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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되어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여!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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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되어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여! (마 5:7)
  
어느 도시 광장에 있는 높은 기둥 위에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왕자의 온몸은 순금으로 덮여 있었고, 두 눈에는 푸른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빨간 루비 보석이 박힌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동상을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쉴 곳을 찾다가, 이 행복한 왕자 동상 발밑에 내려앉았습니다. 제비가 막 잠들려 할 때 커다란 물방울이 제비의 몸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행복한 왕자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었습니다. 제비가 ‘왜 눈물을 흘리느냐’며 묻자, 행복한 왕자는 대답했습니다. “저기 멀리 떨어진 좁은 골목길에 삯바느질을 하며 사는 가난한 여인이 살고 있단다. 

지금 아이가 몹시 아파 열이 나는데, 엄마는 너무 가난해서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그러니 네가 내 칼자루에 박힌 루비를 뽑아 그 여인에게 가져다주면 좋겠구나.” 제비는 멀리 이집트에서 친구들이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기에 오늘밤 잠깐 눈을 붙이고 빨리 떠나야 한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왕자의 얼굴이 너무 슬퍼보여서 제비는 ‘당신을 위해서 오늘 하룻밤만 여기서 지내면서 당신의 심부름꾼이 되겠노라’고 대답하고는, 왕자의 부탁대로 루비를 뽑아 물고서 그 여인의 집에 살며시 가져다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제비가 떠나려 하자 왕자는 다시 제비에게 부탁했습니다. ‘조그마한 다락방에서 추위에 떨며 연극 대본을 쓰고 있는 한 남자에게 자신의 눈에 박힌 사파이어를 가져다주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비는 왕자의 심부름을 계속하게 됩니다. 어린 성냥팔이 소녀에게 나머지 한쪽 눈의 사파이어를 가져다주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왕자의 몸에 덮여 있는 순금 조각들을 하나씩 떼어다주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매서운 추위가 닥쳤지만 제비는 이집트로 떠나지 못하고 왕자 곁에서 왕자의 심부름을 계속했습니다. 왕자의 몸에서 순금 조각들이 다 떼어내진 후에는 그 아름답던 왕자의 동상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동상이 되고 말았고, 왕자 곁에서 심부름을 하던 제비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초라해진 왕자의 동상 아래서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초래해진 왕자의 동상을 더 이상 그곳에 방치해 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철거하여 용광로에 집어넣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왕자의 납으로 된 심장만은 뜨거운 불에도 녹지 않자, 사람들은 그것을 얼어 죽은 제비와 함께 쓰레기 더미에 내다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이 도시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두 개만 가져오라.’고 말씀하셨고, 천사는 납으로 만들어진 왕자의 심장과 죽은 제비를 하나님께로 가져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잘 골랐구나. 이 작은 새는 언제까지나 천국의 정원에서 노래하도록 하자. 그리고 이 ‘행복한 왕자’는 내 황금의 도시에서 영원히 내 이름을 찬양하도록 하여라!” 

이 이야기는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가 쓴 「행복한 왕자」라는 제목의 동화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가만있지 못하고 자기의 몸에 붙어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떼어준 왕자, 그래서 결국에는 볼품없는 모습만 남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볼품없는 그 왕자를 그 누구보다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안 그 왕자를 오스카 와일드는 ‘행복한 왕자’라고 불렀습니다. 왕자 곁에서 왕자의 심부름을 하던 제비 역시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갈 기회를 잃어버리고 행복한 왕자의 심부름을 하다가 추위에 얼어 죽었지만, 제비의 심장 역시 행복한 왕자처럼 따뜻했고 그가 못다 부른 노래는 하늘나라에서 부를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게 됩니다. 
  
세상은 이렇게 따뜻한 심장,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에 그래도 살맛이 나고, 그들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향하여 ‘너희가 복된 사람’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복되어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여!’ 

‘긍휼’이라는 말은 엄마가 뱃속의 아이에게 느끼는 애틋한 감정을 말합니다. 뱃속의 아이는 아직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엄마에게 붙어서 엄마의 영양분을 받아먹으며 자랄 뿐입니다. 때로는 엄마를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엄마가 입덧을 하게 만들기도 하고, 엄마의 영양분을 받아먹음으로 엄마가 빨리 배고픔을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 뱃속의 아이에게 ‘너 왜 그러느냐?’고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뱃속의 아이는 그런 존재려니 하고 받아들이며, 오히려 그 아이를 위해서 엄마가 얼마나 조심하는지 모릅니다. 혹 다치지나 않을까? 혹 영양분이 모자라지는 않을까? 그러면서 배속의 아이들에게 태교를 한다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책을 읽어주고 좋은 이야기를 해 줍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에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착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긍휼과 동정을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그 사람이 부족하든 못났든 그를 그대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반면 동정은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동정은 때로 교만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그보다 낫다, 그는 나보다 못났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생각의 기초에는 그를 어느 정도 업신여기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동정은 때로 교만한 마음에 깃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긍휼은 그렇지 않습니다. 긍휼은 다른 사람을 얕보거나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그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줍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가 나보다 약할 수 있고, 나보다 가진 것이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그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36-37절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이렇게 요약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해 주는데,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불쌍해서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는 사람들을 보시고서는 너무너무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긍휼히 여기셨다’는 말씀과 같은 단어입니다. 
  
신약성경 언어인 헬라어로 ‘긍휼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는 말은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내장’을 뜻하는 ‘스플랑크나’에서 온 말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영성신학자라고 하는 헨리 나우엔(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스플랑크나는 우리 몸의 내장을 말하는데,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긍휼에 대해 말하면서 내장이 움직였다고 말하는 것은 무언가 아주 깊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내장이 흔들리고 뒤틀리는 것 같은 아픔은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내장이 흔들릴 정도로 아픔을 느끼셨기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 언어인 히브리어로 ‘긍휼’이라는 말은 ‘라카밈’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의 자궁’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자궁이라고 표현할 만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그렇게 강렬한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이라는 말인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는 복음서에서만 12번 나오는데, 그 말 뒤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인성에 가셨습니다. 나인성에 도착했을 때 한 과부의 외동아들이 죽어 상여에 메워나가는 모습을 보십니다. 상여 뒤를 따라 가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너무 큰 슬픔에 통곡하며 상여 뒤를 따라가는 과부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그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 광야로 쉬러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몰려드는 그 무리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곳까지 따라온 사람 가운데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허기진 상태로 돌아가야 하는 무리들을 위해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마태복음 14장) 
  
마태복음 15장에서는 4000명이 되는 많은 무리가 몰려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그 모든 무리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찾아와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맹인들이 예수님을 귀찮게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꾸짖으면 쫓아버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을 만져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든 그를 보시고 내장이 흔들리고 뒤틀릴 정도로 아픔을 느끼셨다면, 반드시 기적을 일으켜 그 아픈 상황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보실 때 동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나무라지도 않으셨습니다. 나인성 과부가 울면서 아들의 상여 뒤를 따라가고 있을 때 ‘아들이 죽을 때까지 어머니가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고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살려 주셨습니다. 

병자를 만났을 때에도 ‘왜 이렇게 병이 깊도록 방치하였느냐?’고 따져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불쌍히 여기셨고, 고쳐주셨습니다. 먹을 것 하나 갖지 못하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도 ‘왜 그렇게 못났느냐’고, ‘왜 그렇게 가난에 찌들어 사느냐?’고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들을 고쳐주셨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긍휼은 그렇습니다. 그들이 어떤 모습이든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줍니다. 내 내장이 다 뒤틀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그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 줍니다. 그를 내 생각에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가 누려야 할 축복을 누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가 누리길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그것을 누릴 수 있게 해 줄 뿐입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에는 이기심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기심이 좀 더 강하고 어떤 사람은 이기심이 좀 적을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이 이기심을 갖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긍휼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그 이기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이기심을 가지고는 그가 누려야 할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신 주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채워져야 합니다. 그 주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있는 이기심을 몰아내고 내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게 해야 합니다. 내 얄팍한 동정심으로는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오늘날 하루 노동자 품삯을 10만원으로 잡는다면, 일만 달란트는 요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6조원이나 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정부의 1년 예산이 천 달란트가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는 당시 나라 예산의 10년 치에 해당합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빚을 갚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임금님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그 사람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당시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로 팔려가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갚지 못한다면 자신만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처자식까지 모두 노예가 되어야 할 처지입니다. 

그런데 탕감을 받았으니 그 기쁨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고 너무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가던 그가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를 보자 얼마 전에 그 친구가 자신에게 빌려간 돈이 생각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입니다. 백 데나리온이면 오늘날로 하면 약 천만원 정도입니다. 자신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면,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그 친구의 빚을 당연히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백 데나리온을 빨리 갚으라고 독촉을 하고는, ‘지금 당장 갚을 돈이 없다’고 하자 그를 고소하여 감옥에 쳐넣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님은 그 사람을 불러다가 앞서 탕감해 준을 것 없던 일로 하고서, 일만 달란트를 모두 갚으라고 명령을 하고, 갚을 수 없는 그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맙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은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친구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고,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된 이 사람을 우리는 참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엄청난 하늘의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 빚을 진 내 이웃을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 작은 빚을 빨리 갚으라고 윽박지르고 협박을 가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있는 이기심이 우리로 하여금 내가 받은 은총은 잊어버리고,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아내야 할 돈이 얼마인가만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그 이기심이 우리 마음에 가득 차 있는 한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 이기심을 조금씩 우리 마음에서 덜어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 이기심을 조금씩 비워내야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긍휼히 여기는 복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기심은 형제의 모습을 그대로 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나보다 살림이 어려운 사람을 보면 게을러서 그렇다고 단정해버립니다.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을 보면 건강관리를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평소 게을러서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버립니다. 가게 운영이 어려운 사람을 보면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자가 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잘못을 했거나 죄를 지은 사람을 보면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버립니다. 때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고사하고 동정하는 마음조차 갖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형편이나 상황을 내 생각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14:4절에서 엄히 경고합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남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그에게 넘어져 있으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넘어져 있으라.’ 그래서 넘어져 있는데 넘어져 있다고 ‘참 못난 사람이네,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왜 그렇게 나약해!’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 넘어져 있는 이유도 제대로 모르면서 내 생각대로 판단해서 정죄하고 나무라고 꾸짖는다면 그건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됩니다. 내게 형제를 향하여 내밀 수 있는 손이 있다면, 그 손 내미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형제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형제를 일으켜 세워줘야 합니다. 네게 이웃에게 베풀 작은 동전이 있다면 그 동전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그를 향하여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를 보면서 내 내장이 흔들리고 뒤틀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는데, 어찌 손 내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내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이 어찌 아깝겠습니까? 

김홍섭이라는 판사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사도 법관’ ‘법의 속에 성의를 입은 법관’ ‘절망에 빠진 생명을 어루만지던 사형수의 대부’ 등으로 평가 받는 분입니다. 그분은 1915년 김제 원평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전기를 읽고 감동을 받은 후에, 고생고생하다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25살이던 1940년 변호사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을 무료로 변론하던 김병로 전 대법원장과 함께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해방을 맞음과 함께 그는 서울지방검찰청에 검사로 임명이 되고, 1948년부터 판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서울고등법원 판사,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전주지방법원장, 대법원판사, 광주지방법원장 등을 지낸 그의 이력보다, 그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든 것은 청렴하고 남을 위한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죄수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신앙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특히 사형수 선교에 큰 힘을 쏟았습니다. 법정에서는 부득이하게 법에 따라 사형 선고를 내리고서, 며칠 뒤 교도소를 찾아가서 ‘직책상 사형을 선고했지만 심히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부디 영혼을 구원하라’고 권하면서 신앙을 가질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의 사랑과 관심에 많은 사형수들이 감동을 받고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월급의 절반을 사형수들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서울고등법원장을 끝으로 법관직에서 물러난 후 간암으로 투병하다가 1965년 불과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법관으로 일평생 살았지만, 그의 청렴함 때문에 가족들은 무척이나 힘들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죄수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 때문에 그들을 위한 선교적 삶을 살았습니다. 특별히 사형수들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이 그의 마음에 가득하여 작은 예수처럼 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에 채우십시다. 그리고 그 마음에 감동되어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사십시다. 긍휼히 여기는 삶은 때로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기도 하고, 우리의 삶을 평탄함보다는 사명감으로 살게 만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끌려 사십시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준 것처럼, 언젠가 하나님께서도 나를 그렇게 불쌍히 여겨주실 것입니다. 내가 한 실수,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책망과 꾸중의 심판이 아니라, 긍휼이 넘치는 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못난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서 용납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그 긍휼의 사랑을 우리의 가슴에 담고서, 우리도 주님을 닮아 내 형제와 이웃에게 작은 긍휼을 베풀며 사십시다. 긍휼을 베풀며 사는 우리를 통해서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복되어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여! 그대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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