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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창 1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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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창 17:1-10) 

1. 우리가 누구와 약속을 할 때에, 두가지를 고려합니다.

(1) 첫째는, 약속을 하는 그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인가?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마음)가 있는가

(2) 다른 한가지는, 약속을 하는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는가? 입니다. 

1) 미국에 있으면 가끔씩 이런 우편물을 받게 되는데요, 겉봉투에, 붉은 글씨로 "긴급한 메일입니다 - 즉시 열어보세요" 라고 적혀 있어서 얼른 열어보면, "축하합니다. 당신은 우리회사의 이벤트 추첨에 당첨되셔서 10만 불의 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인을 해서 보내달라는, 그런 우편물인데요, 실제로 이런데 속아넘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10만불이나 되는 거금을 약속하지만, 제가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은, 약속하는 사람의 인격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또, 예를 들어서, 다섯살 난 딸 아이가 아빠한테, 오늘 유치원에서 수영장을 가는데, 얼마 전에 산 고급 카메라를 좀 빌려달라고 합니다. 절대로 잃어버리거나 고장내지 않겠다고, 손가락을 걸고, 도장을 찍고 하면서, 약속을 하지만 아빠는 딸의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딸이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딸은 그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3) 이렇게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약속하는 자가 약속을 지킬 마음/인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2. 오늘 성경말씀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시는데,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당시 아브라함과 사래의 상황으로 볼 때에, 이것은 10만불을 준다는 약속보다 훨씬 더 황당한 약속인데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약속은 과연 믿을만한가, 그리고 이런 약속을 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고, 은혜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 

I. 먼저,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1. 오늘 본문 17장은,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하면서 시작합니다. 

1)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을 때, 아브라함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99세가 되었는데, 그 동안 24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2) 특히 15장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긴 침묵의 시간이 아브라함에게는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는데요, "선생님은 학생이 시험을 치르는 동안에는 조용하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조용하다면, 당신은 지금 하나님께 시험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아마 이 기간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시험을 치르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혹시 지금 하나님께 시험을 치고 있는 분들 계신가요? 

3) 그렇게  기다리다가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 해서,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드디어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태어나서 자라는 14년 동안, 하나님도 이스마엘을 낳은 것에 대해서 가타부타 아무 말씀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동안 이스마엘에게 희망을 걸고 살고 있었습니다.

17장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4) 그런데 이 이스마엘은 누구입니까? 무엇입니까? 약속의 오발탄입니까? 아니면 불순종의 씨앗입니까? 실패작입니까?

아마 우리에게도 우리가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이스마엘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과정중에는 이스마엘이 있을 수 있지만, 믿음의 결국에는 이삭이 있다는 것입니다, 

5) 누가 인생은 가위바위보 게임과 같다고 했는데, 내가 무엇을 내는가에 따라 게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무엇을 내는가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음의 삶은,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내가 어떤 수를 내는가 하는 것이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약속하셨는가에, 우리의 인생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나의 의지나 열심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믿음에/ 하나님의 약속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했을 때에, 이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6)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은, 그 크신 이름 때문이라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II. 두번째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1. 그동안 침묵하시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에, 드디어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황이 그동안 많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되어버렸고, 사래의 나이가 90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과연 그 약속을 이루실 능력이 있으신가 입니다. 

1) 먼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답을 하십니다.

1절에 보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엘 샤다이)" 하셨습니다.

(2) 18장 14절에서도,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2) 우리는 여호와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을 가지고, 내게 뭔가 기적이 일어나서 내 상황이/ 환경이 극적으로 바뀌어지기를 기대하는 말씀으로 많이 사용합니다만, 이것은 자칫 오용되기 쉬운 말씀입니다.

우리의 환경을 기적적으로 바꾸시는 것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과, 하나님이 나를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환경을 바꾸어 일하기도 하지만, 환경을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 성숙해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도,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보다 더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래의 몸이 자녀를 낳기에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아들을 주신 것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부터 보면 (롬4:17-22),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 ... )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랄 수 없는 중에 주셨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자기 아들을 위해 위해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래의 몸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서 아들을 주셨듯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2) 그러므로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의 하나님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신 그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그래서 나는 내 아들까지 너를 위해서 주겠다... 하는 약속이 바로 언약입니다. 

3)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버지의 사랑에 목이 마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 건강의 문제를 기적적으로 풀어주시기를 바라시겠지만, 지금 삶의 문제에 목말라 있는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탕자가 조금 배가 고팠을 때는, 쥐엄 열매를 먹었지만, 정말 배가 고팠을 때는, 아버지를 생각했듯이,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4)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 주신 하나님이시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은사로 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는 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엘샤다이"라고 소개하시고는, 아브라함과 사래에게도 새이름을 주십니다.

5-6절에 보면,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오늘날에는 이름이라는 것이 그냥 사람 개개인을 구별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지만,구약성경의 당시에 이름이란, 단순한 구별의 표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과 운명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는 것이요, 그 사람의 미래를 알고, 책임진다는 의미입니다. 

2) 누가 사람의 전존재와 미래의 운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운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더이상 한 부족의 족장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는 어마어마한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3)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만 아니라, 우리도 그런 복을 누릴 수 있다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로마서 4장 23-24절에서,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에게는 저주가 없고,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그런 운명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4) 민수기에 보면, 발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스라엘이 가나안 문턱인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 이르자, 모압왕 발락이 굉장한 위협과 두려움을 느끼고는, 당시에 유명한 복술가인 발람을 돈으로 매수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여러차례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번번히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는커녕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23장 19-20절에 보면 발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23절에도,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이렇게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5)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새 이름을 주시면서 아브라함의 전존재, 아브라함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셨듯이, 우리의 운명도 바꾸어 놓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세번째는, 하나님은 말씀과 행동이 하나이신 분이십니다.

1. 사람은 말과 행동이 다르기가 쉽지만, 하나님은 말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1) 말씀이 곧 행동이요, 행동이 곧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 - 말씀하시면,, 곧 빛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신 말씀은, 곧 행동이 되었고, 실재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2) 그런데 문제는 말씀만 있을 때에, 즉, “아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아직 행동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때에, 그 침묵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입니다. 이 기간동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3) 물론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그 기다림의 시간동안 사람의 마음은 수없이 흔들릴 것입니다. 많은 삶의 곤경들이 지나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의심의 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믿음의 시험을 치르는 시간입니다. 

4) 그러나 오늘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이사야 40:8).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로 약속을 가진 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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