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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공에서 오는 영적 침체 (왕상 19:1-8, 롬 8: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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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에서 오는 영적 침체 (왕상 19:1-8, 롬 8:26-28)
  

영적 침체는 참 무서운 것입니다. 영적 침체는 탈진을 부릅니다. 의지가 약화되어 주어진 현실을 더 무섭고 크게 보이게 합니다. 이 영적 침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모세의 영적 침체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엘리야의 영적 침체를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다. 기원전 9세기 경 북왕국에서 아합왕 시대에 활동하였던 예언자입니다. 아합왕은 두로왕 엘 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였습니다. 당시 두로의 수호신은 바알입니다. 

이세벨의 아버지가 바알신의 제사장이기도 합니다. 그 딸이 이스라엘 왕 아합과 결혼하면서 이스라엘 온 나라에 바알신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아합왕은 이세벨에게 사마리아에 바알 신당까지 지어 선물을 한 사람입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면서 우상숭배의 앞잡이인 아합을 질타하고 경고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일화가 많은 사람입니다. 

우상숭배로 이스라엘에 3년간 가뭄을 예고(왕상 17절)하였고 3년 후 가뭄의 끝을 예고(왕상 18절)하고 기도하여 비가 오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주권이 바알에게 있지 않다 함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제일 유명한 사건은 바알와 아세라 선지자 850인과 혼자 싸워 이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갈멜산의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엘리야는 대승을 거둡니다. 엘리야의 인생 중에서 하이라이트는 이 갈멜산전투입니다. 

대승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갈멜산 위에서 대결하자고 신청합니다.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 850명과 혼자서 싸우는 대결입니다. 제단위에 놓여진 제물을 태우므로 진검 승부를 하자는 대결신청이었습니다. 불이 내려 제물을 태우는 신이 진짜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지켜보고 있습니다. 먼저 바알신 제사장 850명이 제단에 제물을 놓고 불이 내리기를 위하여 하루 종일 주문을 외웠습니다. 

나중에는 자기 몸을 상하면서까지 주술을 외웠다고 했습니다. 헛수고였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기다려도 아무 조짐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지쳐갈 때 엘리야가 나서서 제단 위에 제물을 드립니다. 그리고 제단 주위와 단 주위에 물을 부으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하는 순간 불이 내려 제물들과 주위에 흘러 넘쳤던 물까지 다 태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알 선지자 850명을 죽입니다. 1:850명의 대결은 그렇게 백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보기 좋게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아주 통쾌한 승리입니다. 

엘리야도 모세처럼 능력의 사람입니다. 초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권위자였습니다.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목회자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신나게 사역을 할까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마 신나게 사역하는 것 보다 부작용이 더 클 것입니다. 지금처럼 하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다우니까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가끔 복권이 당첨되면 어떨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100억은 그만두고 10억짜리라도 당첨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권이 당첨되는 상상을 합니다. “당첨되면 우선 11조 1억을 드리고...” 이런 생각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첨되면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아이가 100만원만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면 11조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그렇게 의심되면 먼저 11조를 떼고 90만원만 주세요.”하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은 허황된 꿈을 꾸는 존재입니다. 최대의 미끼는 이 허황됨입니다. 아담 과 하와도 이 허황됨 때문에 넘어졌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렇게 넘어졌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횡재에 넘어가고 고수익에 유혹받아 속아 넘어가는 것도 모두 이 허황됨의 미끼 때문입니다. 복권이 당첨되지 않는 것이 훨씬 행복한 일입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어떤 사람이 복권이 당첨되자 순간 하던 일이 시시하게 생각되어 일을 때려 치고 새 사업을 시작하다가 실패하고 탕진하고 결국 이혼하여 살다가 자살해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뿐 아니고 외국 사례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가장 좋은 삶입니다. 가진 것이 적은 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꿈이 있습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수고하고 땀도 흘립니다. 아직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가져보고자 수고도 하고 설렘도 가져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주신다 해도 사양해야 합니다. “나는 이대로가 좋습니다.”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평범한 삶이 가장 좋은 삶입니다. 

엘리야는 초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통쾌하게 승리하였습니다. 그날 모든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850:1 의 싸움에서 엘리야는 통쾌하게 이겼습니다. 이 전투가 갈멜산의 전투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기분이 상당히 업 되었습니다. 충천하였습니다. 이런 충천함이 오래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승리 후에는 침체가 기다리고 있다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서 있는 사람은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침체 빠짐

승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간은 늘 한계가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승리감에 도취해 흥분하고 있을 때 이세벨로부터 통지가 왔습니다. 왕상 19장2절에서 이세벨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이 맘 때가 되면 너도 그들 중 하나 처럼 처형하겠다!” 이세벨은 왕후입니다. 바알선지자의 우두머리입니다. 그가 갈멜산 전투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전갈이 온 것입니다. 이 여인은 왕인 아합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던 여인입니다. 그 여인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통지하기를 “내일 너는 죽을 줄 알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말 그대로 할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런 통지가 올 줄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방심하고 있다가 그만 허를 찔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통지를 받고 엘리야는 그 즉시 도망을 갑니다. 어제 바알 선지자 850명과 싸우던 그 기개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순간 엘리야는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북쪽 최남단 브엘세바까지 150km를 도주합니다. 그곳에 사환을 놔두고 자신은 다시 그 브엘세바에서 광야로 하룻길 쯤 깊숙이 더 들어갑니다. 당시 하루 길은 32km를 말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광야 깊은 곳에 숨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광야 한복판에 서 있는 로뎀나무 그늘에 앉아 “여호와여 이제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4).”하고 한탄을 합니다. 로뎀나무는 광야에서 3-4m 자라 새들과 짐승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입니다. 엘리야는 그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죽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모습과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어제의 그 기개와 권위 그리고 당당함과 호령하는 모습 등 그 위용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늘 무력하게 실패의 자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어제의 엘리야가 아닙니다. 오늘은 완전히 실패자요 낙오자요 패배자가 되어 침체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공과 승리는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오래 도취해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주일에 모세의 탈진을 보았습니다. 모세의 영적 침체는 과로에서 시작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과로나 격무는 영적 메마름을 촉발시킵니다. 오늘 엘리야의 영적 침체는 승리감의 도취에서 왔습니다. 승리감에 빠져 흥분하고 있을 때 이세벨로부터 허를 찔렸습니다. 군사전술학에서 이 허를 찔리는 것을 가장 무섭게 여깁니다.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때가 이런 승리 직후입니다. 승리 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방심하게 되기 쉽습니다. 모두 허리띠를 풀고 술을 마시고 떠들썩하게 들떠 있기 마련입니다. 

그때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지 점령 후 한동안 긴장하면서 사주 경계를 계속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긴장을 풀면 허를 찔리게 됩니다. 엘리야가 그런 경우입니다. 성공은 좋은 것인데 오래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무너지기가 쉽습니다. 1등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1등을 유지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리고 그 1등을 빼앗기면 상실감이 큽니다. 부요는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유지가 힘듭니다. 그리고 잃으면 상실감이 큽니다. 정상에 오르면 참 좋습니다. 보람과 희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도전이 많습니다. 그리고 잃으면 상실이 큽니다.

그때 사람들은 우울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겪는 우울증은 대부분 이 상실감에서 옵니다. 스타들이나 배우들이 그 인기도를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니까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안티들의 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우울증에 빠집니다. 우울증이 오면 사람들은 혼자 있으려고 합니다. 죽고 싶은 마음에 시달리게 됩니다. 버림받은 기분입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오늘 엘리야는 더 이상 어제의 영웅이 아닙니다. 

오늘은 완전히 패자가 되어 있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열왕기상18장은 엘리야의 대승장면을 보여줍니다. 영웅 모습입니다. 박수를 받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라고 호령합니다. 그런데 19장에 가면 아주 초라한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죽여 주소서”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큰소리 칠 자격이 없습니다. 언제나 이 침체에 대비해야 합니다. 늘 겸허하고 겸비하고 대비하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누가 모세가 실패자가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습니까. 누가 엘리야가 실패자가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습니까. 

극복

결국 엘리야는 그 위기를 극복합니다. 하나님이 3가지 방법으로 극복 시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는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떡과 물을 공급(19장5절)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어루만지며 격려하시고 위로하셨습니다. 위로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어른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실패자도 성공자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부요한 사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유대인의 격언에 가장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제일 먼저 찾아와 위로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포기하면 포기하였지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로마서8장26절을 보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또 하나는 “자아발견”입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너는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고 하십니다. 산은 중요한 곳입니다. 산에 오르면 자신을 살펴보게 됩니다. 조용히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를 듣게 합니다. 그때 엘리야에게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왜 여기 있느냐” 그 말은 “너는 누구냐”는 말입니다. “네 현주소가 어디냐”는 말입니다. 즉 “네가 왜 이러고 있느냐” 는 말입니다. “어제의 네 모습과 오늘의 네 모습을 비교해 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진면목을 보려면 실패했을 때 보아야 합니다. 민낯일 때 보아야 합니다. 

그때 아주 보잘것없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순간입니다. 꾸미고 칠하면 내 얼굴이 포장됩니다. 내 진면목이 사라져 없어집니다. 어제 당당하던 엘리야의 모습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에 포장된 모습이었습니다. 화장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진면목을 보게 하셨습니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서 서라” 그 말은 하나님이 엘리야를 리콜하셨다는 말입니다. 자동차만 리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침체에 빠진 신앙인도 사역자들도 하나님은 때로 산으로 리콜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리콜하지 않으셨으면 엘리야의 인생은 그 로뎀나무 아래에서 끝났을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산으로 불러내 리콜하셨기에 엘리야가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사역하다가 벽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관계의 악화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벽에 부딪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능력의 한계에서 목회자들이 벽에 부딪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목회자들을 리콜하십니다. 산으로 부르십니다. 금식하게 하십니다. 엘리야처럼 고민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과정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산으로 찾아오십니다. 오셔서 어루만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산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신앙인들이 산으로 가는 것은 리콜받아서 가는 것입니다. 산에 가 보면 리콜받아 온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와서 금식하고 울며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분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은 리콜 받기 전에 스스로 올라가서 점검받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자동차도 고장 나서 견인차를 부르고 정비소로 고치러 가는 것 보다 사전에 점검 받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일입니다. 

또 하나는 “회복”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리콜을 통해서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재신임하시고 사명을 다시 부여하십니다. 먼저 이웃 나라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을 삼으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통치자인 왕을 바꾸고 예후장군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후계자를 삼으라(왕상 19장15-16절)고 하셨습니다. 

그 시대는 영적으로 타락된 시대였습니다. 새로운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시대에 새로운 영적 지도자들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심약해진 엘리야에게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때 당시 엘리야는 바알과 싸우는 사람은 자기 혼자뿐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외로웠고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의 눈을 뜨게 해서 바알에게 굴복하지 않은 7천명의 동역자를 보게(19장18절)하셨습니다.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과 나 혼자 일한다는 이 생각이 사역자들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고 피곤하게 합니다. 모세처럼 엘리야도 나 혼자 일한다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나 혼자 일하다가 나 혼자 위험에 처해 있다고 짜증을 부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보라 이 땅에는 너 말고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때 묻지 않은 순전한 신앙인이 7천명이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엘리야는 벌떡 일어납니다. 한편 창피하고 또 한편 부끄러워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동안 몰라서 짜증을 부렸습니다. 바알과 싸운 것은 나 혼자뿐 인줄 알고 오해했고 짜증을 부렸습니다. 또 한편 나를 버리지 않고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고마움에서 그는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내게 또 다시 사명을 부여하신 것에 감격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그 길로 엘리사를 찾아가 선지자로 세웠습니다. 엘리야는 성공스럽게 동역자를 세우고 무사하게 자기 사역을 끝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배려하셔서 죽지 않은 채 불러가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영적으로 충만해서 승리하기를 기대합니다. 성공이나 승리는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공 직후가 위험한 시간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야도 그때 넘어졌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가져야 할 마음은 하나님은 나의 사역의 실패나 삶에 대해서 더 걱정하고 염려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8장을 보면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셨고 “성령이 탄식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힘을 입으십시오. 그때 여러분들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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