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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찬송하며 삽시다! (엡 5: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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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찬송하며 삽시다! (엡 5:15-21)


사오정이 어느 날 영어 학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영어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사오정이 길목에서 저팔계를 만났습니다.  팔계를 만나자마자 오정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 팔계야.  너 어금니가 영어로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영어 실력이 짧은 저팔계가 알리가 없습니다.
"아니."
사오정이 아주 당당하게 대답을 합니다.  "몰라다.  몰라∼."
순간 어금니가 영어로 뭔지는 모르지만 '몰라'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 저팔계가 말했습니다.
"웃기네.  어금니가 무슨 몰라냐?"
"아냐, 몰라 맞아.  내가 어제 할머니한테 어금니가 영어로 뭐냐고 물어 보니까 '몰라'라고 그랬어."
그러자 답답해하던 저팔계가 갑자기 옆에 있던 손오공에게 물었습니다.
"오공아, 어금니가 영어로 몰라야?  아니지?  뭐야?"
아무 생각 없이 둘 사이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손오공이 당황스러워 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몰라!"

손오공의 말에 의기양양해진 사오정이 이렇게 말합니다.
"거봐!  몰라 맞잖아!"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 어금니를 영어로 말하면 '몰라'가 맞습니다.  영어로 'molar'를 어금니라고 합니다.  한 번 웃자고 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기분이 좋거나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는 웃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언제 가장 많이 웃고 노래를 부르는지 아십니까?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을 때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면 그저 싱글벙글 하면서 입으로 흥얼거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큰 가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보배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천재도 없고 둔재도 없습니다.  가난한 자도 없고 부자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삶의 여유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 영혼에 여유를 찾는 자는 환경이 어떠해도 웃으며 노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이 땅에서 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는 영혼의 기갈에 걸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심령에 기근이 왔습니다.  그 얼굴에 생기가 말랐습니다.  그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 생활에 행복이 없습니다.  늘 불안과 염려와 근심과 초조 속에서 삶의 보람도 의미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한 향기 없는 꽃과 같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기까지는 결코 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화초도 햇빛을 보지 못하면 시들시들해 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시들시들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사랑의 하나님께서 나를 만져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오늘 이 시간 온 몸으로 느끼고 고백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 이 땅에는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심정으로 광야 같은 인생을 허우적거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한다지만 그러나 허탈한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오늘 하나님의 교회 안에 원불교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원불교 신자, 원망하고 불평하고 교만에 빠진 신자 말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있으면서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혼자서 도도한 척 교만한 사람들, 그들은 오늘 교회 안에 있는 원불교 신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병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믿음을 지키십시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패역한 이 세대를 이길 수 있는 힘은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의 인생을 지켜줄 수 있는 길도 건강한 부모의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이 썩고 무너지는 세상을 바로 고치고, 바로 세울 수 있는 힘은 성령의 능력 밖에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민을 좀 해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살아야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감화를 줄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해야 내 가정이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믿음의 공동체인 내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이런 아름다운 고민을 좀 해 보십시오.  시시콜콜한 세상적인 고민을 하지 말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복한 고민을 좀 해 보십시오.

일반적으로 화학 작용이 있는데 거기에 화학의 원소 하나를 바꾸었더니 100여 가지의 원소가 완전히 싹 바뀐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한 두 사람이 들어오면 그 전체가 바뀝니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 들어오면 전체가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썰렁한 사람이 들어오면 전체가 썰렁해 집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명자가 들어오면 전체가 성령이 충만해 지고 그 공동체는 사명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들어오면 전체가 힘이 빠지고 목표를 잃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이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복잡한 존재가 아닙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마음으로는 저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잘못된 그 행동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생각으로는 원불교 신자는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작 몸으로는 자신도 원불교 신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자신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신자들입니까?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원불교 신자는 되지 마십시오.  그래서는 결코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는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복된 인생을 살다가 죽어서는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있다고 해서, 매 주일 정한 시간에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요, 그 길만이 복된 길이라고 믿는다면 잘 믿으십시오.  바르게 믿으십시오.  감동되게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죽은 우상들을 섬기는 것처럼 그렇게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막대기를 들고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거짓된 신앙으로 살다가 마지막 내 육신이 무너지는 날, 주님 앞에 서 보지도 못하고 지옥에서 이를 갈며 슬퍼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인생이 되지는 마십시오.

이 시간 한 번 자신을 보십시오.  지금 당장 죽는다면 나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내가 죽는 그 순간 스데반을 반갑게 맞아주셨던 주님께서 나를 맞아 주실까요?  교회에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나를 알아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잘 믿으십시오.  부끄럽지 않게 믿으십시오.  감동되게 믿으십시오.  나꼼수 신자가 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조니 에릭슨이라는 미국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틴에이져 시절인 어느 여름날에 미국 메릴랜드의 체스픽 베이라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가운데 뗏목에 올라가서 바닷물 속으로 다이빙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다 밑에 있는 바위에 머리가 부딪히면서 그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몇 년을 그렇게 누워 있게 되자 그리스도인이기는 했지만 아직 이런 시련을 감당할만한 믿음이 없었던 그녀는 절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어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만약 이러한 몸이 되었지만 아직도 내 인생이 쓰임만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그녀가 기도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입술만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입에다 붓을 물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입술에 연필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그린 그림이 훌륭한 그림으로 알려지고 소문이 나면서 유명한 볼펜회사에서 광고 모델을 제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붓을 입에 불고 광고에 출연하는 모델로 나가게 되었는데, 조건을 하나 내 걸었습니다.  

그 조건은 자신이 나가는 모든 광고물에는 반드시 그 아래에 PTL이라고 하는 영어 세 글자를 삽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허락을 했다고 합니다.  PTL은 Praise The Lord, 주님을 찬양하라는 단어의 약자입니다.  그 후에 그녀는 아주 유명한 인사가 되었습니다.  복음전도자로, 장애인을 위한 인권운동가로 미국 사회에 아주 유력한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은 때가 악한 마지막 시대에 세월을 아끼면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가 악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신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본문 19절에 보면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찬양을 생활화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여기에 씌어진 "화답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라는 단어들은 모두가 현재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계속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찬송이 라이프 스타일이 되고, 찬송이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찬송을 생활화하며 살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다시 본문 앞에 중요한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찬송을 생활화하기 위해서 대답해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단순하고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마땅히 찬양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주어진 대상이 찬송의 은사나 혹은 음악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찬양은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 가서도 가장 귀하게 쓰임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영원토록 찬양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 앞에서 찬양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저는 천국에 가면 실업자가 될 것이 아주 확실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천국에 가서는 설교를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데 예수님의 설교를 듣지 제 설교를 듣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제가 무슨 설교를 할 용기를 내겠습니까?  마치 이런 이야기와 같을 것입니다.  중국에 가면 공자 무덤이 있는데 그 앞에 비석에는 아무런 글자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 앞에서 문자를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가 예수님 앞에서 문자를 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 가면 제가 설교를 못할 것은 뻔하고, 그래서 제가 실업자가 될 것은 아주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찬양을 잘 하는 사람들은 거기에서도 아주 귀하게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찬양을 잘 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누군가 찬양대원에게는 중요한 몇 가지 특권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교회에 올 때 무엇을 입을까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와서 가운만 걸쳐 입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항상 예약석을 갖고 있다.  항상 자신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확보되어 있습니다.  셋째, 회중석에 있는 사람들을 항시 내려다 볼 수 있다.  많은 교회에서는 찬양대석을 강대상 앞에서 교인들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배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중요합니다.  목사의 예리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찬양은 찬양대원들만의 특별한 은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에는 결코 찬양을 은사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은 이유는 찬양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보편적 삶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켄트 휴스라는 설교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안에 찬양을 허락하신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거듭난 증거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마음 속에 깃들여져 있는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라는 중국 선교에 신화적인 발자취를 남긴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그가 청년시절에 구원의 문제에 대해 몹시도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민했던 것처럼 내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중대한 내 나름대로의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마음 속에는 어떤 구원의 기쁨도 없고,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교회 주변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이라는 소책자 한 권을 주었습니다.  이 짤막한 책자에 복음이 소개되면서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 가운데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설명이 되고 있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행하는 그 무엇이라는 결과로 인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다 이루신 것이다.  내가 없었을 때 주님은 이미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서 나와 전 인류의 죄를 십자가상에서 담당하셨고, 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그분이 대신 다 받으시고 죄 값을 이미 지불해 놓으시고 그는 십자가상의 마지막 고통의 절정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우리를 위한 구원을 다 완성하셨다.  이제 하늘가는 문은 활짝 열렸다.

이런 복음에 대한 내용이 설명되고 있었던 책자를 읽다가 그는 갑자기 구원에 대해서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감격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령께서 내 영혼에 갑자기 빛을 비추어주시는 것 같았다.  즉, 나에게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할 일이란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오직 무릎을 꿇고 구주와 그분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일과 그리고 그분을 영원히 찬양해야 할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사실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찬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찬양해야 합니까?  그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찬양을 생활화하기 위해서 두 번째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찬송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찬송의 여러 가지 유형이 나와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찬송의 유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 찬미, 신령한 노래.  그 구별은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것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찬양의 여러 가지 형태를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학자 F. F. 부르스는 세 가지의 단어를 조금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의 초점을 감사로, 찬미의 초점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경험한 어떤 간증을 표현한 것이 신령한 노래라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찬송은 감사요, 고백이요, 간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싶을 때, 고백하고 싶을 때, 간증하고 싶을 때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좀더 나아가서 이런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찬양할 것인가?  본문에서 '찬송하라'는 말은 영어로는 'making melody'로 악기를 동반한 찬송을 의미할 수도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찬양은 멜로디만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로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 그 자체가 찬양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말에 멜로디가 붙어 있지 않아도 찬양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19절에 '서로 화답하며'라는 말은 영어에 'speaking to one another'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는 것도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음악의 재능이 없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찬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생활 속에서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서로 화답하며'라는 말은 성도간에 나눌 수 있는 어떤 격려도 찬양의 범주에 속할 수 있습니다.  물론 찬양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너희가 서로 화답하라고 했습니다.  찬양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만나는 주변 성도들에 대한 따뜻한 격려도 찬양의 범주에 속합니다.

일반적으로 찬양이라는 말을 영어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Praise'입니다.  그런데 이 Praise라는 말은 달리 번역하면 '칭찬'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했을 때 다른 말로 하나님을 칭찬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 너무 멋있어요.  하나님은 위대하셔요.  하나님은 아주 놀라운 분이세요."  이렇게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도 찬양입니다.  내가 주변의 어떤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오늘 당신 멋있습니다"라고 칭찬하는 것도 찬양입니다.

어제 저녁에 학생회 단합회를 하고 마무리를 하면서 아이들이 교회에 왔습니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현호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제가 아는 목사님들 가운데 가장 잘 생기셨어요."  이것도 찬양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이러한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찬양의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 격려가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모일 때마다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웃들이 가장 소중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서로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은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이 말을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너희가 모일 때마다 서로 서로 화답하라.  다른 말로 한다면 너희가 서로 모일 때마다 서로 격려하며 칭찬해라.  우리가 지나치게 하나님께 초점을 둔 나머지 사람에 대한 초점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삶은 삭막해집니다.

여러분, 사탄을 숭배하는 뉴에이지들도 찬양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찬양에는 칭찬과 격려는 없습니다.  그들의 찬양에는 저주와 욕설과 음담패설과 원망과 불평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십니까?  내 입술에 서로를 향한 칭찬과 격려가 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말을 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 사탄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 입술에서 원망과 불평을 거두어들이고 칭찬과 격려의 언어들로 가득 채우십시오.  저는 이것이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진정한 찬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찬양할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방법으로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입술로 찬양하고, 마음으로 찬양하고, 악기로 찬양하고, 언제 어디에서든, 특별히 역경을 만났을 때에라도 하나님을 찬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한 밤 중에 찬양을 했더니 옥문이 열리고 손에 채웠던 착고가 풀리는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찬양은 우리의 모든 역경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찬양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은 본문 18절에 있는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본문을 설명함에 있어서 어떤 성경학자는 18절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고 그 다음에 19절에 찬양하라는 말씀이 뒤따라 왔다는 사실에서 찬양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결과적 상태를 묘사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찬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또 어떤 성경학자들은 19절에서 사용된 '화답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라는 말은 현재분사적 표현인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령 충만의 조건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령 충만하면 찬양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찬양하면 성령 충만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옳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하면 가슴 속에서 찬양이 넘칩니다.  찬양하고 싶습니다.  찬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찬양이 샘솟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사실입니다.  내 마음이 침체되어 있었는데 그러나 의지적으로 주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고 찬양을 불렀더니 어느새 찬양하는 가운데 내 마음이 회복이 됩니다.  그러면서 성령께서 다시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찬양이 있습니까?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제일 먼저 찬양의 고갈을 느낍니다.  찬양의 샘이 메마르기 시작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찬양이 살아 있습니까?  찬양이 터져 나오십니까?  아십니까?  가장 위대한 찬송작가들은 시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여러 편의 찬송시를 남겼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위기를 만날 때마다 기도했다.  그때마다 주께서는 나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게 찬송을 주셨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585장도 루터가 작사하고 작곡한 찬송가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우리의 찬송가에 가장 많은 실려있는 찬송시는 패니 크로스비라는 시각장애인의 찬송입니다.  그녀는 무려 8,000곡 이상의 찬송시를 남겼습니다.  크로스비의 찬송에 보면 '길'과 관련된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녀가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서 길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감이 났겠습니까?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기도는 바로 나의 찬송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충만하면 찬송이 나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찬송하면 성령으로 충만해 진다는 사실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서 찬송이 메말랐다고 한다면 그것은 달리 말하면 나는 성령 충만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찬양이 메말랐다고 생각하신다면 다시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주의 은혜를 깨달아 보십시오.  그러면 찬양이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찬양을 생활화하십시오.  예배 시간에만 찬양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항상 찬양하십시오.  운전할 때도 찬송하십시오.  시속 80킬로로 달릴 때 적절한 찬송은 "주 너를 지키리"입니다.  100킬로로 달릴 때 적절한 찬송은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120킬로로 달릴 때 적절한 찬송은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140킬로가 넘는 속도로 달린다면 가장 적합한 찬송은 이것입니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찬양하며 주께 나아가는 삶, 저는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저 영원한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차대전 후 독일의 한 간호사가 혀암으로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도도 열심히 하고, 성령 충만했던 이 여인은 의사가 수술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은 그 동안 말할 수 있었던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한 후 조용히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리고 찬양을 마무리하면서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제가 입으로 찬양은 못하지만 내 마음의 찬양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찬송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찬송하며 사십시다.  찬송이 우리의 생활이 되게 하십시오.  그래서 찬송으로 우리의 삶의 어둠과 모든 시련을 극복하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셨던 그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찬양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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