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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자유를 주신 것은 (갈 5: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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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주신 것은 (갈라디아서 5:1, 13-15)

8.15 해방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자유와 해방의 고마움과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봅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사전에서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 또는 그런 상태’라 정의합니다.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간섭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에게 민족의 자주권을 빼앗겼을 때 일본의 간섭과 억압에 눌려 자유롭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말과 글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나가야 했던 슬픈 날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말로 예배를 드리고, 해외에 나와 공부를 하고 사업을 하며, 가슴에 대한민국 국기를 달고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여 국위를 선양하는 것은 자유국민으로서 누리는 당당한 권리입니다.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을 놓고 일본팀과 겨루어 이긴 축구경기는 선수 개인의 메달 획득이나 병역 면제라는 목표를 이룬 것만이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싸위 이긴 멋진 시합이었습니다.   내 나라와 조국의 이름을 걸고 열심히 뛰어 승리한 우리 젊은이들의 당당하고 자유로운 모습은 8.15 해방 67주년의 기쁨을 몇 갑절 더 크게 해준 선물이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우리 국민은 내 나라의 법이 아닌 일본의 법에 따라 원치 않는 굴종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나라가 주권을 되찾고 자유를 회복하였을 때 내 나라의 법을 세우고 모든 국민들은 그 법의 보호 아래  자주국민로서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갈라디아서에 자유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대한민국 땅에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 해방 후 6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날 일본의 법과 관습 아래 살고 있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곁에서 보는 사람이 속이 터지고 답답해 견디지 못할겁니다.  갈라디아에 살고 있던 어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구약의 율법에 매여 하나님의 자녀에 주신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듣고 개종한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구약의 율법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육체의 할례를 강요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이런 잘못된 가르침에 대하여 마음에 불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자유시민이 된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의 종으로 살지 말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감사함으로 누리라고 강한 어조로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 지켜야 할 법을 주셨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하며 예배드려야 할 것인지 가르치시기 위해 제사법을 주셨고,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세워 살아갈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시민법을 주셨습니다.   누구도 이 규범을 지키는 일로부터 면제되거나 초월할 수 없었습니다.   

애굽의 압제와 학대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장되었습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 응분의 형벌을 받게 하는 구속력을 가졌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언제나 무거웠고 그 누구도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의로움에 다다를 사람이 없었으며 모든 사람은 그 율법 아래 매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사람에게 해롭고 무익한 것이었을까요?   거울을 보며 얼굴에 묻은 더러움을 발견하는 것처럼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드러났고, 사람이 그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지 못함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구원자 앞으로 나아오게 합니다.   율법이 하는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갈3:19).   약속하신 아들이 세상에 오셨고 그 아들이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에 정한 모든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값을 모두 치르셨으니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고소하여 죽음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선언한 말씀처럼 약속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더 이상 율법에 매인 사람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의 법,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또 다시 과거로 돌아감은 어찜이냐?   내가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며 또 다시 종의 멍에를 지려고 하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들고 있구나.  그러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라 강력하게 권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멍에 아래 신음하던 백성들에게‘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 29) 하셨습니다.   

전에 소개드렸던 <복음서에 나타난 유대문화적 배경>이라는 책에 나온 내용을 오늘도 소개합니다.   성경시대의 유대인들은 아이가 열두살이 되었을 때 성인식(바르 미츠바)을 합니다.   바르 미츠바라는 말은 ‘율법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때부터는 스스로 토라를 공부할 수 있으며, 토라의 율법을 두 어깨에 메고 토라가 규정하는 모든 율법들을 스스로 준수하며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율법의 아들이 된 때부터 토라의 멍에를 두 어깨 위에 메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 율법이라는 것은 유대인의 모든 삶과 생활에 있어 마치 족쇄와 같습니다.  율법이 그들의 모든 삶을 규정하고, 시간을 규정하며, 행동을 규정합니다.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에 가보면 수많은 종교인들, 즉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율법의 멍에와 무게가 무거워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스스로 율법의 아들임을 파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율법의 아들이 되면 언제까지 그 멍에를 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죽을 때까지 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죽어서도 율법의 멍에를 벗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몸, 즉 살이 흙으로 지어졌고 흙은 부정하므로 살이 더 썩을 때까지는 율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대 유대인들은 시신을 임시로 묻어 살이 다 썩은 후 뼈만 거두어 장례를 다시 치르는 2차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은 이렇게 지독한 얽매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내 멍에는 쉽고 내 가벼움이라’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은 곧 토라와 같고, 그 말씀에 의해서 지워지는 짐은 토라의 율법보다 더 가볍고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넓게 열린 길과 같습니다.

율법의 끊임없는 고발과 정죄함에 억눌린 사람의 마음에는 진정한 쉼이 없습니다.   오늘은 아무 실수와 허물이 없이 무사히 하루를 마쳤다 할지라도 내일 어떤 일이 내 앞에 벌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말과 행동으로 아무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자부하지만 마음으로 저지른 수많은 죄악들은 어떻게 씻을 수 있을지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갖은 노력으로 율법에 정한 규칙을 지켜 사람들에게 의로운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지만 언제 어떤 법을 어겨 죄인으로 낙인 찍히고 멸시를 받을지 두려워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아흔 아홉 가지 계명을 어김없이 지켰지만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똑같이 죄인이 되어야 하는 율법의 기준은 냉혹하며 죄인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던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던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안식일에 못할 일을 하고 있다고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이 무슨 나쁜 짓이나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율법이 하는 일이 이런 것입니다.   사람을 정죄하고 죄책감에 빠지게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신 뜻이 무엇인지 너희가 알았다면 이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12:7) 하시며 율법의 문자에만 매여 그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고 배고파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규칙은 달달 외우고 있지만 안식일에 자비를 베풀어야 참된 제사가 이루어진다는 율법의 참 정신은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면서 조금이라도 실수한 사람을 발견하면 당장에 손가락질하고 정죄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누구보다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 마음에 무슨 안식이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은 이런 식으로 무거운 멍에와 짐이 되어버렸고 그것들을 자기 힘으로 지고 가느라 몸도 마음도 쉼을 얻지 못하고 피곤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막2:27) 하시며 제자들의 피곤한 마음과 배고픔을 어루만지십니다.   이런 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함입니다.   율법을 무시하고 파괴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제정자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율법의 참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심으로 어깨에 메인 무거운 멍에를 벗겨주시고 짐을 가볍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자유함을 주시려고 사람들에게 오셨으며 누구든지 예수께로 가면 쉼을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이렇게 무거운 율법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 할만큼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의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2장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십자가는 구속, 속박의 상징입니다.  손과 발이 못에 박힌 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고통 속에 꼼짝할 수 없이 묶어두는 매임이 십자가 형틀입니다.   율법이 규정한 죄인이 당하는 형벌은 이처럼 처참하고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스스로 얽매임을 당하셨고 대신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바울은 비로소 율법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된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대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멍에와 짐을 받았으니 곧 주님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러므로 율법의 멍에를 지고 내 열심과 내 의로움을 자랑하며 살았던 과거의 나는 죽었고 이제는 내 안에 예수께서 살아계십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나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전에는 율법에 붙들린 종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복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전에 예수를 알지 못했던 시절 청년 사울은 율법의 의를 이루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음에 넘기우는 일에 앞장을 섰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최선의 길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신 멍에,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된 바울은 예수님과 그 복음을 위해 스스로 사슬에 매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 힘으로 율법을 따르던 때 나의 의가 펄펄 살아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사슬로 묶어 옥에 넘기는 자유인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쉼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살 때 그의 육체는 사슬에 매이고 매를 맞으며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그의 영혼은 한없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것처럼, 바울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도 평안을 누리며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나는 기쁨으로 맞이하리라 말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내가 육신을 떠나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니 나는 이것을 더욱 좋아하지만 여러분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여러분을 다시 만나는 것 또한 여러분에게 유익한 줄 압니다’(빌1:20-25)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있지만 죽음이 그를 억누르거나 두렵게 하지 못했습니다.    가난했지만 언제나 부요한 마음으로 살았고 비천할 때나 풍부할 때나 배부르며 배고플 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던 바울은 예수님이 주신 멍에와 짐을 지고 주님과 함께 길을 걸었던 자유인이었습니다.   자신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이 주신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원했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이 누린 자유함이 나의 자유함이 되기 바랍니다.   나의 신앙생활이 율법적인 규칙에 억지로 매임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자유함을 누리는 기쁨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림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운 섬김과 엎드림이 되기 바랍니다.  예배와 기도와 성경읽기와 봉사와 섬김이 멍에와 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함의 즐거운 열매가 되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고 하지 말라는 문자적인 규율이 부담스러워 예수 믿는 것이 무거운 멍에가 되지 않기 바랍니다.   나를 자유하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지 다시금 종의 멍에를 메라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벗겨주신 종의 멍에를 다시 지려고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주 안에서 자유인으로 삽시다.   주님이 주신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습니다.  쉬운 멍에, 가벼운 짐이 가능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살며 자유를 누릴 때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13절-15절 말씀을 중심으로 더 말씀드리기로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목적이 바로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감사함으로 누리며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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