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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요 10:16-18) -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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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요 10:16-18)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0장 16-18절)

몇 년 전에 타지키스탄 두산배에 선교여행을 갔었습니다. 당시 그곳 선교사님이 세운 교회에 이슬람 신학생들이 폭탄 테러를 일으켜 예배 중에 100여명의 사상자가 났었습니다. 선교사님도 교인들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전도가 되겠습니까?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누구라도 오셔서 위로와 힘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갔습니다.  

비행기로 8시간 반, 또 버스로 12시간 여행 끝에 도착한 교회는 아직도 폭탄테러의 처참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창문은 다 깨어져 나가 비닐로 막아 놓았고, 곳곳이 부서지고 무너진 흔적이 있었습니다. 두 눈을 실명한 청년, 자녀를 잃었다고 기도해 달라는 노인을 두 분이나 만났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설교 시간에 ‘천국 소망’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면서 폭탄테러 희생자 9명이 지금은 천국에 가 있다는 말씀을 했을 때, 통역을 하던 왈루자가 그만 울음을 터트린 것입니다. 교인들이 눈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며칠 후 며칠 후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이 예배 때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이었습니다. 정말 순교의 현장에서나 불러지는 찬송이었습니다. 우리도 일반 예배 때 이 찬송을 부르며 은혜를 받을 수 있을만큼 살아야 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정말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주님은 왜 속히 오시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초대 기독교 대 박해시기에 성도들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하며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기대처럼 속히 임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점점 심해지는데, 예수님의 재림이 왜 늦어지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그 대답을 주셨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나님의 대답은 아직도 구원해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말씀 16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 본문을 따로 떼어서 설교하는 것은 요한복음 10장을 묵상하다가 놀라운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말씀 속에 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양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실 때,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흥분되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꼭 한국을 지칭하여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분명히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당당히 말하십시오. 
“성경에 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정말 어디에” 
“여기 봐, 요한복음 10장 16절에 나온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 바로 나야!” 

이슬람권에 대한 선교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만 전 생각이 분명합니다. 이슬람권 선교도 해야 합니다. 두산베에서 스데반이라는 이란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집회 중에 러시아말 통역을 또 다시 이란 말 통역으로 들으며 은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말씀의 3분의 1도 다 듣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란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거기서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서 “너는 왜 나를 믿지 않느냐?”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출옥한 후, 예수님께서 지시한 곳을 갔는데, 이란 지하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발각되어 목사님은 붙들려 가서 목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은 타지키스탄으로 도망 왔습니다. 시골에 숨어서 지내다가 혼자 찬송을 부르게 되었는데 그 소리를 듣던 옆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 같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산 건너편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교회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제는 다시 이란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순교자 스데반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테헤란으로 돌아가면 저를 테헤란 집회에 초청 할테니 와 달라고 했습니다.  

두산베의 현지 교도소에 가서 전도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도소에 도착하여 교도소 관리들이 안내해 주는 대로 어느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는데, 후끈하면서 사람들의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어둠침침한 방에 약 1,000명 정도의 죄수들이 가득 들어차서,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외국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선교사님의 인사에 이어 말씀을 전하였는데, 모슬렘 나라, 그 중에서도 교도소 안에서 1,000여명의 모슬렘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전하다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약 10분간의 짧은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잠깐 기도한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구원받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결신 초청을 하였는데, 모슬렘들은 두 사람만 같이 있어도 결신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3분의 1정도가 손을 드는 것이 아닙니까?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모슬렘 나라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움이 전율 할 만큼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선교와 전도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사람 “우리에 들지 않은 양”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을 때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양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구원받아야 한다”, “다른 민족들도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9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천국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한마디로 여기가 좋으니 여기서 우리끼리 영원히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좋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한마디로 ‘세상 끝이 온 것이지요?’ 하고 물은 것입니다. 정말 자기 생각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십자가의 복음을 듣지 못한 많은 족속과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제자들의 이런 마음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만 구원받았으면 되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지 아닌지는 전도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나만 구원받으면 됐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감사하면서도 전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조차도 이기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을 꼽으라면 천국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느냐 못 가느냐에 따라 인생 성공과 실패가 좌우됩니다. 결국 천국에 갔다면 어떤 삶을 살았던지 성공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지 못했다면 어떤 삶을 살았던지 실패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천국을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더라도 기쁘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 지옥이 실감나지 않을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펼쳐져 보십시오. 불신자들은 말할 것 없습니다. 구원받아 천국 갈 성도도 당황할 일이 있습니다, 

저는 구원받지 못하고 운명하시는 부모님을 앞두고 임종세례라도 받게 하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를 본 적이 많습니다. 부모님이 구원받지 못했지만 평소에는 무심히 지냈는데 천국과 지옥 갈림길이 눈앞에 닥치니까 너무나 안타까운 것입니다. 

천국 문 입구에서 천국에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 가지 질문이 주어진답니다, 그 두 질문은 매우 당황스러운 것이라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답을 준비하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질문은 “혼자 오셨습니까?” 두 번째 질문은 “어떻게 당신은 혼자 올 수 있었습니까?” “아니에요 제가 전도한 사람이 있어요”하는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혼자만 천국에 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 하나님 아버지 마음에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하고 수긍하실 수 있는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그 아무 아무개는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질문을 받을 사람이 주위에 없습니까? 만약에 혼자만 천국에 갔다면, 왜 혼자만 왔는지, 아버지 마음에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하고 수긍하실 수 있는 대답이 준비되었다면, 다행이지만, 만약에 “네가 어찌 너만 전도받아 구원받으면 다라고 생각했느냐? 다른 사람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잖느냐?” 하신다면 어찌 천국에 찬송하며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힘써 전도하다가 천국에 가야합니다 
성도 여러분, 전도를 열심히 하지 못할지라도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 있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전도를 하든 안하든 전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겐 왜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가진 복음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지 않은 양을 영생의 길로 이끄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17-18절에서 “내가 내 목숨을 버린다”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온통 지옥으로 가는 영혼들에 대한 생각 뿐이셨습니다. 질병, 가난 때문이라면 굳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갈 영혼을 구원해 내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의 마음도 온통 지옥으로 향하여 가는 사람들로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순교하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모시고 사니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 없다면 이상한 일이지요!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 있어도, 실제로 전도하게 될 만큼 간절하지 않은 사람은 ‘그 자신이 아직 복음의 영광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복음을 알고 예수님을 알면 전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조롱받고 멸시받고 미움을 당하고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0장 9절에서 그는 부르짖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그렇게 결심하면 더 괴롭다고 했습니다. “마음 속에서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7-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 버렸습니다. 나쁜 것만 아니라 좋고  유익한 것도. 출신, 학식, 신분까지도 배설물처럼 다 버렸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다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그것은 그가 자기 중심에 계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끌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알아주는 영웅도 위대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생명의 복음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혼자서 품고 살다가 죽어서 그 복음으로 천국에 들어가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삽니다. 평생 우리 안에만 모시고 살다가 천국에 갈 것입니까? 예수님은 여러분 안에서 누구에게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까맣게 알지 못하지만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 나와 늘 만나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살려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이 하고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남자 권사님 한 분이 전도의 경험이 없으셨습니다. 몇 번 주위에 있는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려고 했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는 제게 “나도 전도하여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며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자훈련을 한 다음에 가까운 사람에게 교회 다니자고 말하기 전에 30분정도만 시간을 달라고 하고 양육 메세지를 전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얼마 후 그 권사님이 전한 복음메세지로 구원받은 사람이 주일예배 때 새가족으로 환영을 받았습니다. 양육자인 그 권사님이 그 새가족 옆에서 서서 더 감격스러워하였습니다. 복음이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현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로 계시는 간하베 선교사는 한국에서 창녀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창녀들의 환경을 바꾸어 주고 자립하도록 도아주는 방법도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다시 창녀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간하베 선교사는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낮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그녀들을 찾아가서 친해진 다음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호기심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던 창녀들이 일단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자기는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합리화 하던 여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열 명의 창녀 중 여덟 명은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뛰쳐나옵니다. 그리고 가정부 일을 하거나 공장에서 일하거나 길거리에서 행상을 벌여 놓고 장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숨어서 다른 사람들을 후원해 줍니다. 이렇게 달라집니다. 복음이 진짜 생명이 변화된 환경보다 더 큰 능력입니다. 

전도는 전도자 자신의 영적생활에 있어서도 전환점이 됩니다 

박보영 목사님은 의사였다가 늦게 목회자로의 부름을 깨닫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식도암으로 너무나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기 위한 교단시험이 있던 날, 시험 보러 갔다가 목이 너무 아파서 시험도 못 치르고, 겨우 교회로 돌아와 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죽더라도 기도하다가 죽자”하는 생각으로 강단으로 나가서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깨달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다 죽자”는 마음으로  교회가 세든 2층에서 아래 층으로 겨우 기어 내려가듯 해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떤 사람이 지나가길래 “예수 믿으라”고 전했답니다. 그 사람은 누가 길에 누워 힘이 없는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 같아, “뭐라구요?” 하며 귀를 기울이더랍니다. 이 전도사님은 그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하고는 그 사람을 붙잡고 혼신이 힘을 다해 간절히 기도해주었답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나자 다리에 힘이 생기고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먹었는데 그 뒤로 잘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참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전도만 하면 몸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건물 주인이 3층에 사는데 교회에 세를 주고도 자기는 불교를 믿으니 찬송도 크게 하지 말고 울면서 기도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깡패들이 회개하고 교인이 되고 그 지역의 불량한 학생들도 변화하는 것을 보고 자기 아들도 좀 돌봐달라고 하면서 부탁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박보영 목사님이 지금은 잠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고 있습니다. 

여러분, 전도의 감동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순종하면 예수님이 쓰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주여 순종하겠습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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