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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붙잡아야 할 비전 (요 2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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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붙잡아야 할 비전 (요 21:15-19)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했던 사람들은 언제나 형통한 삶을 살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을 가까이 했던 요셉을 보십시오.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함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가까이, 곁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통'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번영케 하다, 번성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공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성공하는 자가 되었더라.  그가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 비결을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다.

요셉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형통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가는 곳마다, 그가 하는 일들마다 번성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만 번성했던 것이 아니라 요셉이 머물고 있었던 보디발의 집과 애굽이 번성했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그 삶의 가시적인 현상을 보고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까이 했던 사람들이 누렸던 복된 삶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했던 사람은 그가 가는 곳마다 번성의 복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도 그랬고, 야곱이 가도 그랬습니다.  모세가 가도 번성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번성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번영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멀찍이 떨어지지 마십시오.  베드로가 시험에 들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일들이, 그리고 우리가 섬기고 세워가야 하는 우리 교회가 번성함을 누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래된 어느 영화에 나왔던 한 부분의 장면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나치 하에 있었든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이면서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가 그것이 탄로가 났습니다.  그러자 그 계획을 수립했던 동지들이 모여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할 때에 한 청년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동지들, 모든 것은 끝났소.  이제는 자폭해 버립시다."
그때 다른 청년이 일어나더니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아니요.  안 끝났소.  절대로 끝나지 않았소.  우리가 꿈을 버리는 날, 그때 비로소 모든 것은 끝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망친 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그에게서 꿈을 잃어버릴 때 그의 인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비전을 상실했을 때 그의 인생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버려진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는 현실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의 어느 날엔가 이루어질 비전을 품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폭풍이 일어나고 번개가 치는 그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폭풍 너머에 있을 하나님이 준비하고 예비하신 그 평온의 깊은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꿈과 비전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은 비전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꿈과 비전을 가진 자의 생명을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꿈과 비전을 가진 자를 인도하십니다.  꿈과 비전은 나를 사명의 자리에로 이끌어갑니다.  우리가 꿈과 비전을 붙잡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꿈이 없는 사람은 방자히 행한다고 했습니다.  규모 없이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꿈과 비전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사명자로 다시 일어서십시오.

인간은 이익의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쾌락의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사명의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정열도, 내 재물도, 내 시간도 사명이 없으면 하찮은 것들이 들어와서 나를 다 짓밟아버리고 맙니다.  더러운 악의 영들이 판을 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내 사명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사명이라는 것은 삶의 방향감각을 나타내는 나침반과 같은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붙잡고 일을 하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나는 사명을 붙잡고,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붙잡은 나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내가 알고 있는 그것보다 더 높은 세계가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꿈과 비전을 붙잡고 사명자로 일어설 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함께 봉독한 본문에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다시 재기하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떠나갔던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히 인생의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실패보다 더 불행한 것은 그가 꿈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정말 힘들게 했던 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길이 아니라 그가 비전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포함되어 있는 요한복음 21장 3절에 보면 베드로는 이렇게 푸념하면서 독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으로 베드로를 만나주셨을 때, 그리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주님의 이 말씀 앞에 베드로는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의 변화, 그것은 분명히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하고 떠나갔던 베드로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시간은 거꾸로,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베드로의 이야기의 끝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인생이 끝났다면 베드로의 인생은 분명히 실패자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본문은 베드로의 좌절과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재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베드로가 재기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 옛날의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로 돌아와서 다시금 고기를 잡으러 가는 순간 베드로는 스스로를 포기했습니다.  그의 미래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를 포기한 베드로였지만 그 베드로를 포기하지 못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베드로가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했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스스로를 포기한 베드로를 다시 일어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다시 만난 베드로는 다시 환상을 붙잡습니다.  비전을 붙잡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는 훗날 위대한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운데 여기까지 살아오면서 내 꿈을 잃어버렸고, 내 삶이 좌절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가 다시금 일어나는 은혜로운 삶의 현장에서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를 포기한 베드로를 다시 일어나게 해 주셨던 주님, 그 주님께서는 오늘 내 자신은 나를 포기했을는지 몰라도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일어나야 합니다.  꿈을 가지셔야 합니다.  비전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향한 꿈을 가지십시오.  포기했던 내 가정을 향한 꿈을 가지십시오.  내가 섬기고 세워야 할 내 교회를 향한 꿈을 가지십시오.  그 꿈과 함께 하나님은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다시 한 번 우리의 비전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비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비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실패한 사람에게 있어서 재기의 의욕을 빼앗는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면 그것은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냉소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혹은 무관심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더러는 관심을 갖지만 그러나 그것이 싸늘한 조롱과 냉소의 시선일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기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실패했지만, 아무리 좌절했지만 내 곁에 나를 붙드는 따뜻한 사랑의 시선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자기의 최대의 사랑은 주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실패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주님마저도 자신을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나 같은 놈을 우리 주님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실꺼야, 주님은 나 같은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실꺼야?"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면 베드로에게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첫째로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도망치고 있는 베드로를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주님께서는 그 베드로를 향해서 변함없는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말로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에게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 배신한 베드로, 베드로의 타락 이후에 최초의 만남의 장면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주님은 바닷가에서 생선요리를 만들어놓고 자기를 저주하면서 부인했던 어리석은 제자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생선요리의 향연을 준비하고 제자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만났던 예수님의 첫마디 말씀이 무엇입니까?

제가 만약에 예수님이라면 나를 배신한 제자를 만났을 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 같습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그렇지 않다면 "야! 너 무슨 이유로 나를 배신했니?  내가 지난 3년 동안 너를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를 배신하다니?  그럴 수 있는 거니?"  최소한 그렇게 한 마디 정도는 따져 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첫 만남은 분명히 아주 어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첫 마디 말씀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를 향한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딱 한 마디 하십니다.  "조반 먹어라."  "밥 먹어라. 춥지? 배고프지? 식사해."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조반 후에 …"

본문 15절에 보면,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대화가 시작됩니다.  만약에 식사가 끝나기 전에 "너,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그랬으면 베드로는 분명히 소화불량에 걸렸을 것입니다.  생선 가시가 목에 턱 걸렸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식사를 하는 동안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기다리셨습니다.  조반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아직도 사랑하느냐?"  나를 아직도 사랑하니?  이 말속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너와 더불어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몇 번 물으셨습니까?  베드로는 세 자리 숫자에 대해서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요?  그가 세 번 주님을 부인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세 번씩 사랑을 확인하시는 주님과 대화를 하면서 베드로의 얼어붙은 가슴은 녹아 내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 앞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주님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이 확신, 이것은 베드로가 일어날 수 있었던 동기였습니다.

세상이 나를 버려도, 사람이 나를 버려도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 보십시오.  그 사랑을 다시 확인해 보십시오.  만져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나는, 우리는 다시금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나를 강권하시는 주님의 사랑 앞에 서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에 의지해서 다시 일어서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한 번 환상을 붙들고 비전을 보고 일어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비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나를 향한 주님의 기대를 확인해야만 합니다.

매우 일반적인 상식으로 말하자면 한 번 기대를 져버린 내 제자, 나를 배신하고 떠나간 제자에게 더 이상 기대를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제자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향한 변함없는 기대를 확인시켜 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물으신 후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새로운 과제를 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내 어린양을 먹여달라고….

예수님께서 어부였던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주셨던 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이것을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전도자의 사명입니다.  사람을 낚는다, 이것은 전도자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내 어린양을 먹여달라, 키워달라는 것은 목자의 사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자의 사명과 목자의 사명 중에 어느 것이 더 힘들겠습니까?  어느 것이 더 어렵겠습니까?

전도 해 보셨습니까?  전도한 사람을 키우고 양육해 보셨습니까?  그러면 쉽게 이야기를 바꾸어 말하겠습니다.  여자분들이 대답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어렸습니까?  키우는 것이 어렵습니까?  저는 경험이 없지만 여자분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어보면 배 속에 집어넣고 다닐 때가 더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키우는 것이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훨씬 더 어려운 과제, 이제 내 어린양을 먹이고 키워 가는 목자의 사명을 주십니다.

처음 그를 부르셨을 때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명을 주시고 있는 이 광경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패 때문에 우리에게서 기대를 철회하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을 가리켜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어디 두 번만 주시겠습니까?  한 번의 실패로 "나는 너하고 일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또 기회를 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실패를 통해서 훌륭한 교훈을 배웠다고 판단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에게 더 높은 과제와 더 높은 소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실패했다고 우리를 버리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높은 계획과 더 높은 소명과 더 높은 비전을 준비하셨다면 이제 그 주님 앞에 서서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인생의 길에 있어서 그 주님의 기대를 확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 비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꿈과 비전이 회복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보람찬 미래가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붙잡게 될 그 비전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오늘의 중요한 질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에게 마지막 중요한 명령이 주어집니다.  19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나를 따르라는 이 명령은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만났을 때 주셨던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주시면서, 다시 새로운 비전을 보게 하시면서 또 다시 명령을 주십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그러나 따라갈 때 아마 주님은 다른 각오를 부탁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나를 따라오라는 것은 주님이 처음에만, 그리고 마지막에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시시때때로 주님은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흔들릴 때마다 주님은 그 말씀을 지금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다른 길, 다른 사람을 보지 말고 나만 따라와."

베드로의 실패 직전에도 주님은 단단히 각오하고 기도하면서 따라오라고, 나를 따라오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넘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기억하십니까?  그때 베드로는 아주 당당하게 주님께 말합니다.
"주님,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저는 주님을 위해서 옥에도 가고, 죽을 준비도 다 되어 있습니다."
아주 자신 만만하게 당당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 넘어졌습니다.  철없던 베드로, 아직도 자기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달라진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아마 실패 이전의 베드로라면 어떻게 대답을 했겠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했을 때, "주님,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라고 당당하게 큰 소리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떤 톤으로 말했을까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대답했을까요?  아니면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쩔쩔 매면서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잖아요"라고 말했을까요?  아마 틀림없이 후자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겸손히 무릎을 끓고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겸손한 순종 앞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생애에 마지막에 펼쳐질 광경을 보여주십니다.  본문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여기에는 '젊어서는'이라는 단어와 '늙어서는'이라는 두 가지 대조적인 단어가 있습니다.  젊어서는 네 마음대로 다녔다.  네 충동대로, 네 본능대로, 네 느낌대로 네 마음대로 살았지, 마음대로 살다가 마음대로 넘어지고….  그러나 늙어서는 네 마음대로 살수 없도록 내가 네 인생 속에 들어가 너를 꽉 붙잡아 주마, 내가 억지로라도 붙잡아 주마, 그리고 네 인생의 마지막이 승리가 되도록 간섭할 것이다.

19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아시고 베드로의 그 마지막이 영광이고 승리이기 위해서 였다고 했습니다.  처음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제가 인생을 끝내는 순간 그 마지막의 결산이 영광이고 승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부터 강권적으로 간섭하마.  너, 그런 나에게 순종을 결단하고 나를 따라 올 수 있니?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런 각오로 나를 따라올 수가 있느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각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기꺼이 겸손히 주님의 능력을 의뢰하면서 따라가겠다는 이 각오와 결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쓰셨습니다.  놀랍게 쓰셨습니다.  잠시 후 오순절에 대 부흥운동이 폭발했을 때 그 부흥운동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이 쓰신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이제는 피상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베드로가 일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연약함을 알았기에 엎드려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도로서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다가 시내산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들을 업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그 독수리와 같은 하나님은 우리를 또 절벽 아래로 밀어뜨리는 일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내 곁에 다가오시면서 너는 날 수가 있다고, 날아야 한다고,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너를 도와준다고….

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날개짓을 새롭게 할 수가 있다면 우리의 가정과 우리 교회의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과 위대한 도전의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고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날개를 펴십시오.  하나님을 찬양하며 힘차게 오르십시오.  비전의 날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영의 귀재이자 연매출 1천억 달러가 넘는 세계 최고의 기업 GE사의 '잭 웰치'는 비전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비전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미래를 키운다."

저는 이 말에 공감합니다.  그렇습니다.
"비전이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이 내일의 내 가정과 우리 언양 영신교회를 키웁니다."

그렇다면 비전이 무엇입니까?
째즈 음악가이며 작곡가이고 밴드 리더였던 '듀크 앨링톤'은 누군가가 리듬의 정의를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리듬을 가지고 있다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고, 리듬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어떤 정의도 도움이 안될 거요."

비전이란 무엇입니까?
엘링톤의 말을 인용해 보면 "만일 당신이 비전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고,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내 가정과, 내 사업과, 직장과, 사랑하는 내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비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분에게 "당신의 비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그는 분명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남은 인생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인식하십시오.  그리고 그 할 일을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래서 내일의 내 가정과, 일들과 내가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를 향한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힘차게 날개짓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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