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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붙는 전도의 소명감을 회복하라 (사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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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는 전도의 소명감을 회복하라 (사 6:6-8)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장 6-8절)


한국교회 부흥의 씨앗이 된 토마스 선교사

1863년 12월, 매서운 혹한이 몰아치는 어느 추운 겨울 날, 런던 대학을 졸업했던 한 젊은 선교사가 갓 결혼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중국 땅에 도착을 했습니다. 드넓은 중국 대륙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편만케 하고자 하는 꿈을 꾸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젊음의 정열과 인생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중국에 와서 중국선교를 불태우려고 했던 이 젊은 선교사는 낯선 이국땅에 와서 선교도 채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지만, 그는 지프라는 곳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였던 윌리엄 알렉산더를 만나 선교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 번 충전하였습니다. 가슴이 울먹거리며 눈시울이 뜨겁도록 선교에 대한 열망을 재충전 받았습니다. 선교지에 와서 아내를 잃은 것은 슬픔이 아니라 전도자의 영광이요, 선교사의 영광임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선교에 불붙는 소명감이 가득 차고 있을 때 마침내 그는 중국 선교보다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땅에 대한 선교의 비전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865년 9월 4일 여러권의 중국어 성경을 가지고 황해도 창린도에 와서 2개월 반 동안 사력을 다하여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에는 충분한 조선말의 실력을 갖춘 그는 황해도 해안지역에 머물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로 그가 누구입니까? 1866년 평양의 대동강에서 순교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어느 정도 조선 선교에 자신감을 가졌던 토마스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북경대학에서 조선선교를 물색하고 구체적인 전략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동지사 일행으로 중국에 온 개화파의 거두 평양감사 박규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조선선교의 꿈을 이야기하며 속한 시일에 조선선교사로 가고 싶다고 말을 하면서 중국어 성경 한 권을 선사했습니다. 이 성경은 훗날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과 김홍집에게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조선선교를 불태우며 기회를 찾고 있었던 토마스는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입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배의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을 했습니다. 이 배에는 동양인 19명 서양인 5명이 승선했고 토마스는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승선을 했던 것입니다.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토마스는 가끔 뭍에 내려 조선 사람들에게 가지고 온 중국성경을 건네주며 구두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일을 예의주시하며 경계하였던 평양성의 관리들은 평양감사에게 계속해서 부정적인 보고만 하였습니다. 결국 박규수는 셔먼호를 불태우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마침 셔먼호가 양각도에 잠시 좌초당해 있을 때 군관들이 그 배의 솔가지와 유황을 뿌려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셔먼호에 불길이 휩싸이자 배에 탔던 한 사람, 한 사람이 뭍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군관들은 그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한 아름가지고 뭍으로 올라온 한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뭍으로 나와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 이라는 군관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가지고 온 성경을 건네줍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두 손을 높이 받들어 제발 성경을 받아만 주라고 권했습니다. 

박춘권은 그들을 죽이려고 뽑았던 칼을 잠시 멈추었습니다. 왜냐하면 서양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의 최고의 예절과 모든 예의를 갖추어서 성경을 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박춘권이 성경을 받지 않자 토마스는 모래사장의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하나님께 눈물로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기는 칼에 죽는다 할지라도 제발 이 사람들이 성경을 받고 예수를 믿도록 기도했던 것입니다. 

“주여, 아내를 먼저 보낸 이 젊은 선교사도 아내가 갔던 천국으로 갈 때가 되었나 봅니다. 이 조선 땅에 복음을 편만케 하고 수많은 뭍 영혼을 구원시킨 후에 천국에 가려고 했는데 이제 저도 주님의 품으로 가려나 봅니다. 그러나 주님, 이 젊은 종이 이 땅의 복음을 전하러 왔사오니, 이 조선 땅의 구원의 복음인 성경을 전하러 왔사오니, 제발 가지고 온 성경만큼은 이들에게 전달하고 죽게 하옵소서. 이들이 지금은 모르고 저를 죽이려고 하오나 저들이 성경을 받고 돌아가 반드시 예수를 믿게 하시고 이 조선 땅에 구원의 불길과 부흥의 불길이 저 셔먼호의 불길처럼 치솟아 오르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주여, 간절히 부탁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주님 품에 가겠사오니 제발 저들이 이 성경을 받고 구원의 복음을 읽게만 하여 주옵소서.” 

얼마동안의 이런 최후의 기도를 드리고 난 토마스는 다시 얼굴을 땅에 대며 두 손으로 박춘권에게 성경만은 받아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박춘권은 성경 받기를 거부하고 마침내, 칼로 그의 머리를 잘라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 26살의 젊은 선교사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지 2년 6개월 후 그는 조선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내의 뒤를 이어 하늘나라에 간 것입니다. 그것도 위대한 순교자가 되어서 말입니다.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을 위한 순교란 언제 어디서나 교회의 씨앗이 된다고 말입니다. 과연 터툴리안의 말처럼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한국교회 부흥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조선 땅 전역에 치솟아 오른 부흥의 불길

토마스가 순교하던 바로 그날부터 교회의 씨앗은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선교사를 죽인 군관 박춘권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책이 무슨 책이길래, 왜 그 젊은이는 죽어가면서도 나에게 건네주려고 했을까? 도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있길래, 왜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댄 채 두 손을 들고 이 책을 나에게 건네주려고 했던 말인가?” 

그래서 그는 동료들 몰래 그 현장으로 가서 흩어진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박춘권은 그 성경을 읽다가 영주교회 ‘영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영수’란 말은 오늘날의 전도사와 장로사이의 직분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성경을 읽고 조카 이영태에게 주어서 이영태가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조카 이영태가 어떤 사람인줄 아십니까? 훗날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레이놀즈의 조사가 되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한글성경의 3분의 2를 번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 뿐입니까? 토마스로부터 한문성경 3권을 건네받은 최치량은 성경이 금서라는 사실을 알고 겁이나 평양의 영문주사 박영식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박영식은 이 성경을 건네받고 질 좋은 종이로 만든 성경 종이로 자기 방을 도배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당시 중국어 성경은 한지류로 만들어져서 종이의 질이 매우 좋았고 소위 이 책은 딱지본으로 제본되어 있었기 때문에 묶은 실을 풀기만 하면 낱장으로 풀려 일일이 종이를 찢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방이 작았기 때문에 성경 두 권이면 웬만한 집의 몇 개의 방을 도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박영식은 성경책을 다 풀어서 자기 집의 모든 방을 도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방바닥과 벽과 천정까지 성경으로 도배한 집을 한번 상상해 보시란 말입니다. 이 집이야말로 인류역사상 최초로 성경으로 도배한 말씀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으로 방 전체를 도배한지라 방에 들어가면 사방에 보이는 것이 성경 말씀뿐이었습니다. 

미안하지만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는 것이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어쩌면 물끄러미 벽을 바라보던 박영식의 눈에 들어온 성경구절은 이런 말씀이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처음에는 무심코 읽다가도 자꾸자꾸 읽으면 죽음이후에 영생이 있다는 사실,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심각한 고민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인생의 깊은 고민에 빠져 삶의 회의를 느끼며 근심에 빠져 있다가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았을 때 이런 성경 구절이 눈에 들어왔을 줄도 모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그 뿐입니까? 그 옆에 이런 말씀이 쓰여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또한 좌우를 보니 이런 말씀이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박영식은 도배가 된 성경 말씀을 읽음으로써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성경에서 만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어떻게 회개하며 예수를 어떻게 믿고 천국에 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영식은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었으며 박영식에게 성경을 전해 주었던 최치량까지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아니,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으로 도배를 했던 이 집이 평양에서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꼴 교회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널따리꼴 교회가 1907년 1월 14일 놀라운 성령의 불길이 임하였던 교회요, 평양대부흥 운동의 원산지가 되었던 장대현교회의 전신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 장대현교회의 대부흥운동으로 인하여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어 버렸고 조선 땅 전역에 부흥의 불길을 치솟아 오르게 했던 역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토마스의 순교가 장대현교회로 연결되었고 평양대부흥운동과 한국교회의 부흥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느냐는 말입니까? 일찍이 터툴리안이 말한 대로 토마스의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요, 아니, 교회 부흥의 불길을 만드는 불씨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26-7세의 젊은 선교사가 한국선교에 본격적으로 시작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태동과 성장과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토마스 선교사로 하여금 이런 결과를 낳게 하였을까요? 토마스 안에서 무엇이 과연 선교의 불붙는 열정을 갖게 하였고 젊은 나이의 순교를 하면서 까지 이런 불붙는 정열을 갖게 하였을까요? 한마디로 토마스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던 불붙는 선교의 소명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불붙는 전도의 소명감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뜨거운 소명감의 열정으로 그는 임신한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아내를 중국 땅에서 잃은 후에도 타오르는 뜨거운 소명감 때문에 조선 선교의 열망을 가지고 조선 땅에 와서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하다가 목베임을 받아 순교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토마스 안에서 꺼질 줄 모르는 선교의 소명감, 도무지 사그라들지를 모르고 활화산처럼 치솟아 오르는 정열의 소명감이 그의 삶을 이토록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붙는 선교의 소명감, 전도의 소명감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생긴 것이며, 무엇 때문에 타오르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내고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낸 것이요, 하나님이 선택하여 준 것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종들을 부르실 때 자기 자신을 소개하시며 동시에 우리에게 주실 사명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런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너를 지금 부르노라. 너는 듣든지 안 듣든지 백성들에게 가서 나의 말씀, 나의 복음을 전하라.”

그러면 모든 소명 받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 거절을 하였습니다. 어떤 핑계를 대든지 간에 거절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는 입술이 둔해서 못합니다. 저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여 말을 못합니다. 저는 겁도 많고 소심해서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보내시옵소서. 저는 결코 갈 수 없습니다.”

이사야의 불붙는 소명감

오늘 본문의 이사야 같은 경우도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거절을 하였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입술이 부정해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입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단 말입니까? 저는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나보다 좀 더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을 불러 쓰시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확신을 주셨습니다. “야, 내가 누군 줄 아느냐, 나는 여호와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래 봬도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부르고 열방의 선교사와 전도자로 세웠는데 무엇이 겁난 단 말이냐, 겁내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하마.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통하여 큰일을 이루겠고 큰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일어나 너의 삶의 현장으로 가거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그뿐입니까? 하나님은 말씀뿐만이 아니라 사인과 기적으로 그들의 소명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지팡이의 기적으로, 기드온에게는 이슬의 표징으로,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사야에게는 하늘 보좌에서 활활 타고 있었던 거룩한 숯불로 입술을 지져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에게 천사가 말을 합니다. “보라 이것이 내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그런데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간단 말인가?” 한 마디로 이사야의 가슴에 소명감이 타오르도록 부채질을 하였던 것입니다. 기름을 부어놓고 불을 지르듯이 하나님은 소명의 말씀과 기적을 통하여 이사야의 심령의 소명의 불길을 지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이사야가 무어라고 하나님께 고백합니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주여, 내가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한 마디로 이사야의 가슴이 뜨거워 견딜 길이 없어 소명의 감격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이런 과정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명이 부담이 되어 나는 못한다고, 제발 이것만은 하지 말게 해 달라고 핑계를 대고 거절을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가슴에 불을 타오르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게 하시고 사명의 현장으로 가게 했던 것입니다. 

불붙는 전도에의 소명감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핑계대고 거절했습니다. 아니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에 핑계대고 거절을 하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특별히 전도하는 일에는 더 그럴 것입니다. 난 죽어도 전도만은 못하겠다고, 주일 날 교회 와서 예배는 드려도 전도하는 일만큼은 제발 강요하지 말아달라고 핑계하며 거절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랬던 우리를 하나님이 꼬시고 달래고 설득해서 우리 마음에 큰 흥분과 감동을 주어서 우리를 불붙는 소명감이 타오르는 전도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기적을 주시고 표적을 보여주셔서라도 우리를 전도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아니, 지금도 전도 만큼은 하지 못한다고 핑계를 대며 거절을 하는 성도들에게는 흥분과 감동을 주어서 전도자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소명에 흥분을 하고 감동을 하여 우리도 하나님 앞에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 주소서. 주여, 지금까지는 하기 싫고 부담이 되어서 안 하겠다고 하는 전도, 한 명, 두 명이라도 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나를 써 주시옵소서. 나를 보내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불붙는 소명감이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붙는 소명감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을 하고 노래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도 바로 이런 소명감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 역시 젊은 인생을 살면서 다른 꿈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누리고 싶었던 것들도 많았고 인생을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 주체할 수 없고 감히 항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에 화답하여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임신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중국 땅으로, 그리고 조선 땅으로 온 것입니다. 

그 소명감은 토마스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한 것입니다. 만약에 토마스가 선택한 것이라면 도중에 하차하거나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문화가 안 맞고 기후가 안 맞고 환경이 안 맞고 선교현장이 마음에 안 맞다고 포기를 하고 주저앉았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선택했으니 도중에 내가 버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고 일방적으로 나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에 토마스는 도중에 하차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불붙는 선교의 소명감을 따라 죽기까지 선교의 사명을 다했던 것입니다. 불붙는 소명감이 그의 인생을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타오르는 소명감의 감격으로 이런 노래를 부르며 배를 타고 왔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런 심정을 가지고 중국에서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조선 땅으로 왔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교의 불붙는 소명감이 타오르는 것,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전도의 불붙는 소명감이 타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토마스 선교사처럼 불붙는 소명감을 가졌다가는 나도 순교해서 죽으라고?” 그러나 그런 염려는 조금이라도 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순교의 축복이 없는 시대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순교하고 싶어도 누가 죽여주는 사람이 있던가요? 그러므로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고작 당하는 것은 눈치나 보이고 핍박이나 받는 시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에게는 순교가 가장 큰 축복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축복은 없습니다. 다만 불붙는 전도의 소명감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며 지옥 갈 영혼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전도하는 것일 뿐입니다. 전도의 불붙는 소명감으로 우리가 한 영혼, 두 영혼을 전도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는 가장 큰 영광이고 축복인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순교를 통하여 전도를 했지만 우리는 순교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는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순교를 안 하고도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는 복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다른 건 다 할 수 있어도 전도만은 못한다고 핑계를 댈 지도 모릅니다. 토마스를 보십시오. 토마스가 살아생전에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원했습니까? 그러나 불붙은 소명감으로 성경을 건네주었을 때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전도의 불붙는 소명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불붙은 전도의 소명감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어떤 통로든지 영혼을 구원하고 영혼을 얻는데 위대한 결과를 얻게 할 것입니다. 아니, 위대한 교회의 부흥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도래하게 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입니다. 소명감이 타오르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전도의 영광과 축복으로 여러분을 초청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들은 위대한 불붙는 전도의 소명감이 회복될 것이고, 위대한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소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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