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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시 126:1-6, 갈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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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시 126:1-6, 갈 5:1)
  

오늘은 8·15 광복절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이제 8·15의 역사도 67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3·1절은 93돌, 6·25는 62돌을 맞이하였습니다. 3·1절이나 8·15나 6·25는 모두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해 준 민족의 역사의 날입니다. 5.0과 4.5가 한반에서 친구로 지냈습니다. 5.0은 4.5에게 0.5라는 끗수 때문에 늘 군기 잡으려고 했습니다. 4.5는 0.5 차이로 언제나 5.0에게 가방도 들어주고 심부름도 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4.5가 대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쟤가 어쩌려고 저러나 염려하며 “너 뭘 믿고 대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나 점 뺐어, 인마” 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4.5가 점을 빼니까 갑자기 상대도 되지 않는 45가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은 힘이 최고인 시대입니다. 힘이 없으면 눌려 살게 되어 있습니다. 왕따는 힘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중국이 안하무인인 것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일본에 지배당한 것도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법보다 힘이 우선일 때입니다. 힘이 없으면 눌리고 뺏기고 압제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힘이 없어서 지배당하고 점령당하고 압박받았습니다. 그때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큰일을 했습니다. 선교사들이 보기에 우리 민족이 너무 안쓰러웠고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이 땅에 희망의 씨를 뿌려 주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던 우리 백성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기죽지 말고 살고 하나님을 알고 눈뜨고 살라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재학교를, 언더우드 선교사는 연세대학을, 스크랜턴 선교사는 이화여대를 세우고 “여자들이여 기죽지 말고 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승훈은 알아야 살고 무지하면 지배당하며 살 수 밖에 없다고 해서 희망을 주기 위해 오산학교를 세웠다고 했습니다. 도산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세웁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역사의 교훈

그래야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옛날도 알아야 미래의 교훈을 삼을 수 있습니다. 손기정은 1936년 8월 제 11회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였습니다. 시상대에서 월계관을 받을 때 손들고 기뻐해야 하는데 그는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우승을 했는데도 그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저는 왜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 때 손기정은 나라를 잃었을 때입니다. 손기정은 그런 고뇌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것입니다. 나라가 없으니 우승했는데도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승했는데도 고개를 떨어뜨린 것입니다. 나라 없는 백성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였습니다. 황영조가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받을 때 고개를 바짝 처 들고 웃으며 단상에 올라가 메달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내 나라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국력이 신장된 나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껏 환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연합군에 드디어 항복을 합니다. 그래서 그 날을 광복절이라고 부릅니다. 광복은 빛을 되찾았다는 의미입니다. 36년 동안 일제에 의해 빛을 잃고 살았는데 하나님이 이 땅에 광복을 주셨습니다. 

그때 교회들이 부른 찬송이 있습니다. 그 찬송이 580장입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찬송시는 당시 장로였던 남궁억이 지었습니다. 남궁억은 그 당시 독립운동하다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 남궁억이 최초 민간 매일신문인 황성신문을 창간합니다. 그는 윤치호의 권유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입니다. 배재학당에서 8년간 교사로 일하고 교가를 작사합니다. 1918년 홍천으로 내려가 모곡교회를 세웁니다. 

사재를 털어 그 옆에 모곡학교를 세웁니다. 그 학교에서 독립 운동가를 양성하고 그때 무궁화동산이라는 노래를 지어 전국 학생들에게 무궁화를 보급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 그는 70세 때 옥고를 치루고 8개월 옥살이 끝에 병을 얻어 77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때 그는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무궁화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그는 홍천 모곡에서 무궁화 운동을 전개할 때 어느 날 조용한 산천을 거닐다가 문득 생각했습니다. 

“왜 이 좋은 금수강산이 일본에게 짓밟혀야 하는가, 왜 우리 어린 자식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식민 지배를 받고 살아야 하는가, 빨리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마태복음9장37~38절의 말씀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그때 영감이 떠올라 적은 가사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입니다. “봄 돌아와 밭 갈 때니, 곡식 익어 거둘 때니,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여기 “일하러 가자”는 말은 “독립운동 하러 가세” 라는 말입니다. 이 가사 속에 독립운동 정신과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이 흠뻑 젖어 있습니다. 곡은 도니체티라는 작곡가가 작곡한 오페라 “루치아 디 람무르무어” 제 2막 8장에 나오는 결혼 축하객들이 부르는 합창곡을 편곡한 곡입니다. 

자유의 소중함 

독립이나 해방은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닙니다. 독립이나 해방은 “자유를 아는 사람만이” 얻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얻어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8·15는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준 날입니다. 우리민족은 36년 동안 온갖 설움을 받았습니다. 이름도 말도 글도 다 빼앗기고 매일 불려나가 노동을 하였습니다. 우리민족 일부는 일본광산으로 끌려가 석탄을 캤고 우리 선조 일부는 동남아시아로 차출되어 전쟁터로 끌려가 죽었고 우리 선조 일부는 위안부로 끌려가 병영 창부로 살았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해방이 되어 좀 평안해지고 자유를 누리고 먹을 만큼 되니까 그분들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살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지금 이렇게 발전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자유의 소중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을 보면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했는데 이는 헬라어로 “엘류데로센”(eleudelosen)이라는 말로 “놓아주다, 해방시키다, 자유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멍에는 밭 갈기 위해 소 어깨에 메우는 장비를 말합니다. 여기 본문은 꼭 멍에가 아니고 노예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멍에나 자유에 대해서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6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죄와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는 내가 스스로 짓는 죄인 범죄가 있고 피를 통해 유전되는 원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죄들로부터 자유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죄함을 받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죄의 형벌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유함을 받아 이 형벌로부터 자유해진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죄의 힘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삭개오가 4배를 갚았습니다. 그때 삭개오는 죄의 힘으로부터 자유 해졌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네 번째는 율법의 요구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다섯 번째는 육신의 삶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육신의 죄는 우리로 하여금 악습관을 갖게 합니다. 술과 노름이 육신의 뿌리에서 나오는 죄성의 결과입니다. 이것에 찌들게 되면 사람이 부자유하게 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힘이 약하고 무지해서 남으로부터 억압받는 부자유한 생활은 지난날로 족합니다. 또 당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독재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걸고 항거를 합니다. 공산치하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걸고 항거합니다. 왜냐하면 자유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은 죄로부터 자유해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으로부터도 자유해진 사람들입니다. 악 습관으로부터도 자유해진 사람들입니다. 육신으로부터도 자유해진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자유까지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가 36년간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았습니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이 자유라는 것을 우리선조들은 너무나 절절이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때 우리 선조들은 매일같이 노동판에 끌려 나가 비럭질을 했습니다. 전쟁터로 끌려 나가 죽었습니다. 광산촌으로 끌려 나가 일하다 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선조들이 이 자유를 얼마나 갈구하였겠습니까. 자유가 귀한 것을 알려면 그 자유를 빼앗겨 보아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미련한 사람은 자유를 빼앗긴 후에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부터 430년간 억압을 받았습니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이 그들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매일 노동판에 불려나갔습니다. 매일 벽돌을 굽고 감독자들에게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배고픔과 미래의 암담함과 부자유함 속에서 그들은 자유와 해방을 고대했습니다. 어느 날 모세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430년 만에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두 신나는 모습으로 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지고 들고 출애굽을 합니다. 얼마나 신나는 발걸음입니까. 모두가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아갑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긴 행렬을 이룹니다. 자유는 잃어버려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자유는 가장 좋은 재산이고 최고의 선물입니다. 자유는 소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가지게 됩니다. 소중함을 모르면 현실에 순응하고 만족해하고 안 되면 그냥 살지 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일제 때 그냥 이대로 살지 하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고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자유 할 날이 올 것을 믿고 기다렸던 사람들은 매일같이 고민을 했습니다. 그 날을 고대하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고 때로 피도 흘렸습니다. 그러다 자유를 얻었을 때 얼마나 환희가 주어졌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126편을 보면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 동경자

본문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다시는 잃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안에 들어와 모두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과거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회심자 가운데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출소자들이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재범률이 60%를 넘는다고 합니다. 왜 돌아가는가 하면 과거의 행태를 동경하기 때문입니다. 옛 뿌리를 뽑아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오늘도 “왜정 시대가 좋았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구시대적인 사람은 자유나 미래나 가나안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왜정시대가 좋았어.” 이런 사람은 미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 받아 출애굽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그 중의 얼마는 여전히 애굽을 동경합니다. 고기 가마 곁에서 배불리 먹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을 합니다. 생각 없는 백성들은 그 말에 현혹되어 선동에 말려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16장을 보면 백성들이 모세에게 반기를 들고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기계가 잘 돌고 있는데 먼지가 끼면 잘 돌던 기계가 멈추게 되고 기능이 마비되듯이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행이 한 달이면 족한데도 40년간 광야에서 멈추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간 같은 사람들입니다. 여리고성을 무너트렸습니다. 금성철벽 여리고 성을 손하나 까닥하지 않고 무너트렸습니다. 그런데 그에 비하면 상대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아이성에서 그만 패배합니다. 아간 때문입니다. 아간 한 사람 때문에 3천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패배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까. 

자유는 수고의 상급 

자유의 대가는 수고를 요구합니다. 8·15 해방을 위해 얼마나 수고를 했습니까. 얼마나 피를 흘렸습니까. 얼마나 눈물로 기도를 하였습니까. 해방은 어느 날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오늘 수고자만 얻는 것입니다. 땀 흘린 자만 미래를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오늘 눈물을 흘리며 심는 자만 기쁨으로 거두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저절로 어느 날 쉽게 편안히 도착하면 안 됩니다. 먼저 애굽을 탈출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애굽을 뒤로 하고 떠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애굽을 반드시 분명하게 떠나야 합니다. 애굽 즉 구세계와 절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야 합니다. 홍해를 건너야 한다는 말은 죽었다 살아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물에 빠져 죽었다 건짐 받아야 합니다. 뒤에는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때 모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목격하고 그 기적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가나안에 들어가도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광야 40년 연단도 있어야 합니다.

그 광야에서 뜨거운 햇빛과 밤의 추위와 목마름과 불편한 잠자리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게 연단 받은 후에야 가나안에 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어느 날 봉사 조금했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 몇 년 믿었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사모하는 수고가 있어야 가는 곳입니다. 갈망하는 수고가 있어야 가는 곳이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일제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얼마나 갈망했습니까. 얼마나 희망했고 기다렸고 고대했습니까. 그러니까 해방이 반갑고 기쁘고 행복했던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고 수고가 없었으면 그 해방이 무슨 기쁨이 있습니까. 일제에 앞장서서 아부하며 살았던 친일파들이 해방을 얼마나 방해했습니까. 얼마나 해방되지 못하게 걸림돌 노릇을 하였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해방은 끔찍한 날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해방은 아주 두려웠던 날이었을 것입니다. 남들이 기뻐하며 보따리를 들고 고향을 향하여 돌아갈 때 그들은 얼마나 침통했겠습니까. 기다림이나 사모함이나 수고가 없으면 기쁨도 없는 법입니다. 해방은 기다린 사람들의 것입니다. 사모한 사람들의 것 입니다. 

수고한 사람들의 것 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은 백성들이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또 우리는 정치적 멍에도 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라의 소중함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이 나라가 건강한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명을 부여하여 주셨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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