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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한다면 (고전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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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고전 13:1-7)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예수’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저는 ‘구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와 뜻이 ‘구원’이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이십니까? 저는 그게 ‘행복’입니다. 저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생각납니다. 구원은 완전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데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눈물도 근심도 아픔도 죽음도 없는 나라라고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저는 그것을 그냥 완전한 행복이 있는 나라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하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행복’은 참 소중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주시고 싶어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가장 큰 소망 중에 하나도 역시 행복일 것입니다. ‘행복’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상관없이 똑같은 삶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행복’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입니다. ‘행복’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여러분의 삶이 달라집니다. 

보편적인 경우 ‘행복’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단어는 ‘돈’, ‘권력’, ‘성공’, ‘승리’ 같은 단어입니다. 어제 우리나라는 올림픽에서 축구 동메달을 땄습니다. 동메달도 동메달이지만 그것이 일본과의 게임에서 승리해서 딴 동메달이기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였습니다. 일본과의 축구 경기에서 승리한 것이 우리를 그렇게 행복하게 하였습니다. ‘승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승리’를 위하여 가지 않는 노력과 투자를 합니다.

그런데 승리가 가져다 주는 행복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불행과 아픔과 슬픔을 댓가를 지불하고 쟁취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가 축구 때문에 행복했기 때문에 어제 일본은 축구 때문에 불행했습니다.

어제 두 번째 골을 넣은 후 우리 선수들이 행한 세레모니는 ‘대한민국 만세’ 세레모니였습니다. 다음 주에 있을 광복절을 생각하며 한 세레모니였습니다. 우리는 36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생활을 하였습니다. 36년 동안 일본과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와의 시합과 경기에서 지는 것보다 일본과의 시합과 경기에서 지는 것을 더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과 시합과 경기를 하면 자기 실력보다 최소한 30% 이상의 실력을 더 발휘한답니다.

어제는 우리가 이기고 일본이 졌습니다. 어제는 우리가 행복했고 일본이 불행했습니다. 행복을 승리에서만 찾는다면 이러한 일은 영원히 반복되고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면은 돈과 권력과 성공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주는 행복은 그 행복 자체의 품질에도 문제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돈이 주는 불행을 댓가로 얻게 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어마어마한 건축물들을 보았습니다. 높은 산 위에서 세운 성을 보았습니다. 그 근사하고 아름다운 성에서 살았을 사람들이 누렸을 상상이 안가는 행복 (물론 불완전한 것이지만)이 상상이 되기도 했지만, 저는 그 몇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받았던 불행이 더 구체적으로 상상이 되어 마음이 불편했었습니다.

때문에 행복을 돈과 권력과 성공과 승리에서만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돈과 권력과 성공과 승리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져다 주는 행복을 자신만을 위하여 쓸 것인가 아니면 모두를 위하여 쓸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씀드려서 제가 돈과 권력과 성공과 승리를 부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잘 사용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행복을 위한 최고의 수단과 방법은 아닙니다. 상상밖에 그것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행복의 품질은 그다지 높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높은 품질의 행복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은 언제 가장 행복할까요? 여러분 ‘행복’하면 떠올라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사랑은 자신만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닌 상대방도 행복하게 한다는 면에서 돈이나 권력이나 성공이나 승리와 품질과 격이 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사랑’을 추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은 우리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개 사랑 때문에 행복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대개 사랑 때문에 불행합니다.

이유는 우리가 사랑에 서툴기 때문입니다. 서툰 사랑이 우리를 힘들게하고 아프게하고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당하는 가장 큰 아픔과 슬픔과 불행과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은 ‘서툰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 중의 가장 큰 사랑은 부모의 사랑일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부모의 자식 사랑은 극진하고 지극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부모 때문에 행복한 자녀들보다 부모 때문에 아프고 힘들고 고통받는 자녀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자식을 버리는 부모를 생각하실는지 모릅니다. 물론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자녀들이 받는 고통과 아픔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제 고등학교 은사 한 분이 후에 목사가 되셨습니다. 목사가 되셔서 미국에서 해외입양아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해외입양아들 중에 반듯하게 잘 자라 세상적으로 볼 때 성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어느 날 자살을 하는 경우가 종종있답니다. 보편적으로 저들이 격는 가장 큰 아픔은 자신이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평생을 우울하게,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자녀들만 불행할까요? 부모에게 버림을 받지 않고 정상적인 보살핌을 받고 있는 우리들의 자녀들은 다 행복할까요? 자녀들을 위하여 자신들은 입지도 먹지도 않고 오로지 자식들의 성공과 행복을 위하여 희생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나는 우리들의 아이들은 과연 다 행복할까요?

행복을 느끼며 건강하게 자라는 자녀들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더 많을까요? 후자가 아닐까요? 그러면 왜 그럴까요? 부모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그렇게 희생을 하면서까지 사랑을 하는데 그 사랑을 받는 아이들이 왜 불행해 하는 것일까요?

이게 보편적으로 우리 같은 부모들이 가장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우리 같은 부모들은 그것이 다 아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철이 없어서....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문제는 자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부모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 부모들의 자식사랑이 지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서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사랑을 공부하고 훈련받아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은 오래 참아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으시는 부모 여러분, 여러분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잘 참으십니까? 사랑은 하는데 잘 참지는 못하십니까? 사랑한다면 참는 것을 연습하고 훈련해야만 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으시는 부모 여러분, 여러분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늘 예의 있게 행동하십니까? 혹시 자식이라고 무시하고 깔보고 함부로 명령하시지 않으십니까? 저도 부모이지만, 저는 무례한 자녀들보다는 무례한 부모들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부모가 자식에게 무례하다는 말 자체를 이해 못하는 부모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자식을 사랑하신다면 자식에 대한 예의를 공부하고 훈련해야만 합니다. 아이를 인격으로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연습부터 하셔야 할 겁니다.

그래도 자식은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것 중에 몇 가지만 주의해서 훈련하고 연습하면 금방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주는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만 사랑해서는 삶이 행복해 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해야만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당연히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말씀하시는 15가지를 다 훈련하고 연습해야만 합니다. ‘오래 참음’, ‘온유함’. ‘시기하지 않음’, ‘자랑하지 않음’, ‘교만하지 않음’, ‘무례히 행치 않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음’, ‘성내지 않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함’, ‘진리와 함께 기뻐함’, ‘모든 것을 참음’, ‘모든 것을 믿음’, ‘모든 것을 바람’, ‘모든 것을 견딤’을 연습하고 훈련해야만 합니다.

가능할까요?

우리가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하고 사는 까닭은 그것이 불가능해서일까요 아니면 아예 도전도 하지 않아서일까요? 문득 어려서 배웠던 시조 하나가 생각이 납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르리 없건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하더라.”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라고 말씀하심은 우리가 오래 참을 수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례히 행하지 말아라 말씀하심은 그것이 쉽지는 않아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능력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젊어서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니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비겁한 사람이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하는 일에서 성공하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힘이 있고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지혜가 가져다주는 만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이 들어서도 그 지혜가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용기가 가져다 주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끝까지 비겁한 사람이 되지 않고 용기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승리와 성공, 힘과 강함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것은 그만 내려놓고 싶습니다. 늙어서까지 그것에 매여 사는 것은 별로 모양이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긴 세월을 산 것은 아니지만 나름 짧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를 가장 행복하게 한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이 들어가면서 집중해야 할 것이 바로 그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사랑받을 때 행복했습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 먼저 주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사랑을 주고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사랑은 대부분 주면 받습니다. 부족하지만 사랑을 주어보니 사랑은 받을 때도 행복하지만 그냥 줄때만도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참 가장 훈련이 안 된 부분입니다. 이제 은퇴를 몇 년 앞두고, 모든 것을 다 놓고 떠나는 때를 위하여 사랑에 투자하고 공부해야겠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오래 참음’을 연습하고, ‘온유함’을 연습하고. ‘시기하지 않음’을 공부하고, ‘자랑하지 않음’을 훈련하고, ‘교만하지 않음’을 연습하고, ‘무례히 행치 않음’을 연습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음’을 연습하고, ‘성내지 않음’을 연습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을 연습하고,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함’을 연습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함’을 연습하고, ‘모든 것을 참음’을 연습하고, ‘모든 것을 믿음’을 연습하고, ‘모든 것을 바람’을 연습하고, ‘모든 것을 견딤’을 연습하고 훈련해야겠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서.

거의 매일 페이스 북에 글을 씁니다. 글을 쓸 때마다 끝에 ‘굿모닝’을 씁니다. 지난 주 어느 날은 글을 올리고 끝에 ‘굿모닝’을 쓰지 못했습니다.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지만, 핑계도 할 수 있지만 깊이 생각해 보니 결국 ‘서툴고 성숙하지 못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행복을 위하여, 언제나 매일 매일 아침이 굿모닝이 될 수 있기를 위하여 사랑을 훈련하고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예수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며 좀 더 곱게 늙어가야하겠습니다. 끝까지 행복을 누리며 구원의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이 복을 함께 누리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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