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여 살아야 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수정 2002년 12월 14일 이 충 묵




{고향에서 새로운 삶을 위하여} 8

건강함을 가지고 있을 때 82년 가을에 리비아에서 귀국을 하고
삼 개월 정도 다녔던
동산교회의 전계현 목사님을 만나
그동안의 삶의 이야기를 드리고 교회에 다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교회 안에 계단이 몇 개 있었는데 다 제거를 하여주시고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경사로도 만들어주셨습니다
고맙고 감사하였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살아가는 몸이 되었기에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교회를 다닐 수 있었는데 아내는
주일에 나를 교회에 데려다 주고
예배가 끝이 나면 돌아오는 아내 예배가 끝나도
나의 곁에 오지 않을 때에는
참으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교회의 제일 뒤에 나는 앉아 있었기에 예배가 끝이 나면
빨리 비켜주어야 하였는데
나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와서 길을 가다가 아는 분들을 만나면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고 싶었습니다
휠체어를 타면서 앞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을 하니 앞 길이 막막하였습니다
자전거를 유난히 좋아하였던 나는 많은 곳을 빨리 다닐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모습을
꿈속에서나 그림으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나는 다른 길을 찾아야만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만남이 있었던 장애인들이 운전을 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나도 할 수 있겠지 하면서 서울의 병원에서 만남이 있었던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나의 집 앞에 프레스토 자동차가 도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으로 운전을 할 수 있게 개조된 오토매틱 자동차
나는 운전면허도 없고 운전을 해본 적도 없었기에
자동차 회사에서 나온
사용설명서를 보면서 운전을 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무리한 일을 겁도 없이 하였구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좁은 골목길에 자동차를 놓이게 되었습니다
자동차를 구입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친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친구는 다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골목길에 놓여진 자동차를 움직여 큰길로 움직이기 위하여
나는 사용설명서를 보면서
운전을 조금씩 하면서 진땀을 흘리게 되었으며
20m를 움직이는데 두 시간이 넘어 그 작은 거리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나면 도로에서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애인들이 자동차 면허를 따기 위하여 신체측정을 하여야 하는데 그곳이
지방에서는 없고 서울에 있었습니다
이십 일쯤 도로에서 연습을 하여 무면허로
서울에 운전을 하면서 올라갔습니다
고속도로를 처음으로 달리는
무면허의 운전기사인 나는 겁도 없었습니다
면허가 있는 운전기사와 같이 서울에 같이 올라가는
생각은 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시속 100km를 달리면 자동차가 마구 흔들리는 것 같아서
속도를 줄이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달리는 고속도로를 무사히 빠져나와서
서울 강남에 있는
면허시험장에 도착을 하여 사무실에 들어가
신체 측정을 받으러 왔다고 하니 누가 운전을 하고 왔느냐고 묻기에
익산에서 내가 운전을 하고 왔다 하니 그냥 내려가라고 하였습니다
서류를 다 준비를 하여 내려보내겠으니
전주에서 면허시험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익산에서 혼자 운전을 하고 서울까지 왔으니
신체측정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면허 시험을 보려고 하여
익산 시내에 있는 운전 학원에 가서 돈을 줄 테니
코스 연습을 해보고 싶다 하여도 한 군데도
나에게 도움을 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내 자동차로 운전을 하고 기름도 내가 넣겠다고 하는데
자가용차가 연습장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만 하는 것 아니겠어요
나는 할 수 없이 도로에 사람들이 코스 그림을 그려 놓고
연습을 하는 곳에서 연습을 하였습니다.
전주에 있는 운전면허 시험장에 가서
오전에 필기시험에 합격을 하고
오후에 실기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코스에 시험을 보는 순간 삐삐 소리는 들리고 나보고 나오라고
확성기로 소리를 지르는 소리를 듣고도
나는 못들은 체 그 곳에서 코스를 빠져나오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어차피 떨어졌으니
다음에라도 잘해보려고 하였기에 그랬습니다
경찰이 옆에 와서 부를 때에야 모르는 체 하고 나오게 되었지요
시험장 안에 있는 장거리 코스로 가서 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애인들이 운전을 할 수 있는 자동차가 시험장에는 없었기에
나의 자동차로 시험을 보기에 감독관인
경찰이 나의 옆에 동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잠시 달리는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감독관님께서 돌발이라고 하는데 왜 그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긴장을 하고 운전을 하느라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다고 하였습니다
돌발지점에 가서 정지를 하여야 하는데  
나는 그 것도 모르고 면허 시험을 보러 왔으니 나도 한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시험을 보고 내려오니
나의 옆자리에 앉아서 운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신
경찰 아저씨께서
또 다시 와서 시험을 보아야 하는데
이 무더운 여름에 아이도 아이의 엄마도 힘이 들고
면허도 없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니까
위험하다고 하시면서 합격을 시켜 줄 테니
조심하여 운전을 하고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 날 하루에 면허증을 받게 되었습니다
87년부터 운전을 하게 되었으며 프레스토 8년 에스페로 8년째 큰 사고 없이
지금까지 잘 다니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다 낡아 가는데 또 탈 수 있을 지 가진 것이 별로 없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시겠지요
오늘 이 하루도 행복한 삶을 가꾸어 가시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수정 2002년 12월 14일 이 충 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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