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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영광(4)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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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영광(4) (요 2:1-11)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에 있는 혼인 잔치집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인성을 입은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기 위하여 운신運身(몸을 움직임)의 폭을 넓혀 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자였으나 예수님은 군중 속에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잔치집은 며칠 동안 계속되는 잔치입니다. 여러 날 동안 계속되는 잔치 가운데 신랑 신부는 자연스럽게 양가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겨운 잔치집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옛 말에 초상집은 위로하려고 가고 잔치집은 먹으러 간다는 말이 있듯이 포도주가 모자랐으니 잔치의 분위기는 식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물을 항아리에 담으라고 명하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표적은 그 어느 누구의 요청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포도주가 모자라는 잔치집에서 능동적으로 행한 처음 표적이었습니다. 

Ⅰ. 모친 마리아와의 대화에서 나타난 그리 스도의 영광입니다. 

본문 2장 4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했을 때 예수께서 모친에게 한 말입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혼인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예수께 알렸을 때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의 의중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친의 말 가운데 혼인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절박한 상황을 알리는 이상의 무슨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여기 『 여자여 』라는 말은 하대下待의 호격이 아니라 왕이 왕후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모친 마리아를 향하여 이러한 존칭을 사용했습니다(요 19:26).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당신이 내게 대하여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까 라는 권한에 대한 부정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하여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특별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천사 가브리엘이 증거했습니다. 

요셉과 결혼하기로 약속된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수태 고지를 했습니다. 그 이름은 예수(눅 1:31)이고 거룩한 자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눅 1:35).
큰 자가 될 것이고(눅 1:32) 영원히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눅 1:33).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천사의 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축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목자와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선물하면서 경배했습니다. 
예수의 유년시절에도 성전에서 자기를 찾는 부모에게 예수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육신의 아버지 요셉 외에 다른 아버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가 메시야라는 상당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포도주를 보충하는 궁극적 동기가 마리아의 요청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는 인간의 요구에 의해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38-39절에 『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서도 『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라고 했습니다(요 17:1).

마가복음 14장 36절에 『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야의 사역을 수행해 나가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정된 모든 시기를 맞추신다는 말입니다. 

내 때가 곧 메시야의 때라는 말입니다. 내 때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때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하나님의 때를 조정할 수도 없고 메시야의 뜻을 변하게 할 수도 없는 평범한 한 여성일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낳아준 모친이라고 해서 마리아에게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면 사교邪敎(부정하고 요사한 종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 자신은 평범한 여인 이상의 대우를 받으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마리아는 곧바로 본문 2장 5절에 『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리아를 신격화하고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 자신도 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인본주의 가치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Ⅱ. 포도주가 모자라는 잔치집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본문 2장 3절에 『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주가 모자라서 잔치집에 흥이 식어갈 때 물로 된 포도주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먼저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는데 그 곳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하인들은 아구까지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연회장이 먼저 맛을 본 후에 하객들에게 갖다 주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입니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렀다고 했습니다(2:9). 이 말은 혼인잔치에 온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공급해야 될 사람이 바로 신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잔치집에 실제로 포도주를 공급한 사람이 예수님인 것을 감안할 때 예수님 자신이 이 혼인 잔치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랑인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요 4:16). 이때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요 4:17).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다고 했습니다. 『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라고 하므로 그녀의 진정한 남편이 바로 메시야인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요 4:18).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성도를 신부로 비유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9절에 『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온전한 연합을 결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8-29절에 『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 신랑은 예수님이고, 신랑의 친구는 세례 요한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신부는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비유로 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은 구약에서 신랑으로 묘사되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직접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신랑이 되심을 나타내는 말씀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마가복음 2장 19-20절에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신랑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현재는 금식할 수 없는 신랑의 친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사역 기간에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은 신혼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는 재림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초림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재림 때에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절정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언젠가는 신랑의 친구(제자들)들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고 그때는 금식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신랑을 빼앗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우편에 계시다가 심판의 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에서 신랑 되신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비유는 성도들이 준비된 자세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마 25:1-13).


Ⅲ.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를 만든데 나타 난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본문 2장 10-11절에 『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고 했습니다. 

연회장의 말에 신랑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집에 신랑은 모자라는 포도주가 생겨난데 일차적으로 놀랐을 것이고 처음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라는데 다시 놀랐을 것입니다. 

보통 잔치집에서는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취한 뒤에 처음보다 못한 포도주를 내놓는 것이 포도주가 더 필요할 때 취하는 조치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가 되었습니다. 이때는 하객들이 술이 어느 정도 취했을 것으로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런 술 취한 자의 미각에도 처음 것보다 예수님이 물로 만든 포도주가 좋은 포도주라는 것이 맛으로 차별화되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처음보다 좋은 것이 그의 영광입니다. 

에덴동산의 원시 아담보다는 제 2아담(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한 단계 높은 아담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제 2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죽을 수도 없고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을 수도 없는 아담입니다. 

문둥병이 든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씻었을 때 열왕기하 5장 14절에 『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고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나이 30세인 것을 감안할 때 어린 아이 살 같게 되었다는 것은 처음보다 더 좋아졌다는 말입니다. 
룻은 처음 남편보다 더 좋은 남편 보아스를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히 11:14-16). 예수 그리스도는 더 아름다운 직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이십니다(히 7:22; 히 8:6).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부활입니다(히 11:35).
예수 그리스도 안에 더 행함이 있습니다(몬 1:21). 
그래서 전도서 7장 10절에 『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포도주가 모자라는 혼인 잔치집입니다. 예수께서 내 때라고 하므로 메시야의 때가 도래했음을 만천하에 공포했습니다.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리는 표적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잔치집에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것은 잔치가 끝났다는 말입니다. 곧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잔치집이라는 말입니다. 
그 어떤 신랑도,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바닥난 포도주를 채워줄 수 없는 이 세상 잔치입니다. 재미없는 잔치집입니다. 왜냐하면 혼인잔치 집의 상징인 포도주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신랑은 바닥난 포도주 항아리를 포도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채운다고 해도 또 다시 바닥이 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잔치는 끝난 잔치입니다. 기쁨이 없는 잔치입니다. 예수께서 포도주를 공급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 13-14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정치인들의 잔치, 과학자들의 잔치, 예술인들의 잔치, 교육현장의 잔치, 평화를 가상한 국제적 잔치, 이 모든 잔치에 빨간 포도주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로 만든 붉은 포도주와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를 등식화해서 사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계시의존에서 나오는 고상한 사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든 빨간 포도주는 좋은 포도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은 무의미의 반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원의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처음보다 더 좋은 피입니다. 

그 피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피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입니다. 거룩한 피입니다. 세상 잔치에는 이 피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무엇보다 사죄의 은총으로 충만해야 됩니다. 구원의 은총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개인과 가정에 얼마든지 공급하는 관수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도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는 속죄의 잔치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이 일곱 봉인을 떼시는 환상가운데 셋째 인을 떼실 때에 검은 말을 탄자가 손에 저울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6절에 『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극한 가난을 나타내는 계시입니다. 그런데 감람유와 포도주는 흑마 탄 자가 저울에 달아주는 양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일체의 것들이 감람유와 포도주라는 것입니다.
감람유와 포도주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먹고 마시면서 잔치하는 잔치상을 차릴 것들이기 때문에 해치 말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는 신랑 되신 예수님과 신부된 성도들의 잔치마당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요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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