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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의 때가 아직 (요 7: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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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때가 아직 (요 7:25-36)


오늘 우리 사회는 물질적인 혜택을 받을수록 이상스럽게 사회악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힘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는 이들이 많아지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막 한복판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 밑에선 샘물이 솟았고 그 샘물은 사막에서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주인에게 돈을 주고 샘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샘터를 돌아보던 주인은 커다란 나무가 물을 흠뻑 머금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밤새 내린 이슬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주인은 나무가 머금은 물까지 탐이 나서 나무를 잘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무가 머금고 있던 물이 샘물에 고이면 그만큼 장사가 더 잘되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샘물은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햇볕을 가려주고 모래 바람을 막아주던 나무가 사라진 샘에서 물이 솟아날 까닭이 없었습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은 나무를 베어버린 그 욕심꾸러기 주인과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빼앗기고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된 것처럼, 될 수 있으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고독과 불안과 절망입니다. 
한 청년과 목사님이 전철을 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심심해진 청년은 말을 꺼냈습니다.
“목사님, 평온하던 전철 안이 갑자기 소란해지거나 사람들이 갑자기 몰리면서 밀칠 때에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바로 소매치기들의 장난일 경우가 많거든요.”
얼마 후 청년이 전철에서 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전철표도 지갑도 몽땅 털린 뒤였습니다.
이야기하던 바로 그 순간 이야기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을 읽을 눈이 없으니 알면 뭐하고, 말한들 뭐하겠습니까? 
성경 배우고 좋은 소리 입에 담은들 무엇 하겠습니까?
깨어서 제 삶을 읽고 제 길을 찾아가지 못한다면 이와 같지 아니할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아십니까?” “아신다면 얼마나 아십니까?” 어찌 보면 좀 황당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아, 내가 예수 믿은 지가 얼만데 새삼스럽게 예수님을 아느냐고? 목사님이 날 완전히 무시하는 것 아냐?’ 아마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내가 과연 믿음의 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몇 년인데 아직도 왜 그렇게 살고 있느냐?’고 한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내 생활이 뭐 어때서?’라고 반문하실 분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아! 내가 정말 잘 믿고 잘 살아야겠다. 내가 정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하는 생각을 하는 분이 계시다면 바로 그 분이야말로 지금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마귀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죄를 짓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기도가 이루어집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복을 받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전도도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알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알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체험해야 안다고 할 수 있고 그 사람이 변화되어 새 사람으로 거듭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사람의 삶의 모습을 보고 ‘아! 저 집사님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구나. 아! 저 권사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아, 저 장로님은 예수님의 제자로구나.’ 하고 말합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호 6:3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더 나아가서 호 6:6에서 아주 노골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 보다 더 중요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예물을 바치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모르고서는 예배를 드려도 헛것이요, 예물을 바쳐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아서 바로 믿고 잘 사는 성도가 반드시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유대인의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에 유대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시니 질투가 나서 괜히 시비를 벌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공연히 이것저것 트집을 잡습니다. 당치도 않은 트집을 잡다가 그게 여의치 않으니까 이젠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의 반발이 무서워 예수님에게 감히 손을 못 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 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줄 알았는가?” 

유대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참으로 그리스도인줄 알았더라면 괜히 트집 잡고 비판하고 시비를 걸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니까 비판하고 트집 잡고 시비 걸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한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병입니다. 무지가 죄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알려고도 안 했습니다. 그래도 예루살렘 사람 중에 예수님을 조금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무식한 지도자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그러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직접 가르치시며 외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하나님에게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하는 출생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몸은 육신의 부모로부터 왔으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어떻게 내 부모가 나를 만들었고 어떻게 하나님이 그 순간을 포착하여 내 영혼을 넣어주셨는지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내 육신의 부모님 사이에 절묘한 만남이 없었더라면 지금 나는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예루살렘에 지금 세 번째 성전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분봉왕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랜 시간에 걸쳐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섬기는 대제사장들과 더불어서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이 교권을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을 바로 섬긴다고 하는 명분 아래 사실은 믿음 없는 모습이 너무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하셨던 모든 일 그리고 모든 말씀을 통해 예수가 어떤 분인지 그들은 분명히 알고도 남습니다. 한데도 오히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고 몰아붙여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그래서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사람들로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국자들이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이 드러나게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치십니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 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그래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모의하고 벼르고 있는 그 사람 곧 예수가 아니냐? 그런데 어찌하여 그가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게 말하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가?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유대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당국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들이 권세를 잡고 다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였지만 손을 대는 자가 아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그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 3:24에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하신 것은 요한이 반드시 옥에 갇히겠으나 이직은 그의 때가 남아 있기 때문에 감히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때를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살고 죽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조급해 하지도 않습니다. 참 믿음의 사람은 오래 참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동동거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때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직접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움 받은 직분자임을 기억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를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이 쓰신다고 할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좋은 뜻을 위해 쓰임 받아야지 안 좋은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를 바랍니다. 

사실 당국자들도 다 좋은 일에 쓰기 위해 준비된 사람들이요 또 성전의 직분자로서 백성의 지도자로 세움 받았는데 어째서 저들이 거꾸로 하나님의 일의 대적자가 되고 말았습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데도 일하려고 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예’ 하고 ‘아멘’ 하는 것이 온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반응해야 하는데 나는 내 생각을 내세웁니다. 때를 정하는 것도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때를 자꾸 이야기합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라든지 “벌써 되었어야 되는데 어째서 아직도 입니까?” 합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입니다. 아이가 생각하는 것과 어른이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자녀들의 생각이 옳을 때도 있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이는 부모입니다. 하지만 사실 육신의 부모는 그 때를 바로 알지 못할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하심에는 빈틈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스케줄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연단을 받고 훈련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들다고 합니다. 왜 그래야만 하냐고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복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은혜와 능력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여 주시고 믿게 하여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믿을 수가 있는 것이지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깨닫게 해주시고 믿음을 은사로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지혜로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사실 이 사람들이 당국자들을 비난하고 있지만 정작 자기들은 어떠냐 하면 자기들 역시 믿음 안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가 자기처럼 잘 믿는 사람은 없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메시야는 나사렛에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다나엘도 했던 말이 아닙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그래서 헛똑똑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알지 못하니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국은 겉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땅의 일만 보았지 하늘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깨닫게 하심이 아니고서는 어찌 깨달을 수가 있겠고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볼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는 안다”고 하는 그들은 당국자들이 만일에 믿으라고 해도 믿지 아니하겠다고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깨달음이 없이는 아무리 보고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경험적인 신앙이 중요합니다. 왜 고난이 우리에게 있느냐 하면 직접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고 두 손을 다 드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연단을 기뻐해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아프기 전에는 건강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제대로 깨닫지를 못합니다. 아파봐야 건강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소 잃고 나야 외양간을 고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요엘서에 분명이 이르기를 메시야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고 하는 그 당시의 풍설을 그들은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당시에 사람들 가운데서 아마 이럴 것이다 하고 하는 소문을 신뢰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여기 있습니다.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하고 마치 설익은 밥을 먹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해서 엉뚱한 데로 빠져 들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바로 알지 못해서 교회를 비난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뒤늦게 그것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이 얼마나 통곡을 하게 될까요? 이 땅에 있을 때 깨닫게 된다면 그래도 다행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아 이 땅에서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그들은 울며 통곡할 것입니다. 

사실이지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여자의 몸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이 오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단순히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마리아가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능력으로 저를 덮어 잉태하기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말씀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 받은 그 자녀들의 한 생명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하여 외치고 계십니다. 이렇듯 큰 소리로 외치는 주님의 목소리는 오늘도 주님의 사자들의 입을 통해 성전에서 전파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행 10:38은 말씀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나타내시는 모든 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신지 바로 깨달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고 하심에도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더하여 주시어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우쳐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손을 대어 예수를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참 이상한 것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못 잡아먹어 안달을 합니다.  

하지만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아 누구도 손을 대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거든 다윗처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저가 나에게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내 귀에 들려주시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나를 깨우치사 이를 들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럴 때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우리들을 세워 나가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수라고 하는 가장 밑바닥의 직업을 가지고 노동을 하면서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웃을 섬기며 사셨고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시며 사셨고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병을 고쳐주시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삶은 표적이 많이 나타나는 사랑과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선한 일과 표적과 기사를 많이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으로 봐서 누구든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도록 사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와 여러분을 보고 ‘아, 하나님의 자녀답다! 예수 믿는 자답다!’고 칭찬하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러지 못한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분명히 깨달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다시 예수님이 이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늘나라로 가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시면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알고 믿는 성도에게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약속입니다. 여기에 영원히 잘 사는 비법이 있습니다. 말씀을 배워야 삽니다. 말씀을 바로 배워서 예수님을 알아야 삽니다. 말씀을 잘 배워야 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바로 알고 예수님을 바로 믿어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은혜로 채우시고 이끌어 주시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고 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많은 표적과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고 직접 오병이어의 떡과 물고기를 먹었으며 그들 가운데는 불치의 병에서 놓임을 받고 귀신들렸다가 자유함을 얻기도 하였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본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수군거리고 있다는 것은 저들이 믿지 못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많은 증거가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나타내고 예수님 자신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메시야 되심을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오히려 믿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잡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의 몸에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면 우리를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음을 믿으십시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있는 어려움은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체험적 신앙을 가지고 힘 있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배우지 않고서야 어찌 알 수가 있겠습니까? 훈련하지 않고서야 어찌 기술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 울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힘이 듭니까?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습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따르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먼저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의 길을 가신 주님을 기억하시면서 오늘의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것을 다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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