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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눅 8: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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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눅 8:22-25) 
 
본문의 내용은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아주 흔한 일상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갈릴리를 가로질러 다니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날의 사건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각자의 믿음을 점검하게 하는 특별한 기회로 삼으심을 본다. 

그런 입장에서 믿음 생활하는 우리에게 위기나 절망 같은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지극히 자연스런 일상에서 우리는 갑자기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그 일로 우리 지신의 초라함을 발견하게 되거나 또는 본문의 내용처럼 결과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 되심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힘입어 죄를 용서 받았고 이 불확실한 세상을 건너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것을 기대하면서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본문의 제자들의 기도처럼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고백할 만큼 혹독한 어려움을 당하고 그러면서 인생과 믿음이 성숙해지는 경험들을 하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 자신이 가진 믿음과 마주대하게 된다. 사실 믿음 생활하는 우리 모두도 어려움이 없을 때는 내가 가진 믿음이 참으로 주님께서 인정하실 수 있는 믿음인지 … 또는 신앙 생활하는 것이 무엇이 다른 것인지 별로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이러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죽을 것 같은 위기를 통해서 우리 각자의 신앙을 점검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믿음생활이 힘겹지 않기를 기도하며 평안한 삶이 될 것을 늘 주님께 기도 드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건은 이렇게 한결 같은 일상에서 일어나고 또 잠잠해 지는가 하면 어떤 사건들은 참으로 우리 자신이 신앙의 사람이 맞는가를 점검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시험 당하는 것을 결코 즐거워 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지만 주님의 육신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고 격려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실 시험이 없는 無事安逸 한 신앙은 힘이 없고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의 인격이 자라기 때문이다. 

오늘도 절망과 같은 위기를 당해서 죽겠다고 기도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일어나(다가오)셔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지라도 부끄러움이 없는 … 


Ⅰ. 인생의 위기는 있을 수 있다.(22~23)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주님께서 명령하신 길인데도 …(22) 

이러한 위기를 만날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제자들이 당할 수 있었다면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들이야 얼마나 더 흔하고 쉽겠는가!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옆에 모시고 있어도 …(23) 미친 바람 같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래서 우리 각자의 생명을 싣고 가는 육신의 배, 우리 함께 신앙을 격려하며 천국을 향해 항해해 가는 신령한 방주인 교회에 물이 가득한 것처럼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이 원치 않는 위기 앞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의 자세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3~5) 라는 고백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육신의 평탄함 만이 아니라고 바울 사도는 경계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예수 믿으면 모든 위기는 비켜간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세상의 사람들이 환란과 어려움을 당하는 것처럼 신앙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어려움은 닥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다. 

고난과 어려움 그것은 인생이 비켜갈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저주로 절망하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위기와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인생을 슬픔과 절망으로 끝내지 않게 하시려고 죄의 저주에서 우리를 피 값으로 사주셨음을 잊지 않는 … 


Ⅱ. 이럴 때 누구나 기도하게 된다.(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전능하신 하나님은 물론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 그럼에도 100% 육신을 입으신 인간으로 오신 주님은 언제나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고 인류구원의 역사를 위한 역사를 아버지 하나님과 기도로 의론하시는 삶은 육신적으로는 피곤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이런 충분한 휴식을 하실 수 없었던 주님께서 잠시 건너편으로 옮겨가시는 그 시간을 쉼으로 보충하시는 모습이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23f)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완벽하게 인성을 가지신 주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 성령의 충만으로 움직이지 못했던 제자들은 이런 주님의 단잠조차도 깨우면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하소연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어느 시대에나 ‘죽겠다!’는 말은 죄성을 가진 사람들의 입에서 쉽게 튀어나오는 불평이었다. 대부분이 갈릴리에서 뼈가 자라서 설령 빠진다고 해도 수영은 다 할 수 있을 것임에도 이들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이러한 어줍잖은 사람들의 하소연을 주님께서는 먼저 들어주신다. 주님은 어려움 가운데 부르짖는 저들의 위기를 먼저 해결해 주시는 것으로 응답해 주신다.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24m) 

잠에서 깨자 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실지는 분명히 아시는 분이심을 본다. 어쩌면 이것이 긴장 가운데 있는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이기도 하고 창조주로서 피조 세계를 향하여 명령하시는 권위를 보이시기도 하는 모습이다.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24b) 비록 이성이 없는 무생물의 자연조차도 창조주께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은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사실 얼마나 이유를 많이 달고 붙이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주님께서는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수선을 떨고 죽겠다고 아우성 치는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이것은 다름아닌 오늘 우리를 보시는 주님의 안타까움일 수도 있다. 위기 속에 기도는 당연한 것이지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는 당부를 잊지 않는… 


Ⅲ. 이럴 때 주님은 우리의 신앙의 상태를 물으신다.(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감사한 것은 위기를 먼저 해결해 주시고 물으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한참을 지난 후에나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f) 물으시는 것은 “너희의 삶 속에 나를 모시고 산다는 고백이 사실이냐?”는 책망일 수도 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상황을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4:40) 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우리는 위기를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위기를 겪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어려움을 겪은 가치가 없다. 위기는 느슨해진 신앙의 허리띠를 다시 처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고 경계해 주고 있다. 

위기의 또 다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더욱 확신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m) 이것은 제자들의 고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위기를 주님의 은혜로 넘긴 사람들의 고백은 놀라움일 것이다. 이 위기의 마무리가 비록 우리의 원하는 대로가 아닐지라도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 고백의 내용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b) 였다. 사람이나 동물이 아니라 ‘바람과 물’ 이것은 환경의 변화에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들이고 자연 중에서도 가장 큰 재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데도 주님의 한마디의 명령에 다소곳해 지는 모습에 제자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생은 위기와의 싸움이다. 그것도 그냥 물결 흐르는 대로 떠밀려 가는 인생이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어려움은 오히려 더 많을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위기와 어려움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것도 주님을 모시고 있는 주님의 백성들에게도 올 수 있다. 

이러한 위기는 우리로 기도하게 하고 자신을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절망적으로 죽겠다고 하는 과장된 기도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옆에 계시는 한 절대로 죽도록 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상황들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성도는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46:3)는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만 한다. 이왕에 믿음생활 하는 우리 어떤 위기와 절망에 처해지더라도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책망은 듣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믿음의 긴장을 놓지 않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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