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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들으라 (사 4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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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들으라 (사 48:12-16)        

오래 전 어느 날 하늘나라 작전사령부에 모임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달하셨기 때문입니다. 작전 내용은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작전 책임자로 모세를 임명하셨습니다.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벗어났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하늘나라에 또 다시 작전 모임이 열렸습니다. 이번 작전의 내용은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가 고생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작전을 위해 고레스라는 인물을 발탁하셔서 페르시아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작전 역시 완벽하게 성공하였습니다. 오늘 말씀 14절은 이 사실을 암시합니다.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고레스 왕을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 즉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를 세워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로의 상태에서 해방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고레스에게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를 인도하셔서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고레스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은 순조로웠습니다. 주전 559년에 고레스는 <메데 제국>의 속국인 <안샨, Anshan>을 상속 받았고, 이게 페르시아의 시작입니다. 고고학자들은 1973년에 오늘날 이란 <파르스 주>의 주도인 <시라즈> 북서쪽의 <탈 이 말얀, Tall-i Malyan>이 고대의 안샨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후 고레스는 메데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메데의 장군 <하르파구스>가 고레스에게 항복함으로 말미암아 쉽게 왕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후 바벨론의 장군 <구바루>도 고레스에게 투항함으로써 그는 페르시아라는 대제국의 기초를 놓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고레스는 조서를 내려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주전 538년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고, 이들은 성전을 재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작전의 명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 계셨습니다. 

사실 우주만물 자체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설계대로, 하나님의 배치대로, 하나님의 의도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본문 12-13절을 읽어봅시다.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창조만이 아닙니다. 그 후 모든 역사적 사건의 한복판에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일, 그 심판에서 노아의 가족을 건지신 일, 교만이 하늘을 찌른 사람들이 세운 바벨탑 공사를 중단시키시고, 그들을 온 세상에 흩어버리신 일, 그 타락한 사람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후손을 구별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일, 그리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고, 아말렉을 이기게 하시고, 가나안을 주셔서 나라를 세우고 살게 하신 일,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다른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 수도 없었고,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미리 말해 줄 수 없었습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  

이 중에서 뒷부분을 보면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존재들을 말합니다. 하나님 외의 그 누구도,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그 많은 우상들도, 사단도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도 없고, 따라서 미리 말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만이 당신의 종들을 통해 그 계획을 알려주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신 분이므로 하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그렇게 하실 수 있을까요? 본문 1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될 수 없는 특별한 분임을 말씀합니다.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할렐루야!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여기 <그>는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란 세상 모든 일의 마지막 원인자를 말합니다.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한 분, 사람들이 깜짝 놀랄 모든 일들을 이루신 분, 모든 세상사의 배후에 계신 분,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도대체 그 분은 누구일까>라고 궁금해 하는 그 분, 그 분이 바로 하나님 당신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 분만이 <나는 그다>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분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십니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만드신 분이요, 세상 모든 것들을 마무리하실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의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제품도 제조연월일이 있습니다. 제품의 생일인 셈이지요. 그리고 제품은 언젠가는 폐기됩니다. 자동차도 언젠가는 폐차가 됩니다. 주택도 언젠가는 허물고 다시 짓게 됩니다. 

사람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두 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날은 태어난 날이고, 다른 한 날은 세상을 떠나는 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 날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이지요. 아직 살아있는 우리는 두 날 중 태어난 날 하나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도 둘째 날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두 날 중 첫째 날은 대단히 기뻐하고 축하합니다. 그러나 둘째 날에 대해서는 슬퍼하고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둘째 날을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태어날 때 미리 팔뚝이나 이마에 둘째 날을 찍어 주셨다면 세상은 요지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남녀가 선을 볼 때 상대방 이마부터 볼 것입니다. 남은 날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확인하겠지요. 물질이 최고인 이 세상에서 어쩌면 <남은 날은 적고 돈은 많은 사람>이 최고의 신랑 신부감일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가진 것은 없고 남은 날은 많은 사람>은 최악의 신랑 신부감일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겠지요. 

교회 주보 광고도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처럼 <아무개 성도가 별세하셨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금주에 돌아가실 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요일별로 돌아가실 분의 이름을 미리 적어 놓고, <금주에 돌아가실 분을 위한 송별예배가 오후예배 후에 소예배실에서 있겠습니다. 다 오셔서 석별의 정을 나눠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시작과 끝을 주장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은 시작도, 끝도 없으십니다. 태어나신 날도 없고, 돌아가시는 날도 없습니다. 그 분은 영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감히 우리가 맞먹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 분은 절대적 존재입니다. 신앙은 그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분을 경배합니다. 높입니다. 찬양합니다. 그 분께 우리를 맡깁니다. 의지합니다. 믿습니다. 따릅니다. 순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분을 가장 영광스럽게 섬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듣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반복해서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12절 첫 부분이 어떻습니까?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14절을 보면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1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48장 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그 기본은 <듣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말하는 것>이 신앙인 줄로 착각하게 됩니다. 기도를 드린다, 찬양을 드린다는 것들은 모두 우리 입을 여는 행위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찬양하면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본은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얼마나 전 썼던 글이 생각납니다. 부모님을 생각할 때면 어린 시절이 그립습니다. 아버님은 늘 저를 팔베개를 하여 눕히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그 때 저는 행복한 어린이였습니다. 또 그 때 저는 말도 잘 듣는 착한 어린이기도 했습니다. 한강변 모래사장 대형 천막에서 부흥사경회가 열릴 때 어머니를 저를 데리고 가셨고, <절대 물가에 가서 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 곁에 붙어 앉아서 졸면서 말씀을 듣곤 했습니다.  저는 순수했고, 순진했습니다. 모든 일을 그분들에게 물었고, 순종했습니다. 그게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런 모습이 사라져갔습니다. 좋게 말하면 독립이었지만, 나쁘게 말하면 머리가 커진 것이었습니다. 머리가 커지면서 몇 가지 달라졌습니다. 점점 그 분들에게 숨길 것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후에는 그 분들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머니 그건 틀렸습니다. 아버지께서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모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가장 사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귀를 열고 나와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청종하십시오. 듣는 데서 신앙이 시작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멘.  

말하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듣는 것을 좋아하게 될 때 신앙생활이 가능합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생각, 자기 철학, 자기주장을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철학의 한계를 느끼고 <하나님, 말씀하시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신앙의 출발선상에 서게 됩니다. 

또 듣는다 해도 하나님께 듣지 않으면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 잘못된 이단과 종교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설교는 재미있고 유창한 설교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히 전달하는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 중 하나인 신명기 6장 4절 이하 말씀의 첫 단어는 <들으라>입니다.<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히브리어 성경은 <들으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이게 <쉐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그 겸손을 드러내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참석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듣고자 하는 마음>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정말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작전, 우리를 위한 작전내용을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통해 유다 백성을 바벨론에서 구출하겠다는 내용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의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또 바벨론은 사단의 나라, 사단이 다스리는 죄악의 나라를 말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작전사령관으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작전 계획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와 형벌을 해결하고, 부활을 통해 사망을 이기는 것이 작전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해 들이십니다. 본문 16절 끝을 보면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포로를 구출하는 영화들을 보면 특공대원들이 투입됩니다. 그리고 헬기가 동원됩니다.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은 빨리 헬기가 있는 곳, 약속된 지점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구원자로 믿는 순간, 우리는 천국의 헬기에 올라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우리를 축복하시려는 계획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음을 믿고 담대해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작전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는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과거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서 그 곳에 계셨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태어난 것, 제가 공부하면서 지내온 것,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된 것, 아내를 만나고 가정을 이룬 것, 목사로 살게 된 그 모든 것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누가 저를 여기까지 이끄셨나이까?>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여기까지 제 삶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기에 앞으로 저를 인도하실 계획에 가슴이 설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더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하나님, 제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종이 듣겠나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더욱 더 신뢰하고 믿고 따르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향한, 우리 가정을 향한,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작전 계획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담대하십시오. 우리를 위해 지금도 준비되고 있을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불안해 할 필요 없습니다.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살고 죽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위대하신 하늘의 하나님을 높이면서 찬양하길 기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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