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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는가? (신 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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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는가? (신 8:1-10)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살았습니다. 막판에는 애굽 사람들의 핍박으로 인해서 고통이 심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자 모세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광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지중해 바다를 끼고 블레셋지경 지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는 가자 지구 쪽으로 걸어서 가나안으로 갔다면 1주일 정도면 들어갈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빠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를 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나이 반도로 인도 하셨습니다. 시나이 반도는 사막지대로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 사람이 살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물이 없습니다. 사람이 물이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그곳은 사막지대 이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양식이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셋째로, 일교차가 너무 심합니다. 낮에는 섭씨 45도 이상의 고온이고 저녁에는 쌀쌀하게 추운 날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길로 인도 하셨던 것입니다.
   
광야를 통과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본보기입니다. 고전 10:11에 보면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본보기이며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가는 과정 가운데 광야를 통과했던 것처럼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도 광야와 같은 과정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광야를 통과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만큼 우리들을 사랑하시는데 왜 우리가 당하는 고난 중에 침묵하시는지 이해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신 것처럼 육체도 질병이 없이 건강하게 하시고 물질적인 어려움도 없이 풍족하게 하시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하시면 좋을 텐데 오히려 반대되는 일들이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를 걷게 하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왜 우리들이 광야와 같은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겸손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기 위해서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것입니다. 2절, 3절, 16절에 보면 3번이나 ‘너를 낮추시며’라고 말씀합니다.
   
낮추시는 이유는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겸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하게 하셔서 겸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과 하면서 세상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겸손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함을 지니게 하셨던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광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미드바르’이고 동사형은 ‘다바르’입니다. 이 다바르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인 ‘지성소’라는 용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면서 그들을 낮추셨고 그들을 겸손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 하면 고난을 떠올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광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세례요한은 빈들에 거했는데 그 빈들은 유대광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금식하셨습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영적 싸움을 한 후 지쳐있을 때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광야는 고난의 장소입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없음의 자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환경적으로 견디기 힘든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장소인 광야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겸손해 졌던 것입니다.
   
바울이 바울 되기 전에 그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교만하기 짝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권력과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으니 학문적인 면에서도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었으니 종교적으로도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배경이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사용하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정오의 빛 보다 더 밝은 빛과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그에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주셨고, 그 결과 눈이 멀어 사흘을 보지 못하는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이스라엘을 겸손하게 하셨던 것과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작은 자인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 눈이 멀게 된 고난을 통해서 그의 자아를 박살내신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사울은 겸손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믿게 됐으며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십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겸손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잠 22:4입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또 하나의 이유는 교만이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잠 16:18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2. 시험하시려고 
   
2절, 16절에 보면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는 또 하나의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는 부르짖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고난이 찾아오면 ‘시험이다’라고 생각하고 잘 통과해야 합니다. 대학입시를 잘 통과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지만 입시를 잘 통과하지 못하면 재수를 하든지 취직을 해야 합니다. 입사 시험을 잘 통과하면 직장에 취직이 되지만 입사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백수생활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광야 시험에 합격하면 가나안에 들어가지만 광야 시험에 불합격하면 합격할 때가지 광야생활을 통해서 고된 훈련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광야 시험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광야 시험을 통해서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기 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광야는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불편함이 백성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들의 잘못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어느 한 집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친구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놓고 "애야, 너는 친구가 많은가 보구나?" "예, 아버지, 저는 많은 친구를 두었습니다." "그래, 이 애비는 친구가 하나 밖에 없는데, 너는 친구가 많구나? 그런데 하나 물어보아도 괜찮겠니? 이 애비 친구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리는 정말 귀한 친구란다. 너의 친구들은 어떠니?" "예, 아버지, 제 친구들도 저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친구들입니다. 얼마나 의리가 많은데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너와 내가 각자의 친구들을 시험해 보면 어떻겠니?"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가마니에 둘둘 말아 넣은 다음, 짊어지고 각자의 친구 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먼저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집에 도착했습니다. 친구집에 도착한 아들은 힘차게 그 집 대문을 두드리며, "여보게 날세, 나야, 나. 내가 실수로 사람을 찔러 죽였다네. 이 시체를 잠시만 맡아 주지 않겠나? 나 자네의 가장 친한 친구야!" 안에서 그 소리를 들은 친구는 문도 열어주지도 않고 "미안하네. 나는 당신 같은 친구를 둔 적이 없네"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상심한 아들은 그 다음 친구집에 가서 똑같이 "여보게 날세, 나야, 나. 내가 실수로 사람을 찔러 죽였다네. 이 시체를 잠시만 맡아 주지 않겠나?"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친구집을 갔지만, 어느 누구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아버지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는 큰 소리로 "여보게 나야,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네"라는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문을 열면서 "어서 들어오게. 걱정하지 말게. 내가 자네 친구 아닌가?" 결국 아버지가 짊어지고 간 시체, 아니 새끼 돼지를 가지고 그 날 저녁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친구가 많습니까? 그러나 진실된 친구를 평소에는 구분하지 못합니다. 진실된 친구는 어려울 때에 알 수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고난 중에 알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똑같습니다. 똑같이 기도하고, 똑같이 찬양 드리고, 똑같이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할 때, 내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 사람의 믿음의 진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때 성도들의 마음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입을 열어서 부정적인 말을 하고 교회가 시험 들게 만드는 마귀의 도구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교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는 있으나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하실 일을 말하며 기도하면서 교회에 힘을 보태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 때 사람들의 마음을 봅니다.
   
주님은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기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문제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말씀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광야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광야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백성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동과 거할 곳을 결정하셨습니다. 이 때 이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심대로 순종하고 따라오는가 아니면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또 광야 백성들의 양식으로 매일 아침 만나라는 특별한 양식을 이슬처럼 내려주시는데 안식일에는 거두러 나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도 그들이 말씀대로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알려하심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시험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과 성령의 음성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가 아니면 자기 맘대로 사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린아이가 어른이 시키는 대로만 해도 어린아이가 생각할 수 없는 지혜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는지 그렇게 하지 않는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문제를 던져 주실 때 그것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우리의 기도 제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도 응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것처럼 고난 중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시험하십니다. 그 마음이 어떠한지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지 여부를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3.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알기를 원하셨을까요? 
 
첫째,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셨고 만나를 먹이신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광야생활은 말씀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홍해를 만났을 때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라고 말씀하셨고 모세가 순종하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홍해는 말씀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마라의 쓴물을 만났을 때는 나뭇가지를 지시하셨고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지 쓴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마라의 쓴물도 말씀으로 단물이 된 것입니다. 말씀을 받고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했습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먹을 것 때문에 걱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하늘에서 만나가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말씀대로 하늘에서 40년 동안 만나가 내렸습니다. 백성들은 만나를 먹은 것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필요 이상의 만나를 거두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많이 거두어서 보관해 놓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겨둔 것은 상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6일에는 다른 날 보다 두 배를 거두고 제7일에는 거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날에는 남은 만나가 상했었는데 신기하게 안식일에는 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확신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좀 더딘 것처럼 느껴지기는 해도 그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스승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오래 전에 아들의 인생에 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답니다. 아들은 자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지금은 그 아들이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들려주셨던 말씀 그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광야 생활을 한 사람들이 장정만 약 60만 명이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200만 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사람들을 40년간 먹이셨습니다. 그것도 광야에서 말입니다. 이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사실 이 기적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다고 근심하거나 절망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다면 위대한 일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큰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에 도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풍성하게 공급하신 이유는 그분은 우리의 영혼의 친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의 학원비를 공급해줍니다. 아이들의 용돈도 줍니다. 아이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도 공급해줍니다.우리아이들이 착하게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공부를 얼마나 잘하느냐 못 하느냐도 관계없이 공급합니다. 그 아이들이 제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 아이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 없습니다.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돈을 더 잘 벌기 때문에 자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풍성하게 사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누가 주셨는가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재물 얻을 능력만이 아니라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식을 낳고 못 낳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결혼한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자식을 낳게 되었습니다. 창 30장에 보면 라헬이 자식을 잘 낳는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식도 하나님께서 주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4. 마침내 복을 주시려고 
   
16절입니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것은 마침내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애 3:33에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광야 생활을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우상숭배에 빠졌던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아버지께서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는데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지금 훈련하셔서 언제 복을 누리겠느냐고 말합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진리적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무엇입니까?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영원한 세계에 비교하면 일순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만 생각한다면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영원한 세계가 있기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 아닙니까?
   
아이들에게는 학교 다니고 학원 다니는 일이 피곤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싫다는 학교와 학원을 억지로라도 보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모가 아이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아이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 잘되라고 하는 일 아닙니까!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잠간 힘들지만 그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마침내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지금 광야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광야를 지나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지금 광야 생활이 힘들다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곧 하나님이 예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 도착하게 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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