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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갈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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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갈 6:17)

바울서신의 대부분은 서론과 본론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서는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본문과 분명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베츠(Hans Dieter Betz)는 마지막 장을 갈라디아서 전체의 요약이라고까지 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 『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고 한 것은 사도 바울의 신앙표현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직역하면 "마지막으로 아무도 나에게 매질들을 제공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나의 몸 가운데 예수의 낙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더 이상 아무에게도 괴롭힘을 당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마크)이 있기 때문이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Ⅰ. 자신이 소속된 신분의 마크를 가졌다는 확정적 고백입니다. 

본문 6장 17절에 『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고 했습니다. 

여기 "흔적"에 해당하는 "스틱마타"는 스티그마의 주격 혹은 목적격으로 쓰이는 복수명사입니다. 
이 말의 의미로 몸에 새겨진 문신文身은 약한 표현이고 소나 양에게 화인을 찍어 주인의 소유를 나타내는 마크를 말합니다. 
고대인들은 자신의 소유를 확인하는 표식으로 가축에게 화인을 찍었습니다. 사람의 경우에 노예는 소속된 주인의 낙인을 그 몸에 찍었습니다. 
오늘날 전자 팔찌와 같이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적 악을 범한 자에게 표식을 찍었습니
다. 

전쟁 포로를 수용할 때도 포로의 신분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찍는 도장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군인의 제복에 지휘관의 고유한 표식을 새겨서 소속된 신분을 알리는 방법으로 소인이나 자국을 남기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시대 군인의 경우 비겁한 자나 상관의 명령에 불복한 자에게 표를 찍었습니다. 이 표시는 일반적으로 평생에 지워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로마군에 입대한 신병들에게 황제의 이름이 약자로 된 문신을 손바닥에 새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한 후에 소속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요, 신분으로는 그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자신의 심령에 화인처럼 찍혀 버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마크가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매여 있는 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 남종은 일평생 종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귀를 뚫어 표시로 삼았습니다. 
신약시대 스티그마는 단 한번 본서에 기록된 것이 전부입니다. 
바울 자신이 가진 예수의 흔적은 자기 스스로가 한 문신이나 능동적으로 신체의 어떤 부분을 절단하거나 상처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는 가운데 타의에 의해 일어난 육체적 고난, 박해, 궁핍의 흔적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을 능동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종이라고 할 때 타의에 의한 수동적 발상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종에 대한 의미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 의미는 "오이케타이스"인데 이것은 삯을 상대하고 움직이는 종입니다. 
삯을 받기 위해서 고용된 종입니다. 삯을 받기 싫으면 종의 신분을 벗어도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삯의 종인 셈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둘로스"입니다. 이 말은 삯과는 관계없는 노예라는 의미입니다. 노예는 팔려서 온 자이기 때문에 삯과는 관계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한평생 주인의 소유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삯을 지불하고 사 왔기 때문에 노예는 주인의 은혜를 그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존재 의미는 주인의 것으로 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주인의 뜻이 자기의 뜻이 되고 주인의 목적이 자신의 목적이 된 상태입니다. 
이 종에게 있어서 몫이 있다면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는 주인의 칭찬이 종의 것이라면 종의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둘로스"가 자신의 신분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바울의 주인은 유대주의와 율법이었고 신분과 권위의 상징이 된 로마시민권과 가말리엘 문하의 학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참람한 주인 유대주의와 율법에서 벗어나 새 생명의 복음이 사도 바울의 새 주인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 군왕들이 주는 로마 시민의 신분에서 장차 도래할 영원한 천국시민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8절에 『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라고 했습니다. 

항상 배우나 진리 지식에 이르지 못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 바울의 새 주인이 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7절에 『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바울의 기쁨이자 소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새 주인으로 모신 이것이야말로 바울 사도의 긍지요 자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의 새로운 존재 의의가 되었고 새로운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쉬지 않고 계속되는 일정한 호흡의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를 위해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궁극적 승리를 바라보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Ⅱ. 사명수행을 위한 고난의 마크를 가졌 다는 확정적 고백입니다. 

본문 6장 17절에 『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고 했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받은 온갖 육체적 상흔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상흔을 가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이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이 말은 육체적 상흔傷痕 즉, 복음전파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그의 고난과 괴로움이 정신적 상흔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 나를 괴롭게 말라 』는 말은 사도 바울이 당한 괴로움은 유대주의자들로 부터의 직접적인 폭력이라기보다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움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따라서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단자들에게 더 이상 미혹되지 말라는 간곡한 호소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고난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육체적 상처와 심령의 고통이 예수의 흔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넘치도록 한 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습니다(고후 11:23).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고후 11:24).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습니다(고후 11:25).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한 일입니다(고후 11:26).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은 일입니다(고후 11:27). 

이것이 바울의 육체적 상흔이라고 하면 다음의 것은 정신적 상흔일 것입니다. 
수고하며 애쓰는 일입니다(고후 11:27).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전도자로서의 괴로움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30절에 『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9-50절에 『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흔적은 육체적 상흔도 상흔이려니와 그보다도 사명에 대한 눌림과 교회를 향한 애타는 사랑입니다. 


Ⅲ. 장차 받을 영광의 마크를 가졌다는 확정적 고백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것과 그와 함께 고난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아픔을 오히려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6장 14절에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했습니다(마 10:39).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마 5:6).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습니다(마 5:10).

결정적으로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미 부활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 했습니다. 
핍박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한 부분처럼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주를 위해 받는 고난과 핍박의 가치는 장차 받을 영광과 상급으로 보편적 이해나 산술적인 표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더 이상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확정적 고백입니다. 

다윗은 시편 57편 7절에 『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소유한 예수의 흔적은 사죄의 흔적과 부활의 흔적입니다. 그 흔적은 자기 십자가로 승화되어 예수의 고난에 참여한 결과 얻게 된 지워지지 아니하는 거룩한 증표입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신앙으로 자신의 흔적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흔적이 무엇입니까? 

① 탄식하는 회개 과정에서 얻은 흔적입니다. 
에스겔 9장 4절에 『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666의 표를 받지 아니하고 이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은 십사만 사천의 수입니다(계 7:2-4).
우리의 흔적이 무엇입니까?

② 그의 몸 된 교회운동의 사명 수행 과정에서 얻은 흔적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 『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고 했습니다.

③ 자신이 받은 직분의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얻은 흔적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3-4절에 『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④ 구원의 은혜에 보은하는 과정에서 얻은 흔적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태복음 10장 38절에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6-17절에 『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 2:20).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 얼마나 신앙체험에서 토해지는 고백인가!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자들의 한결같은 장엄한 고백이 아닌가!
오늘 갈보리인들의 웅변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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