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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법대로 경기 하는 자 (딤후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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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로 경기 하는 자 (딤후 2:5-6)

지금 런던에서는 올림픽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세계의 잔치인 올림픽에서 가슴 아픈 일은 유독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심판들의 오심이 많이 나와서 온 국민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대회 첫날에 일어났던 수영에서의 박태환 선수 실격판정이라든가, 펜싱에서 신아람 선수의 패배판정 경우는 대중이 공감할 수 없는 독단의 편파판정으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오심도 게임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스포츠 정신이라고 합니다만 적어도 그것은 심판도 인간인지라 인지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는 측면에서입니다. 하지만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제 삼자 누구라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장면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모든 스포츠 경기에는 각 경기마다의 정해진 규칙이 있습니다. 선수들은 그 규칙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이기는 훈련을 하고 승리를 바라봅니다. 규칙을 무시하거나 규칙에 상관없이 훈련을 하는 운동선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규칙을 지키는 것도 하나의 연습 과정 중에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정확한 시간 안에 가장 효과적인 공격 방법을 연습하는 것이요, 주어진 규칙 내에서 가장 많은 점수를 얻고자 하는 법을 연구하고 연습하기를 4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들을 투자하고 땀을 흘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준비한 경기에서 규칙 이외의 것으로나 혹은 지나치게 엄격한 자의적인 규칙 해석으로 인해 한 선수의 피땀 흘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최소한의 그 노력을 인정해 주는 공식적인 보호막이 규칙이거든요. 그런데 이것마저 무너진다면 선수로서는 시합을 할 이유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무슨 대회이든지 그 우열을 가리는 심사기준이라는 게 있고, 규칙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 규정 안에서 최선을 다한 선수에게는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져야 옳습니다. 그것이 스포츠 정신이고 올림픽 정신입니다.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 에 유명한 [비너스 상(像)]이 전시 되어 있는데 그 비너스 상이 바로 미인이 갖추어야만 하는 육체적 조건의 표준이라고 하여 이것을 기준으로 열리는 서양의 미인대회가 있다고 합니다. 

[비너스] 하면 아름다운 여성의 상징으로 통하지 않습니까? 비틀고 있는 그 [비너스 상]의 몸을 펴서 재어 보면 그 키가 1미터 68cm, 바스트 약37.6인치, 웨스트 26.4인치, 히프 38.4인치의 그야말로 <거녀(巨女)>랍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이 수치에 근접된 육체 조건을 갖출수록 미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생각에 좀 뚱뚱하다 싶은 여자들이 서양에서는 대우받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기준이라면 거기에 맞는 사람이 출전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곳에서는 굳이 그 기준에 맞지도 않는 사람이 미인이 되겠다고 해봐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자, 이렇게 비록 실수도 있고 오심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눈에 뜨이게 나타나서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보는 대로 우열을 매길 수 있는 일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사실 이 세상의 인간들의 삶이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매사가 그렇습니다만 사람이 어디에 삶의 기준을 두고 사느냐와 무엇에 그 생각의 중심을 두고 사느냐, 그리고 행함의 뿌리를 무엇에다 내리고 사느냐 하는 것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과 행동들로 가득 차 있으며 날마다 무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살이를 보노라면 스포츠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성경도 인생을 경주라고 말씀합니다. 한번 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달리고 또 달려야 하는 인생의 경주입니다. 인생이라는 운동장에서 사람마다 제각기 환경도 다르고 조건도 다르며 장애물도 다른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산도 있고, 절벽도 있고, 가시덤불도 있습니다. 바다도 지나고, 수렁도 지나갑니다. 사람마다 경주의 거리도 다릅니다. 하지만 이 인생의 경주에 있어서 끝까지 잘 달리면 반드시 상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잘 달리는 것입니다. 제대로 달리는 것입니다. 인생을 정당한 방법으로 살지 않고 부정한 방법으로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정당한 방법으로 경주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으로 오는 길입니다. 이것은 인생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평한 길입니다. 특별히 이미 신앙 안에 들어 온 우리들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생경주의 심판자이십니다. 하지만 실수 하는 인간처럼 오심 하시는 분이 아니라 정당하게 원리대로 경주한 사람에게는 정당한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잘 보면 한 가지 정해진 원리가 있습니다. 법대로 경주를 하라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심판을 속이면 안 됩니다. 규칙을 어기면 안 됩니다. 아무리 잘 달리는 경주, 잘 하는 시합이라도 인정받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경주의 법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의 경주의 규칙은 과연 무엇입니까? 신앙인 된 우리의 최고의 법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규칙이요, 우리가 지켜야 할 인생 경주의 법입니다. 목표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요, 목적을 신앙에 두는 것이 법대로 경주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경주를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마땅한 상을 주십니다. 

성경은 오늘 그것을 농사짓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6절입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농사에는 철칙이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는 법칙입니다. 농사는 반드시 심은 것을 거두고 심은 것에 합당한 만큼 거둡니다. 모든 절차를 제대로만 하면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둡니다. 이것은 상급입니다. 혹은 30배로, 혹은 60배로, 혹은 그 이상인 100배로 거둔다는 것이 농사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곧잘 적용이 됩니다. 딤후 4:7,8절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 인생 막바지 곧 죽음을 앞 둔 바울의 고백입니다. 얼마나 당당한 선언입니까! 자신이 받을 상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선언입니까! 

우리도 어떻게 하면 바울 같이 인생 마지막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받을 상급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법대로 신앙의 경주를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나의 신앙은 그 뿌리를 어디에다가 두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라도 올바른 판단과 지혜로운 결단과 성숙된 결론을 보일 수 있는 뿌리 깊은 신앙위에 서 있느냐는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유대나라는 비가 적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물을 찾으려면 호숫가나 오아시스를 찾아가야 합니다. 애굽 역시 비가 내리지 않는 나라입니다. 나일 강을 낀 주변 5%는 옥토여서 농사가 가능하지만 나머지 95%는 사막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 척박한 땅에서 풀이나 과일이 잘 자라나는 것은 참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곳에서 풀이나 과실이 제대로 자라려면 오직 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시편 1편에서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과 같은 것입니다. 

창 49장을 보면 죽음을 앞둔 야곱이 그 아들 요셉을 축복하는 말이 나오는데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고 비유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샘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 속에 살아야 그 영혼이 말라 죽지 않고 마치 가지가 무성하고 담 너머로 뻗어나가는 나무처럼 무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여름이 되어서 여름 과일들이 많이 나옵니다만 과일이라고 전부 다 맛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맛있는 과일이 되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따라 줘야합니다. 

첫째는 품종입니다. 같은 사과나 포도라도 그 품종이 무엇이냐에 따라 시기도하고 달기도 합니다. 그래서 품종에 따라 맛도 달라집니다. 

둘째는 토질입니다. 심어진 그 땅의 토질에 따라 맛도 달라집니다. 땅을 가꾸지 않아서 산성화토질이 되어 버리면 과일도 맛이 없고 수확도 작아집니다. 그런데 교인의 경우도 유사합니다. 같은 예수를 믿고 한 성경을 읽고 같은 교회를 다니는데도 어떤 사람은 신앙이 자라고 어떤 사람은 신앙이 못 자랍니다. 종자와 토질을 따라 과일 맛이 달라지는 것처럼 신앙도 그 사람의 바탕과 인격을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다닐수록, 그리고 직분을 맡을수록 그 신앙의 질이 산성화되어서 신앙의 열매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해만 끼치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신앙의 경주를 착실히 잘 합니다. 기도로 인격적 토양이 부드러워지고, 찬양으로 성품이 옥토가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곁에는 늘 사랑의 열매가 있고, 무성한 가지처럼 사람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뭐니 뭐니 해도 과일은 제 맛이 나야 합니다. 만약에 딸기가 바나나 맛을 낸다든지 포도가 사과 맛을 내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과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면 문제입니다. 신앙인은 신앙인의 그 맛이 있어야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맛있는 과일의 넷째 조건은 신선도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과일의 생명은 싱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정신과 삶이 썩었다면 그 사람의 그 모든 것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그 모든 것이 싱싱한 과일처럼 건전하고 정당하고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더 더욱이 그렇습니다. 늘 신선한 과일이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듯이 법대로 신앙의 경주를 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주는 신앙인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의 법입니다. 인생 경주의 규칙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은 분명히 경주입니다. 순간적으로 한번 달리고 말아야할 경주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달려가야 할 경주입니다. 더욱이 우리의 신앙은 중요한 경주입니다. 올림픽의 선수들이 메달을 따기 위하여 4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들을 애써 달려 왔듯이 우리 신앙의 경주 그 마지막에도 승리의 관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달려가는 경주자들임을 명심하고 법대로 경주하며 마지막까지 달려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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