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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되어라, 청결한 사람이여! (마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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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되어라, 청결한 사람이여! (마 5: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버리시고 그 후임으로 다윗을 선택하십니다. 아직 사울이 왕좌에 있을 때,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 이새의 집으로 보내십니다. 이새의 집에 온 사무엘 선지자는 이새의 아들을 보자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큰 아들 엘리압을 보는 순간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을 자가 바로 이 사람이구나.’하고 감탄을 합니다. 키도 훤칠하니 크고 얼굴도 아주 잘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 여기에서 말씀하신 ‘중심’이라는 말은 마음을 말합니다. 겉모습으로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그 마음에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새의 일곱 아들을 모두 만나보았지만, 하나님께서 ‘OK, 됐다. 이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렇게 말씀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이새의 아들 중에서 왕으로 택한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새의 아들 일곱을 다 만나보아도 하나님께서 ‘OK’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에게 묻습니다. ‘이 일곱이 아들 전부이냐’고 말입니다. 사실 이새는 막내아들을 그 자리에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에게 ‘네 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울 사람이 있으니 다 불러 모아라.’ 그렇게 말할 때, 이새는 막내아들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왜 이새는 막내아들을 그 자리에 부르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이새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한 놈을 지정하여 쓰신다면 일곱 가운데 하나일거야. 막내 저놈은 왕이 될만한 그릇이 못돼. 그저 평생 양이나 치면서 사는 게 그놈에게는 딱 맞아!’ 그렇게 막내를 그 자리에 부르지 않은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들에 나가 양떼를 돌보고 있는 막내아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새의 막내아들인 다윗이 사무엘 앞에 나타난 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바로 그다.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렇게 해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물론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왕인 사울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을까?’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새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왕이라는 큰 직책을 맡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것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 이새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오랫동안 자기 아이들을 겪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덟 명의 아이들을 다 겪어보았지만, 막내 다윗은 큰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그 자리에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버지 이새는 왕이 될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 왕이 될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해답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속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복되어라,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여! 그대가 하나님을 뵈올 것입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뵐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런 인간적인 욕구에서 출발했고, 그것이 또한 모든 종교의 최종적인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상을 만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으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고서 그것이 절대자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보면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볼 사람은 없다!’고 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소서.’라고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애굽기 33:20) 그렇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로마서 6:23)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 인간은 모두 사망을 선고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동안 그 사망선고가 유예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뵈옵는 순간 우리 인간은 그 사명선고가 바로 집행됩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사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순간 모두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복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 이런 복들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난한 것보다는 풍요로운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애통하며 우는 것보다는 웃으면서 기쁘게 사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가난한 것이 복이고, 애통하며 우는 사람이 복되다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을 복되다고 선언하셨을까요? 
  
예수님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가 가장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적으로 아주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금식과 기도도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열심히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들이 사회적으로 그렇게 성공한 것이 신앙생활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하니까 하나님께서 저렇게 복을 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복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화를 당할 사람들’ ‘저주받을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신 말씀이 무려 8번이나 나옵니다. 당시 사람들이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러워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왜 ‘화를 당할 사람들, 저주 받을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외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 뒤에 왜 화를 당할 사람들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게 화를 당할 이유입니다. 외식한다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그들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아주 적나라하게 고발하십니다.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구나.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지 않느냐.’ 겉모습과는 달리 마음은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부패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오래 전에 선포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레미야 17:9)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는 것인데,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증언, 비방 등이다.’(마태복음 15:17-20)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부패합니다.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언제나 악한 것들입니다. 이것은 비단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악한 생각을 가득 담고 있는 마음이 아니라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청결하다’는 말은 신약성경 언어인 헬라어로 ‘카타로스’입니다. 이 카타로스라는 말은 세 가지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첫 번째는 때 묻고 더워진 빨랫감을 깨끗하게 세탁하는 것을 말하고, 두 번째는 금광에서 캐낸 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불순물을 제거하여 순수한 금이나 은과 같은 보석을 가려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농부가 추수한 곡식을 타작하여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버리고 알곡만 모으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카타로스, ‘청결한 마음’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냥 놔두면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그 마음을 더러운 빨래거리를 세탁하듯 깨끗이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 마음을 씻어내야 합니다. 

에베소서 5: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씻는 방법은 말씀으로 세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씻어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면, 그 말씀은 우리 마음에서 세제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고 세탁기를 돌리면 세제가 풀어지면서 빨랫감에 묻어 있는 더러운 때들이 빠져나갑니다. 그리고나서 빨랫감을 꺼내면 더러웠던 것들이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우리의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깨끗하게 세탁하도록 우리의 마음에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계속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이 내 마음을 깨끗하게 세탁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정화입니다.

여러분, 카타르시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주로 문학이나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단언인데, 문학에서는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참한 운명을 보면서 우리가 그를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이나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털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림으로 내 마음에 시원함을 느끼는 것이 카타르시스입니다. 심리학에서도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나 상처를 말이나 어떤 행동을 통해 외부로 드러냄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고 정서적인 안정을 찾는 것을 ‘카타르시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부정적이고 좋지 않는 감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부정적이고 좋지 않는 감정들을 털어내는 것을 카타르시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카타르시스라는 말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카타로스’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림으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그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음으로 우리 마음에 시원함을 느끼게 됩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뿐만 아니라 죄악들까지도 깨끗하게 씻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꾸만 말씀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 마음은 청결한 마음이 되어갑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때, 기도할 때, 또는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 마음이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고, 우리 마음이 청결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자신을 통해서입니다. 금광에서 캐낸 광석은 그 자체로 순금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불순물들이 많이 묻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어날 때 가지고 있는 마음,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상에 노출되고, 세상으로부터 세뇌되어온 우리의 마음에는 불순물들이 너무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불순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은 용광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연단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앙을 위해서 큰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기도 하고, 죽음의 고비도 숱하게 넘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믿음으로 인해 큰 환난과 시련을 겪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정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갖게 해 주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모두 신앙의 연단을 받아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로부터 그 믿음을 크게 칭찬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갑자기 큰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이 다 사라지고, 사랑하는 자식 10명을 하루아침에 잃어야 했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욥은 낙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 중심에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9) 

지금은 잘 모릅니다. 왜 내가 이렇게 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나에게 일어난 이런 일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시련의 과정을 거친 후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순금 같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정도로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자신이지만, 아직까지 제거되지 못한 불순물들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그는 압니다. 그 모든 불순물들이 이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다 제거되고 하나님 앞에 정결한 신부처럼, 정결한 모습으로 서게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 시련을 겪고 계십니까? 원치 않는 어려움 때문에 지금 너무너무 힘들어하고 계십니까? 왜 내가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잘 알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에게도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련과 고난, 어려움과 힘든 문제를 통과한 후에는 우리도 이전보다 더욱 정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유 없는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지혜나 생각으로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억울하기도 하고, 때로는 낙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한 시련의 이유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시련의 끝은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나를 정금 같이 만들기 위함입니다. 

마음이 청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서 불순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 불순물을 내 힘으로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다짐을 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 고행을 해 보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 깊숙이에 묻어 있는 불순물들이 제거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불순물도 쉽게 제거하지 못할진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불순물이 어찌 쉽게 제거될 수 있겠습니까? 

곡식 안에 포함된 쭉정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쭉정이를 바람에 날려버려야 합니다. 알곡 속에 쭉정이가 남아 있는 것은 청결한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알곡과 쭉정이라는 두 개의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쭉정이는 반드시 날려버리고, 알곡만 남겨놓아야 합니다. 그게 청결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카타로스’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은 카타로스가 아닙니다. 뺄래감에 더러운 때가 묻어있는 것도 카타로스가 아니고, 광석 속에 금이 아닌 다른 물질이 함유되어 있는 것은 순금일 수 없어 그것도 카타로스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알곡 속에 쭉정이가 남아 있는 것 역시 카타로스 - 청결한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두 가지가 섞여 있으면 카타로스가 아닙니다. 필요 없는 것들은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청결한 마음 - 카타로스가 됩니다. 
  우리 안에 두 개의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함께 자리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동경하는 마음을 제거해야만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집니다. 

한신대학교 목회상담학 교수였던 정태기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 클레어몬트(Claremont) 대학에서 상담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한 5년 6개월쯤 지났을 때, 하루는 지도교수가 불러서 갔더니 공부를 그만 두라 말합니다. 이유는 ‘상담학이 너한테 맞지 않으니 그만 두는 게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원을 했습니다. ‘한 학기만 시간을 주시면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고요. 그래서 6개월의 시간을 벌었고, 그 6개월 동안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6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교수를 만났는데, 이번에도 교수님은 ‘이 공부가 자네에게 맞지 않으니 다른 공부를 하는 게 더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는 너무너무 화가 났습니다. 자기 밑에서 학위를 받겠다고 6년이나 공부를 했는데, 이제 와서 다른 공부를 하라니 너무도 어이가 없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방문을 꽝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앞이 캄캄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기의 어깨를 툭툭 치더랍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교수였습니다. 그리고는 교수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야 싹이 보이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멍 하니 서 있으니까, 교수가 설명을 해 줍니다. “자네를 6년 동안 지켜봤는데, 자네 마음속에 내게 대한 미움이 가득했어. 마음으로는 나를 미워하면서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 마음을 두 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료할 수 있겠나?” 

그 교수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그 동안 지도교수를 무척이나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유학생인 자기의 형편을 조금도 봐주지 않고 너무 쌀쌀맞게 대하고 힘들게 훈련을 시키니까 그 교수가 굉장히 미웠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두고 보자, 학위를 받고 나면 아는 척이나 하나.’ 겉으로는 웃으며 상냥한 척 했지만, 지도교수는 그의 그 속마음을 이미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화가 나서 문을 쾅 닫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야 속마음을 정직하게 드러냄을 보게 되었고,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자 목회상담학자가 될 싹이 보인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교수가 그에게 숙제를 하나 내 주는데, 마태복음 5:8절을 가지고 논문을 써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필 이 본문일까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본문을 연구하면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는 이 말씀이, ‘마음이 하나인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는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마음이 하나인 사람,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로 물들어 있는 마음을 말씀으로 씻어 깨끗하게 하고, 연단을 통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 그게 복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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