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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을 벗어야 하는 인생 (출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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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벗어야 하는 인생 (출 3:1-5)

옛 우리 어른들이 하시는 말 중에 <팔자소관(八字所關)>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팔자라는 말은 이미 정해진 운명에 의한 것이라 어찌할 수 없이 당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의 생년, 생월, 생일, 생시에 따라 그 운명이 정해졌고 그 평생을 그 정해진 바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 같은 남편을 만나서 죽도록 고생하며 사는 것도 다 팔자 소관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는 족족 쫄딱 망하는 것은 다 타고난 팔자소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독 팔자에 대한 이야기는 남자 보다 여자들에게 더 적용되는 예가 많습니다. 

여러분, “팔자 고친다.” 는 말 아시죠? 이 말이 남자 보디는 여자에게 더 많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흔히 여성들에게 좋은 데로 시집을 가거나 재혼을 하게 되면 “팔자를 고쳤다.” 라고 합니다. 그 배경 중에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모든 양인의 꿈은 관리가 되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관리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정기적인 관리시험이 3년에 한 번 있었고, 뽑는 인원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농민이나 일반 양인이 관리가 되는 길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조선 정부에서는 일 년에 단 한번 아주 중요한 날 하루 동안 관리가 될 수 있게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혼례일 이었습니다. 혼례식 때 남자들이 입는 전통혼례복이 바로 관리의복입니다. 가장 낮은 관직인 정9품 참봉이 입는 관리 옷을 신랑이 흔하게 입게 했습니다. 

그러니 조선시대에는 남편이 관리가 되면 부인 역시 남성 관리직에 맞춰 직분이 바뀌게 되는데 참봉의 부인을 “유인” 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신랑 신부가 혼례를 치르는 날 그들은 참봉과 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봉 부인이 죽으면 묘비에는 <유인 OOO씨지 묘> 라고 여덟 글자가 적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1품인 영의정의 부인은 “정경부인” 이라는 칭호를 받기 때문에 죽어도 묘비에 <정경부인 OOO씨지 묘> 라고 열 글자가 적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팔자가 열자로 고쳐지는 것이지요. 이처럼, 남편의 관직에 따라 아내가 불리는 관직의 단어가 적게는 2개에서 많게는 4개 까지 되었기 때문에 남편에 따라서 여자의 “팔자가 고쳐진다.” 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일리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옛날부터 우리 민족도 운명론을 믿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 되는데 어쩌다가 운명론적으로 살아가게 되었는지 의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히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믿고 살았다는 것은 운명론과는 거리가 먼데 왜 아직도 “팔자려니” 하고 운명론 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요? 

운명론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그 삶의 시작과 끝이 이미 결정 되어져 있고 그 정해진 운명대로 살다가 가는 것이라는 지극히 <소극적 인생관> 을 말합니다. 이게 얼마나 불행한 생각입니까? 

우리나라 역사에도 유명한 인물들이 있고 성경에도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들을 소개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이 태어날 때부터 비범한 인물로 태어납니다. 그가 역사적 인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정해진 운명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든 암시하려고 하고 거기로부터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알에서 태어났다는 등 보통사람과는 다른 탄생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라면서 욕먹을 짓을 했다거나, 무엇이 좀 모자랐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는 그야말로 신동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보온달> 은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성경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삼손>이나<사무엘> 같이 자식 없는 부모의 간절한 기도로 태어난 인물도 있긴 하지만 희한하고 기이하게 태어난 사람은 드뭅니다. 특이한 출생의 이력이라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야곱 같은 경우가 있을까 성경의 대부분 인물들은 보통사람들과 똑 같은 조건 아래 태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태어나서 자라가는 과정 속에 어떻게 역사적 인물로 성장해 갔느냐를 중요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의 사고가 “운명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는 <결정론적 해석> 이라면 성경의 경우는 “그가 그렇게 살았기에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라고 하는 <열려진 해석> 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많이 다른 해석입니다. 우리는 운명에 맡겨 사는 결정론적 해석자들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과 태도에 따라 얼마든지 그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열려진 해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모세를 봅니다. 그에게 결정지어진 운명이란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불행한 출생과 성장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그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평가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그 과정인데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살게 하시므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레위지파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출2장에 보면 모세가 태어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처음에는 부모의 이름조차 드러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출6장에 가서야 부모의 이름이 나오는데 아버지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아므람] 이라는 사람이요, 어머니는 [요게벳] 이라는 여자 노예였습니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복된 일이요, 축하 받을 만한일입니다. 하지만 모세가 태어난 이때에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아들을 낳는 것이 비극이요, 저주였습니다. 왜냐하면 노예 신분에서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지배국인 애굽 입장에서는 반란군이 하나 태어났다는 시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산파들에게 명령하기를 아이를 받다가 아들이 태어나면 무조건 그 자리에서 죽이도록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모세는 태어났습니다. 남들은 “떡잎부터 알아본다.” 는 등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 는 등의 귀염을 받는 어린 시절을 겪고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지만 모세의 어린 시절은 암울했습니다.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족들의 믿음 때문에 겨우 목숨을 건진 모세입니다. 

이때까지가 모세인생의 제1기였다면 그 후에는 어떻습니까? 갈 상자에 담겨 나일 강에 띄워지고, 바로의 손에 들어가고, 누이 미리암의 기지로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되면서 히브리민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교육받는 동시에 왕자의 신분으로 애굽의 앞서가는 교육을 받는 인생의 제2기를 거치게 됩니다. 

그 다음 인생의 제3기가 찾아오는데 여기서부터 파란만장한 모세의 인생이 전개됩니다. 어느 날 모세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백성이 고역 하는 현장에서 애굽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고 압제당하는 모습에 분개하여 돌로 애굽 사람을 쳐 죽이는 사고를 저지르고 맙니다. 그리고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을 쳐야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왜 모세에게 이런 실패기 왔습니까? 결론적으로 그의 자만심이 그를 실패하게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기 이전까지 모세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신분상으로도 그렇고, 지혜와 능력으로도 자기만한 위치에 있는 히브리인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가 가장 출세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만심에 차서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해보겠노라고 나서보았지만 결국은 실패했고, 급기야는 도망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미디안광야에서의 40년 도망자세월 동안 모세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무엇을 했는지 별 기록조차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있다면 [십보라] 와 결혼해서 [게르솜] 이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니 처가살이를 하면서 자기 양도 아닌 장인 [이드로] 의 양떼나 돌보는 양치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런 과정을 허락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을 통해서 분명히 모세에게 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철저하리만치 자만심을 꺾고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기간이었습니다. 11절의 모세의 고백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모세로 하여금 인간 되게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 옛날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기까지 자신만만하던 모세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기의 능력과 위치로 과시해 보려던 모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달라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러한 인품과 성품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젊은 혈기, 자만심을 모두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찾으십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구체적이고 인격적으로 부르십니다. 그러시면서 이제 새롭게 된 만큼 옛날로 다시 되돌아가는 인격이나 성품이나 신앙이 없기를 바라는 중대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자기중심적이었던 과거와의 단절을 원하고 계십니다. 5절이 그 말씀입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더 이상 자기존재에 대한 자만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욕망 중심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자신만만했던 그 교만의 자리에서 조용히 입 다물고 내려오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언제든지 신을 벗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나를 쳐다봐 주기를 바라는 영웅 심리의 신을 벗어야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옳은 일이고 그 일을 통해서 내 존재가치를 높여가려고 하는 공로주의적 이기심의 옹벽이 신을 벗을 때 무너집니다. 온갖 잡동사니에 찌들어 냄새나는 신을 벗고 맨발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고집과 자랑과 교만의 신을 벗지 않고 신고 있는 한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대단하고 특별한 존재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 앞에 서 보니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을 벗어야 내가 보입니다. 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진정한 내 모습이 보인단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어봐야 추해질 것들뿐입니다. 지금까지 그 신을 신고 살았으면 됐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그 추한 신을 벗고 차라리 맨발로 설 수 있다면 훨씬 위대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내가 내려놓으면 하나님은 나를 다시 쓰시든지 혹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다 이루어가십니다. 욕심입니다. 교만입니다. 신을 벗으십시오. 그리고 한 번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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