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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들이니 (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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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니 (갈 4:1-11)


대영제국의 황금기를 이루었던 여왕으로는 엘리자베스 1세가 가장 유명하지만, 근대에 들어와서 영국이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최전성기를 이룬 것은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의 어린 시절에는 다른 왕자나 공주와 마찬가지로 왕실 가정교사의 지도하에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빅토리아 여왕을 가르쳤던 가정교사는 그녀의 일상생활까지 매우 엄격하게 지도했기 때문에 그녀가 성인이 된 후에도 영국의 대표적 신문인 '더 타임스'(The Times)를 읽지 못하게 했고 홍차를 마시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더 타임스'지를 못 읽게 한 것은 그 신문에 영국 왕실에 대한 비평 기사가 자주 실렸기 때문이었으며, 홍차는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 그 왕실 가정교사가 주장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빅토리아가 대관식을 하고 대영제국의 여왕으로서 정식으로 등극하게 된 날이었습니다. 
여왕이 된 빅토리아는 그녀 앞에 대령하고 있는 신하들에게 첫 공식 명령으로 '더 타임스'지와 홍차를 자기에게 갖다 달라고 분부했습니다. 
물론 여왕의 명령은 지체 없이 실시되어 그 두 가지는 곧 빅토리아 여왕 앞에 놓였습니다. 
그러자 빅토리아 여왕은 그 신문을 보지도 않고 또한 홍차를 마시지도 않은 채 그냥 둘 다 도로 물려내 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빅토리아 여왕은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내가 정말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소."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공주에서 여왕으로 바뀌는 것만 해도 그처럼 대단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신문 한 장 마음대로 못 읽고 홍차 한 잔 마음대로 못 마시게 하는 가정교사 밑에 있던 사람이 이제는 온 나라와 백성 위에 앉아 다스리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기분 좋고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그런 동화 같은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그저 꿈만 꿀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멋진 일이 우리 기독신자에게는 실제로 벌어집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권위 아래 매여 있던 신세가 한순간에 완전한 자유를 얻을 뿐 아니라, 이전에 자기를 속박하고 있던 권위보다 오히려 훨씬 더 큰 높은 지위의 신분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꿈같은 일이 성도에게는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중생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된 신자야말로 바로 그런 극적인 신분 상승을 누리게 되는 자라고 오늘 본문을 통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그처럼 '하나님의 양자'라는 엄청난 신분을 얻게 된 성도가 어떤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양자가 된 성도는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의 기쁨을 만끽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종'의 처지에 있던 사람이 '주인의 아들'의 신분으로 바뀌게 되었을 때의 감격적인 기쁨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종 되었을 때를 가리켜서 사도 바울은 1절부터 3절에 "1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 속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경우를 예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헬라 사회에서는 "유업을 이을 자" 즉 집주인의 뒤를 이을 상속권을 가진 주인의 자녀라 할지라도 어릴 때에는 역시 가정교사와 같은 "후견인"의 보호와 관리 아래에 있었습니다. 
당시의 가정교사는 "청지기" 즉 '주인의 종'이었으므로 따지고 본다면 주인의 아들 역시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상태가 바로 그와 똑같이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던" 때라고 비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 초등 학문"이라는 말은 영어로 하자면 'the elemental spirits of the universe'(우주의 기본적인 정령들)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 헬라 사회에서 소위 우주의 근원이라 해서 숭상되고 있던 '물, 불, 흙, 공기', 혹은 그 우주의 조정자로 숭배되고 있던 '일월성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의 불신자들은 이런 것들을 생각해 내고는 제 딴에 우주의 비밀을 드디어 발견해 낸 양 자랑하고 있었는데, 갈라디아교회의 교인들은 이방인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학설과 정령숭배에 매우 익숙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이방인들은 바로 그런 '세속적 학문'을 마치 신주처럼 모시면서 그 밑에서 종노릇하던 자들이었고, 예수님을 믿기 전의 유대인들 또한 나중에 5절에 나오는 대로 '율법'을 그렇게 섬기며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던 사람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종의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주인의 아들'로 탈바꿈하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바로 4절부터 7절까지에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우리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를 얻게 해 주시기 위하여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과 또한 "그 아들의 영" 즉 성령을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함이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의 명분을 얻다'라는 말이 바로 '양자로 삼다'(adopt)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우리를 죄의 종이 된 처지로부터 구출해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에 불과했던 우리를 당신의 '아들'의 신분으로 아예 완전히 바꾸어 버리고자 하시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율법 아래 있는 자"들로서는 도저히 꿈도 못 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적 같은 일을 성취시키시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님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선행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공로로써 스스로 구원받으려고 발버둥을 치던 자들이 바로 그 교만과 그 무능으로 인하여 완전히 죽게 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을 때, 천만뜻밖에도 성자 예수님께서 친히 그 모든 구원의 조건을 대신 채워 주시고 우리를 하루아침에 '하나님의 아들'까지 되게 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기하고도 멋지고도 행복한 일입니까?

그처럼 성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양자로 격상시켜 놓으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도 끝나지 않으시고 또한 "그 아들의 영" 즉 보혜사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이 '아바'란 말은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언어였던 아람어를 소리 나는 그대로 음역(音譯)해 놓은 것으로서, 아버지란 호칭을 그 자녀가 매우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즉 우리나라말의 '아빠'나 영어의 'daddy'에 해당되는 애칭인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이처럼 친근하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만들어 놓는 일을 이미 완성해 놓으신 후에 또한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바로 이 사실을 재확인 및 재보증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자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상태가 되도록 만드셨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 행복한 상태를 실제로 체험하도록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성령님의 감화감동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하늘 아버지와 이처럼 따뜻하고도 가까운 교제를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나눌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여전히 '세상 초등 학문'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몇 자 안다고 그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논하려'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품안에 자신을 내던지며 안길 수 있는 자녀의 특권과 감격을 맛 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쁨과 감사를 느끼고 계십니까?
죄 아래 종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던 인생이 하루아침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엄청난 신분으로 바뀐 감격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을 화육강세하신 성자 하나님으로, 죄인의 유일하신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 성도만이 이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것만 해도 정말 감지덕지하지 않을 수 없는 판인데, 하나님께서는 원래 '불신 철학과 과학'의 종에 불과했던 저와 여러분을, 세상에, 당신의 양자의 위치에까지 격상시켜 주셨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최고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종에서 아들이 된 사람은 그 감격을 마음껏 즐기는 가운데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성자의 십자가 공로를 인하여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을 확신하는 성도는 신앙생활에 어떤 부담감이라는 것을 결코 가질 수가 없는 법입니다. 
'주인의 아들'에게 도대체 무슨 힘든 일이 있겠습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 뵙는 일이 어떻게 귀찮은 일이 될 수 있으며, 아들이 아버지께서 시키는 심부름을 하는 것이 어떻게 종이 주인 밑에서 일하는 기분과 같겠습니까? 
'이렇게 좋은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으니 정말 나는 복이 터졌구나.' '이런 부자 아버지의 유업을 내가 이어받게 되었으니 정말 신나는구나.' - 저와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바로 이런 기쁨을 만끽하면서 살 수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서도 똑같은 즐거움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이 주인에게 올리는 '공식적인 보고(報告)'가 아니라 어린 자녀가 자기 아버지에게나 할 수 있는 '옹알이'나 '응석부림'으로도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신분이 되어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못할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도 하소연하지 못할 답답한 일, 부탁하지 못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으니 이제 그 고귀한 신분과 특권적인 유업을 마음껏 즐기며 늘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양자가 된 성도는 다시는 죄의 종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경건생활을 지켜야 합니다. 

종에서 아들이 된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치고 그 아들의 자리를 떠나서 다시 종의 위치로 돌아가려는 어리석은 자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 점을 사도 바울은 본문 8절 이하 11절에 "8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종의 멍에 아래에 영원히 묶이게 되느냐 아니면 거기서 자유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그가 "하나님을 아는" 여부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 번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 즉 우상에게 "종노릇"하는 비참한 인생을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 주도적 역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편에 있기 때문에 그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라고 말한 직후에 이어서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보았던 대로 성자와 성령을 보내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을 아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길을 열어 주신 그 모든 과정은 오직 하나님께서 홀로 주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존귀한 신분으로 이끌림을 받은 후에도 거기에는 아직 중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생활, 하나님 아닌 것에 종노릇하는 생활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위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출신 교인들의 경우에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율법주의 아래의 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고, 이방인 출신 교인의 경우에는 다시 세상의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교회를 통하여 일단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교인들 가운데서도 그처럼 이전의 "종노릇"하던 생활로 되돌아가고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되돌아가고 있던 것이란 사도 바울이 9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대로 "약하고 천한" 것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세상 초등 학문에는 죄인 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아무 능력이 없었으므로 '약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것은 악인 된 사람을 의인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었으므로 '천한'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갈라디아교회의 교인이 된 사람들 가운데서도 바로 그 '약하고 천한 것들 아래'로 다시 돌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앞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양자'로서의 새 생활에 대한 즐거움과 감격을 누릴 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비록 몸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율법과 세상 초등 학문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종내 가져 올 결과는 사도 바울이 그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또한 그들 자신이 교회생활이라고 했던 모든 "수고한 것"들이 다 "헛된" 일로 끝나는 것밖에 없을 것이 뻔했습니다. 
왜냐하면 실상 그들은 '죄를 대속해 줄 공로'나 '종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는 능력'이 전무한, '하나님 아닌 것'을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아직 그 심령에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좀 더 어려운 말로는 '외적 소명'은 받았지만 '내적 소명'을 받지 못한 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 가운데 누가 실제로는 내적 소명을 받지 못한, 즉 구원의 확신이 없는 교인인지는 정확하게 알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교인을 보면서 '저 사람은 내적 소명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라는 판단을 함부로 내리지 말고, 오직 나 자신이 그런 '헛수고의 신앙생활'에 빠지지 않도록 늘 스스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초청을 통하여 교회에 나오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의 인격과 양심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를 만나 뵐 수 있는 이 귀한 자리에까지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 아닌 자 아래 종노릇'하는 자리로 되돌아가고 마는 일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고 그저 율법주의적인 사고방식에만 사로잡혀 간신히 이어가는 교회생활을 할 때 바로 그런 위험이 닥치게 됩니다. 
그렇게 귀찮은 주일예배에 억지로 와서 한 시간을 겨우 참고 앉아 있다가 돌아가고, 그렇게 내기가 아까운 헌금을 그저 남의 눈 때문에 형식적으로 조금 내는 식으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는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본인은 그렇게라도 하면 그것들이 모이고 쌓여서 나름대로 '신앙생활'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경고하는 대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만 대충 지키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이며, 바로 아직도 실제로는 그 영혼이 '율법 아래 종노릇'하고 있는 자의 대표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렇게 부담스러운, 그렇게도 힘든, 그처럼 재미없는 생활을 어떻게 신앙생활이라고 끝까지 지키며 살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 모든 '수고한 것'들이 다 헛된 것으로 끝나고 말 수밖에 없는 것이 뻔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아직도 머릿속은 불신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으로만 가득 차 있는 교인의 경우도 꼭 마찬가지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자기의 논리나 약간의 학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자라든지, 자기는 평소에 말주변도 없으니 기도 역시 할 수 없다고 스스로 '포기 각서'를 써 놓고 있는 교인은 그야말로 여전히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종노릇'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 교인이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도 없고 자신의 신분이 격상된 감격도 체험할 길이 전혀 없는 이유는 그가 아직도 '약하고 천한' 세상 초등 학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유치한 학문에 스스로 꽁꽁 묶여서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는 재미도 느낄 줄 모르고, 그 세상 논리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를 드리고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응답을 받는 즐거움도 맛보지 못하고 있으니 그 신앙생활이란 것이 지겨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날들이, 주일과 절기들이, '달과 해'들이 바뀌도록 계속 흘러가기만 하면 그 역시 결국에는 '헛된 수고'요 '파선하는 믿음'이 될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후퇴로, 비참한 몰락으로 끝나서는 말도 안 될 일입니다. 
그래도 피차 '수고'를 하고 있는데, 교역자들과 곁의 성도들이 여러분을 위하여 가르치며 기도해 주고 있으며 여러분 자신 역시 아예 교회 문에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불신자와는 달리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 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마지막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나 자신이 아직도 '하나님 아닌 그 무엇'에, 아직도 '약하고 천한 것'에 매여 있지 않는지를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그저 '율법주의적'으로 겨우겨우 따라가고 있지 않는지, 아직도 마음은 '세상 초등 학문'에만 매여서 복음을 증거하고 기도하는 것을 여전히 쑥스러워 하고 있지 않는지 '자신의 속'을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이제 '종'처럼 취급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들'처럼 대해 주고 계십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대해 주고 계시는데도 여전히 '종'으로 사는 것처럼 항상 어두운 얼굴을 하고 무거운 어깨를 내려뜨리고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구원의 확신'을 굳게 붙잡고서 다시는 '하나님 아닌 것의 종'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진정한 '하나님의 양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최근에 제가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First Week In Jail'(구치소에서의 첫 한 주간)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구치소에 수감된 죄수들의 첫 번째 한 주간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 주는 미국의 '리얼리티 쇼'였습니다. 
거기에 여러 명의 죄수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초범으로 들어오게 된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내 이런 곳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각오였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죄수라는 신분으로 떨어진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감옥이란 곳에 갇혀 산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맛본 사람이라면 일단 '자유로운 시민'이 된 후에는 다시는 그리로 돌아오고 싶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물며 '사단의 종노릇'하던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유로운 양자'가 된 성도야 오죽하겠습니까?

원래 우리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낼 '고소원불감청'이었고 상상도 못할 '기적'에 불과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때도 바로 그런 심정이지 않았습니까?
  
"내가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탕자의 고백 그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은커녕 그저 '하나님의 종'으로만 삼아 주셔도 백번 감사드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을 하늘 아버지께서는 오히려 '반가이 맞아 주시고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시고 가락지를 끼워 주시고 신을 신겨 주시고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서' 우리를 영접하는 잔치를 베풀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팔자를 고쳐도' 얼마나 잘 고친 것입니까?
이것은 공주에서 여왕이 된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극적인 신분 격상입니다. 
우리가 그런 기쁨의 잔치 자리에서 어떻게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을 수가 있으며, 그런 분에 넘치는 영접을 받게 된 후에 어떻게 옛날 '돼지 쥐엄 열매를 먹던 자리'로 되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아들'이 되었으니 크게 즐거울 수밖에 없고, 아들이 되었으니 다시는 '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사단의 종'이었다가 '하나님의 양자'의 명분을 얻게 된 이 큰 은혜 가운데 자신의 신앙생활을 늘 기쁘게 또한 더욱 신실하게 영위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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