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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2)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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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들게 마옵시고(2) (마 6:9-13)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신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신자의 삶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죄를 짓게 하는 악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분노는 감정적인 부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분노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그 ‘분’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을 때 그것은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가 됩니다. 사탄이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작은 분노가 이상하게 비화되고 악화되어 나중에는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탄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시험의 연속인 삶에서 신자는 시험을 잘 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사탄이 시험하는 전형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사용한 세 가지 시험의 범주를 지금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세 가지 유혹이 나옵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 가지를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도 이 세 가지로 공격했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은 육체의 정욕에 관한 시험입니다. 먹음직한 것입니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절하라고 요구한 것은 안목의 정욕입니다. 보암직한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로 올라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한 것은 이생의 자랑입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창 3:6)” 시험입니다. 이 세 가지 시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이 시험의 전형을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잘 이해하고 승리의 비결을 찾아야 합니다.

첫째,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입니다. 

주님은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굶주린 상태에 있을 때 마귀가 시험을 걸어왔습니다. 금식을 해본 분들은 아시지만 모든 것이 먹을 것처럼 보입니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은 절실하고 절박한 유혹입니다. 사탄은 항상 급소를 정확하게 치고 들어와서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부추기며 유혹합니다. 먹는 문제만큼 절실한 것은 없습니다. 배가 고프면 참지 말고 당장 배를 채우라고 합니다. 절실한 현실적 필요가 있을 때 자신을 억압하지 말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를 성급하게 해결하려고 하면 마귀가 쳐놓은 덫에 걸려듭니다. 현실적 문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은 멀리 보지 못합니다.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판단력이 약해집니다. 살다 보면 당장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매일 일어납니다. 중요한 것들이지만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에 집중하다 보면 인생이 꼬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탄이 노리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고, 이것만 손에 쥐면 된다고 부추깁니다. 돈의 문제를 눈앞에 갖다 대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당장 손에 잡힐 것 같이 늘어놓고 이것만 가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영원한 진리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 삶에 현실적 필요에 대해 영적인 접근을 해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생존의 문제에 빠져서 신앙을 놓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양보하면 안 됩니다. 그럴 때 그 문제뿐 아니라 우리 삶 전부가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그의 책 <돈, 섹스, 권력>에서 현대인들을 거세게 몰아붙이는 세 가지 유혹을 지적합니다. 사탄이 주로 이것을 가지고 유혹하면 준비되지 않은 영혼들은 영락없이 쓰러집니다. 사탄은 속이는 데 명수입니다. 죄를 짓는 동안에는 그것이 죄라고 여기지 않게 만들고, 조금만 지나면 후회할 일인데 순간적으로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불행해질 것 같게 만듭니다. 설득력이 대단합니다. 

현재의 행복, 미래의 안전, 모든 것을 제공해줄 것처럼 속삭입니다. 그러나 사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정신의학자 스캇 펙은 아담의 범죄는 생각의 게으름에서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미 있는 지적입니다. 현대인들은 생각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하나님의 진리에 머물러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각적이고 충동적이고 현실적인 문제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진리에서 벗어나 우리 삶을 망가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마귀는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유혹합니다.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부추겼습니다. 자기 증명을 위해 화끈한 쇼를 연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도 인정받고 싶은 강한 욕구와 유혹이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어떤 일로 증명하려고 하면 위험해집니다.

교회 안에서도 열심히 봉사하는 것으로 자기증명을 하려고 애쓰면 사탄에게 빌미를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탄이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는 것은 영웅주의적 모습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영웅주의, 어떤 사람을 한없이 추앙하고 환호하여 박수를 받게 하는 인기주의가 가득합니다. 우리도 이런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적 세계 안에서도 영적 허영심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할 때도 조심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금식 자체는 좋은 종교적 행위지만 그것을 구실로 삼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인가를 보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무언가를 할 때 돋보이고 싶어 하고,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금식할 때에는 온 동네가 알도록 머리도 헝클어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금식하는 그 거룩한 행위에 파고들 수 있는 영적 허영심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자랑하고자 하는 것을 내려놓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가끔 교회 안에서 시험에 드는 이유 중 하나가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릴 때 찾아오는 현상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돋보이게 하고 자기를 과시하고자 하는 허영을 걷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자신을 포장하고 과시하고 사람들의 눈을 속이게 되어, 우리 신앙은 외형적으로 기울게 되고 결국 영적 파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조용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용기, 묻힐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는 경험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는 이런 경험들을 하지 않으면 늘 넘어지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다가 넘어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영적 허영심들이 나도 모르게 발산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어느 자리에 앉느냐, 누가 힘을 가졌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는 성공이라고 하면 어떤 자리에 앉았느냐 어떤 직함을 가졌느냐로 평가합니다. 성공했지만 불행한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리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사느냐입니다. 세계은행 총재가 된 김용 박사는 “한 번도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자리에 목을 맨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인가에 자기의 존재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바른 태도입니다.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지 그것이 내 존재의 평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이고, 성도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증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이름이 얼마나 드러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이름이 얼마나 세상에 드러나는가가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만이 드러나야 할 줄 믿습니다. 

내 행위와 사역, 모든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야 하는 것은 딱 하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41)」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한 번도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셋째, 사탄은 예수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안목의 정욕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세상의 화려함에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와서 선악과를 주목하게 했습니다. 에덴동산에 수없이 많은 과일이 있음에도 오직 하나의 나무에 주목하게 함으로 죄를 짓게 만든 것입니다. 하와의 눈이 선악과에 꽂히고, 보암직하다고 했습니다.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주목하게 합니다. 자꾸 쳐다보다 보면 유혹을 당하게 됩니다. 보는 순간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것이 내 생각을 주장하게 되고, 사고의 체계가 되어 결국엔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계속 보다 보면 우리 안의 죄성을 자극하게 되고, 탐욕과 정욕에 불이 일어나게 합니다. 보는 것은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은 비주얼의 시대입니다. 갈수록 세상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화려하고 매혹적인 것이 많습니다. 이제는 화면이 입체적으로 다가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유혹할 것입니다. 마귀는 어떤 곳을 확대시켜 마음을 흥분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손에 쥐지 않으면 불행해질 것 같고, 보고 있는 것에 포로가 되게 합니다. 

여러분, 보는 것은 자유이지만 보는 것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그것에 자유를 잃습니다. 시험에 들기 전에 선택이 중요합니다. 시험에 들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들을 가지고 총공격합니다. 수많은 인류가 이 시험 앞에 무너지고 죄를 지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의 짧은 기도 안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왜 포함시키셨는지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귀의 유혹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네가 하나님이 되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도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죄는 내가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죄된 자존심입니다. 죄를 짓는 순간에는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내가 왕이 되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죄에 대한 훌륭한 정의입니다. 이 시대의 메시지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도덕적 규범이나 규정도 싫고, 간섭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사람들이 힘을 가지고자 하는 것, 돈을 벌고자 하는 것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고 싶은 욕망입니다. 사탄은 허욕을 불어넣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고, 누가 나를 무시하면 견디지 못하고,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드러내는데 심혈을 기울입니다. 주님에 대한 관심보다 나에게 관심이 더 많을 때 우리가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내가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영광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되고자 하면 죽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삶입니다. 또 하나는 네가 가진 힘을 너를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네가 가진 힘을 사용해서 돌이 떡이 되게 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힘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가진 힘을 이용해서 죄를 짓게 합니다. 힘은 잘 사용하면 선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파괴적 힘을 가집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힘이 과해서 망한 역사의 반복입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힘을 동원해서 남의 아내를 가로채고 그 죄를 은폐하는 일에 자기 힘을 동원한 그때가 바로 다윗의 힘이 정점일 때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돈의 힘, 명예의 힘, 권력의 힘,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그 힘을 너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합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자기를 위해 힘을 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어느 조직에서나 힘의 충돌이 심각한 것은 내가 왕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명검을 가진 사람은 사용하고 싶어 하지만, 명검은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명검일수록 칼집이 좋아야 합니다. 명검은 휘두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칼집에 두어야 하는 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힘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왜 권력자들의 친인척들이 그렇게 똑같이 실수하고 넘어집니까? 힘의 정점에 있으면 이 힘이 영원할 것 같고, 모든 곳에 통할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속이지만, 인간이 가진 힘은 유한합니다. 안타깝게도 기독교 역사에서도 기독교의 힘이 넘쳤을 때 잘못된 야욕으로 과오를 범했습니다. 교회도 힘을 가졌을 때 위험합니다. 사람이 많아지고,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그 힘은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마귀의 계속되는 유혹은 너를 위해 힘을 모으고 너를 위해 힘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자리나 역할, 특권을 주셨다면 그것을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종의 모습으로 섬기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받는다면 우리는 사탄의 시험에서 능히 승리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시험으로부터 승리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 주님은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셨습니다. 주님은 마귀가 시험을 걸어올 때마다 “기록되었으되”라고 구약의 말씀으로 즉각적으로 대적하셨습니다. 주님은 현실적 필요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셨습니다. 현실적 필요와 이슈는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현실의 필요가 내 삶을 목 죄어도, 그 다급한 문제보다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에 사로잡혀 계셨고 말씀으로 사탄을 사로잡았습니다. 사탄은 거짓된 진리와 잘못된 메시지로 사람들을 실패하고 절망하고 불행하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탄은 이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말씀에 대한 확신을 흐트러뜨립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도 말씀을 가지고 와서 말씀을 왜곡시킵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없으면 사탄의 속임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전쟁은 진리 전쟁입니다. 진리에 굳게 서 있지 않으면 거짓된 사탄의 속임수를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분명하게 서 있다면 사탄의 속임수는 금방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말씀 무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공부하며 가까이한다면 에베소서 6장 17절의 말씀처럼 말씀이 성령의 검이 되어 사탄의 궤계를 능히 물리칠 줄 믿습니다. 당하고 난 후에 말씀을 가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둘째, 주님은 시험을 받으실 때 성령의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성령에 이끌려’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마귀의 공격에서 이기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셨는데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영적싸움은 능력대결입니다. 사탄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검(엡 6장)은 단순히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성령의 능력이 부여되어 말씀이 파워가 되어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 있게 표현되는 것이 몇 구절이나 되십니까? 그것이 무기가 되어 찌르기 위해서는 말씀이 터져 나와 능력과 권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 안에 성령의 능력이 더해져서 우리 안에 깊은 확신과 선포의 능력이 있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사탄의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 요인은 마귀, 세상, 죄성입니다. 자세히 보면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삼킬 자를 찾아서 두루 다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진지한 기도가 절실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야고보는 이 시험을 통해 우리가 성장하고 온전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눅들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 가지 시험에서 이미 승리하셨고, 우리의 시험을 돕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이 수많은 삶의 유혹에서 말씀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모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 안에서 사탄과 유혹 앞에 당당하게 대적할 때, 영광스러운 영적 거인의 대열에 서게 될 줄 믿습니다. 이 마지막 때, 마귀는 더욱더 날뛰고 신자들이 영적으로 미약해지는 이 시대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신앙생활하고, 깨어 있고, 말씀으로 무장해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풍성한 삶을 누리며 날마다 영적으로 자라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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