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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고전 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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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고전 8:1-13)
    
두 주 전에 자동차 MOT를 받기 위해 킹스턴에 갔습니다.  자동차를 개러지에 맡기고 뉴몰든까지 약 3-40분 거리를 운동삼아 걸었습니다.   걷는 도중 맞은편에 말끔한 정장을 하고 담배연기를 날리며 씩씩하게 걷는 한 젊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신사가 코앞에 가까이 왔는데 로만칼라를 한 잘생긴 사람이었습니다.   복장으로 보아서는 성공회나 카톨릭 신부 아니면 개신교 목사인데 제 눈에 또 들어온 것은 그 손에 들린 파이프 담배였습니다.  그 신사를 막 지나치면서 제 입에서 나온 말이 ‘그 사람 참…’이었습니다.   파이프를 즐기는 것은 그분의 자유지만 그래도 그 복장에 좀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의 생각이고 교우 여러분이 저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게 잘못입니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목사인 줄 뻔히 아는 분들 앞에서 제가 담배를 피우며 섬머타운 거리를 걷고, 펍에서 맥주잔 들고 건배를 외친다면 저의 행동을 거리낌 없이 받아줄 분들이 우리 중에 얼마나 될까요?   그래도 목사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분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합니까?   흡연과 음주가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며 구원의 도리를 벗어난 죄가 되기 때문입니까?    아니지요.   

그렇다면 왜 목회자의 그런 모습이 보기에 편치 못합니까?    한국의 기독교 문화가 목사의 음주와 흡연을 덕스럽지 않은 것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국의 교회는 이 부분이 완전 오픈되어 괜찮기 때문에 제가 길에서 본 그분은 자유롭게 행동했을까요?   그것도 교단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담배와 술을 개인의 기호식품으로 여기는 자유로운 교단도 있지만 절제하고 금하는 교단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와 비진리를 가르는 차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덕을 세우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지만 담배라는 것은 성경이 기록된 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세상에 나온 것이므로 기독교인의 흡연에 대한 문제가 성경에 거론되지 않습니다.   담배와 술, 음료와 커피, 차, 초콜릿 등 독특한 향이나 맛을 내는 기호식품에 대한 것은 그 시대의 사회 정서와 문화에 따라 각각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도 교리적인 차원의 진리로 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 각자 자기 기준을 가지고 어느 편이 옳고 그른가 토론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정말 궁금한 사람들이나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할 기준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최종의 권위를 성경에 두고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그 판단에 맡깁니다.  기호식품도 식물에 속하는 것이니 식물에 대하여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어떤 원리를 찾아보고 같은 원리에서 적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고린도전서 8장 그리고 10장에서 이와 비슷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고린도전서 8장에 나오는 예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형제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주 두 차례에 걸쳐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이웃 사랑을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은 보다 실제적으로 우리 생활에 연관된 자유의 문제를 중심으로 말씀드립니다. 

고대 고린도에서는 아폴로 신전에 바쳐진 고기들이 시장으로 나와 저렴한 값으로 팔려 일반 서민들은 싼값에 그 고기를 사다 먹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양심을 따라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의 생각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값싼 고기를 사먹고 싶지만 귀신이 붙은 고기를 먹고 혹시라도 부정이 탈까 무서워 절대 먹지 않는 사람이 있고, 양심이 좀 찔리지만 값싼 고기라도 먹어야겠다 하고 눈치를 보며 슬쩍슬쩍 사다 먹는 교인도 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아직 옛습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사람은 우상의 제물 먹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며 양심에 거리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였으니 아직 자유함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상의 제물은 그저 식물에 불과하니 개의치 않고 먹어도 괜찮다는 지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다른 우상들에 대한 생각이 쉽게 정리가 됩니다.  사람들이 신으로 알고 섬기는 하늘과 땅에 있는 어떤 신들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닌 허상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우상제물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아무 것도 아니며 그저 음식에 불과합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이렇게 확실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교인들이 이런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어떤 이들은 이것 때문에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지식을 가진 교인 중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이 약한 교인들을 한심스럽게 여기고 깔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으며 어떤 신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우상은 우리에게 아무런 복이나 해를 끼치지 못하는데 뭐가 무서워서 고기를 못먹느냐?  먹어라. 무엇이든 감사함으로 먹으면 되는데 자유를 줘도 누리지 못하는 겁쟁이들이라 하며 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들은 믿음이 한단계 위에 있는 사람인양 교만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런가하면 고기를 먹지 않는 편에서는 먹고 마시는 교인들을 엉터리 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존경을 받는 분이 우상의 제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마음에 상처를 받아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어라! 목사님이 그럴 수 있어?  이제 보니 가짜 목사인가보네. 예수 믿는 것들도 알고보면 다를 것 없어.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다 마찬가지인데 꼭 예수를 믿어야 하나?  신이고 뭐고 다 필요없고 나 자신을 믿으면 되는거야’ 이런 식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아직 믿음이 단단하지 못하고 성경 지식이 확고하지 못한 사람들의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지고 있는 점입니다.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지만 우상을 섬기던 옛습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교인들은 저렇게 믿음 좋은 분도 여기와서 맘대로 먹는데 나같은 초년생들이야 이정도쯤은 괜찮겠구나 하고 옛날처럼 우상의 집을 수시로 들낙거리고 우상제물도 먹고 마셨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이 좀 찔리기는 했지만 믿음이 좋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담력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나 아폴로 신이나 다 같은 신 아니겠어?  여기서는 여기식대로 따르고 교회 가면 교회식대로 따르면 되는거지 하고 마음이 풀어집니다.   말 그대로 양다리를 걸친 신앙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지식이 있어 자유를 맘껏 누리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너의 지식으로 약한 사람이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우상제물을 먹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자유를 남용하여 약한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그것이 죄라고 책망합니다.   성경은 담배 피고 술 마시는 것이 죄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파이프 담배를 즐기고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지식에 따른 개인의 자유이지만 연약한 누구에겐가 상처와 시험거리가 된다면 그것이 죄가 됩니다.     

제가 길에서 보았던 그분이 누군지도 모르고 또 그분이 파이프 담배를 맛있게 즐기는 것을 제지할 권리도 없으며 그분을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고 영국이며 그분이 속한 교단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취미생활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연약한 어떤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실족할까 염려되었고 그것이 우리 상황이라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여 제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 나라에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었을 때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파이프를 즐겼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 역시 허리춤에 곰방대를 차고 다니며 수시로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초기 한국교회에서 흡연은 그리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문화였습니다.  고신대 이상규 교수가 쓴 글을 보면 화란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언더우드 선교사도 이 점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유로웠고 다른 선교사들도 상당히 자유로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알렌이 입국한 후 10년이 되었을 때부터 지나친 음주와 흡연의 폐단을 목격하고 금주 금연을 권고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금주 금연운동에 관한 이런 재밌는 내용도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도박과 축첩을 금하고, 혼인 장례 등에서의 구습을 타파하고 비합리적인 인습, 비과학적인 의식을 개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금주•단연은 이런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한국 교회가 금주, 금연운동을 추진할 때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신앙상 유익하지 않다는 점,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 그리고 개화 혹은 국민의식 계몽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  …   <그리스도 신문> 1897년 5월 7일자에서는 “담배 먹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편한 것시 만흐니라. 이런 사람은 여러가지 병이 잇나니 힘줄이 약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념통이 더 벌덕 벌덕하고 슈전증이 나고, 안력에 대단히 해롭고 여러가지 병이 만흐니라”고 하면서 금연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금주, 금연 운동의 영향으로 한국 교회는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고 세례를 받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항목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금주와 금연을 신앙생활의 덕으로 여겼고 개인의 건강과 사회와 민족의 계몽과 교육 차원에서 권고했으며 오늘날까지 교회의 미덕과 전통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나친 흡연은 본인의 건강에 해로운 것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불편을 끼치고 비싼 담배값이 지출되어야 하기에 절제하는 분위기며 간접흡연의 피해를 줄이려고 공공장소에서는 금연하도록 법적인 규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대로 끊을 수 없다거나 자유를 외치는 애연가들은 갈수록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며 고독하게 혹은 애연가들끼리 서로 위로하며 설움을 달래야 할 듯 합니다.    

지나친 음주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폭음으로 건강이 상하는 문제는 둘째 치고 취중에 발생하는 온갖 실수와 부끄러운 행동들, 많은 범죄행위가 폭주와 관련이 있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술로 인해 일어나는 부작용을 잘 알면서도 ‘나는 괜찮다’장담하며 즐기는 나의 자유가 언젠가는 후회할 일을 만들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금하고 절제하자 계몽하는데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나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나의 자유를 절제하고 포기하며 가족과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협력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를 따르는 성숙한 신앙이 아닐까요?   

술과 담배는 개인의 기호식품이고 적당히 즐기면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줄 아는 것은 말 그대로 지식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것들이 신앙생활에 덕이 되지 않고 또 건강과 가정경제, 사회문제 등에 폐단이 많기 때문에 금하고 있음을 아는 것 또한 지식입니다.   바른 지식을 가지는 것은 모르고 행동하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식을 가졌는데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빌미로 상대방을 비방하고 정죄한다면 그것이 곧 교만에 해당됩니다.   

성경 어디에 술 담배 먹지말라고 나왔느냐 근거를 대라 하며 교회가 괜히 쓸데없는 규칙을 만들어 피곤하게 한다 불평하거나, 술 담배는 개인의 생활이며 불간섭의 영역이니 사람들 눈치 볼 것 없고 내 편한대로 자유롭게 즐기면 된다 확신하며 음주 흡연 문제로 고민하고 불편해 하는 사람들을 무식한 것들이라 비웃고 큰소리 한다면 자신의 지식으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교만함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직도 술 담배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나 믿음이 자라려나 하고 한심하다는 투로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분이 있다면 그 역시 자신의 지식으로 형제를 대하는 교만함입니다.   

누구든지 어디 가서 술 한잔 나눌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동이 아니지 하고 내 양심이 나를 고발하면 거기서 멈추는 것이 건강한 믿음입니다.   거리끼는 양심으로 무엇을 하는 것은 이미 그것이 나에게 속된 것이 되었고 악한 것이 되었으니 더 나가지 말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 나 개인의 성숙한 믿음을 위해서도 좋고 덕을 세우는 일에도 좋은 결단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합니다.   식물은 먹지 않아도 손해볼 것 없고 먹어도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먹어도 그만 먹지 않아도 크게 섭섭할 일이 아닙니다.   그깟 고기 한 점 먹지 않는다고 영양실조에 걸립니까?  다른 사람 상관하지 않고 맘껏 먹었다고 대단한 영양을 공급했거나 내 믿음 강하다고 자랑할거리라도 됩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유함이 약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간단한 원리입니다.    

우상제물처럼 술과 담배도 아니 그 어떤 식물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저는 술 한모금 입에 대지 않고 살았습니다’하거나 ‘저는 술이 하나님이 주신 좋은 음식인 줄 알고 감사함으로 즐기며 살았습니다’하면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겠습니까?   먹고 마시지 않아도 손해될 것이 없고 먹고 마신다고 유익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로 작정하였을 때 그런 정도의 지식은 가졌습니다.  

그런데 지식보다 더 아름답고 뛰어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나의 지식으로 형제를 다치게 할 수도 죽일 수도 있지만 그 지식이 사랑으로 사용되면 이웃을 살리고 격려하는 능력이 됩니다.   나의 지식으로 내 자유를 맘껏 행사할 권리가 있지만 나의 형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자유를 포기할 때 그 지식은 형제를 살리는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의 윈리입니다.   사랑 없는 지식은 나를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내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고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알아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삽시다.   교회는 내가 가진 지식으로 이웃을 판단하고 상처주며 정죄하는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며 위로하고 나눠주며 살려주고 세워주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너희 자유함을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하신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왜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 때문에 제지를 받아야 하느냐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일이라 했습니다.  지식이 있는 내가 나의 자유를 사용하지 않고 형제의 약함을 세워줄 때 사랑의 법이 실천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식물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고기든 맘대로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고기가 아닌 깨끗한 고기를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 때문에 다른 형제가 실족한다면 나는 그의 영혼을 위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 했으니 그 결단은 사랑에서 나온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일평생 한 사람을 전도하지 못할지라도 이웃이 나로 인해 넘어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또한 한 영혼을 건지는 전도가 됨을 기억합시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교우들을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술 담배를 하던 하지 않던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고받는데 어떤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 형제자매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가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하신 말씀을 늘 마음에 두고 믿음생활 열심히 합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나로 인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내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도 함께 구원 얻도록 섬기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덕을 세우는 복된 한 주간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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