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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을 이어가는 비결 (대하 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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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이어가는 비결 (대하 1:11-17)

솔로몬이 왕이 되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이스라엘에서는 엄청난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 행사는 기브온에 있는 산당으로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행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이유는 그 규모가 엄청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왕의 행차가 아니라, 국가적 축제였습니다. 우선 천부장, 백부장 등 군대 지휘관들이 총 동원되었습니다. 재판관들도 참여하여 사법부도 함께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각 지역의 지도자들인 방백과 족장들이 모두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 행사가 기브온에서 열린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제사를 위해 솔로몬이 갈 수 있는 곳은 두 곳이었습니다. 하나는 다윗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장막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다윗이 왕이 된 후에 모신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곳은 기브온이었습니다. 

기브온에는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회막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브살렐이 만든 놋 제단이 있었습니다. 거룩한 것들이 두 군데에 흩어져 있었던 이유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곳 중에서 기브온의 산당이 규모가 컸기 때문에 많은 제사를 위해서는 기브온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이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 내용이 2-6절에 나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실까요?  <솔로몬이 온 이스라엘의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재판관들과 온 이스라엘의 방백들과 족장들에게 명령하여  솔로몬이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하나님의 회막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이 거기에 있음이라  다윗이 전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장막을 쳐 두었으므로 그 궤는 다윗이 이미 기럇여아림에서부터 그것을 위하여 준비한 곳으로 메어 올렸고  옛적에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브살렐이 지은 놋제단은 여호와의 장막 앞에 있더라 솔로몬이 회중과 더불어 나아가서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 제단에 솔로몬이 이르러 그 위에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아멘.  

그렇다면 솔로몬이 이처럼 거창한 행사를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를 통해서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둘째로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로 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안정된 통치를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입장에서는 이런 국가적 대행사를 추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왕이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혼란은 그쳤고, 솔로몬의 나라는 든든하게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실까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사 심히 창대하게 하시니라> 그의 왕권이 견고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말씀이 역대상 29장 23절 이하에도 나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께서 주신 왕위에 앉아 아버지 다윗을 이어 왕이 되어 형통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모든 방백과 용사와 다윗 왕의 여러 아들들이 솔로몬 왕에게 복종하니  여호와께서 솔로몬을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심히 크게 하시고 또 왕의 위엄을 그에게 주사 그전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뛰어나게 하셨더라> 

이미 그를 흔들던 정적들은 이미 다 제거되었습니다. 열왕기상 2장에 이러한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솔로몬의 형인 <아도니야>였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을 후계자로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다윗이 아니들어 약해지자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을 모아 마치 반란을 일으키듯 왕의 자리를 노렸습니다. 그리고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신하 중 최고인 요압 총사령관과 종교지도자로서 최고인 아비아달 제사장까지 아도니야에게 가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도니야의 계획을 무산시키셨습니다. 그는 실패했고,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솔로몬은 형님을 용서했습니다. 그렇지만 후에 아도니야가 아버지 다윗의 후처인 아비삭이란 여인에게 욕심을 품자 이 패륜의 마음을 가진 형을 벌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요압> 장군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신하들 중 최고이면서도 동시에 최고의 적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부터 다윗과 함께 한 사람이었으나, 군권을 손에 쥐고 무소불위의 힘을 누리면서 다윗의 의중과 상관없는 악한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반드시 요압을 제거하라고 유언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늙어서도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고 아도니야를 앞세워 계속 권력을 노렸고, 아도나야의 반란이 실패로 끝나면서 요압도 제거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제사장 <아비아달>이었습니다. 그는 사무엘을 키웠던 엘리 제사장의 자손인데, 아도니야의 반란에 가담하였습니다. 제사장이 자신의 일에 충성하지 않고, 정치와 권력에 탐닉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솔로몬은 그를 추방하여 제사장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마지막은 <시므이>였는데,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길 때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비방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시므이도 브나야의 손에 죽게 됩니다. 어쨌든 이런 모든 일들이 정리가 되면서 솔로몬의 나라는 안정되었습니다. 열왕기상 2장 46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령하매 그가 나가서 시므이를 치니 그가 죽은지라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  

자 보세요. 솔로몬의 나라는 이미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거창하게 기브온 산당에 가서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아도, 더 이상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솔로몬은 어떻게 했나요? 이처럼 온 백성을 동원하여 하나님께 거창하게 나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지만,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대개 사람들은 언제 하나님을 찾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입니다. 위기가 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평소에 전혀 기도 같은 것은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새벽기도회에 나오면 걱정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다는 증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내일부터 새벽기도 나가려고 했는데, 괜히 목사님이 걱정 끼치겠다, 좀 더 쉬고.....> 이러지 말고 나오십시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들 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여러분, 만약 솔로몬도 그렇게 했다면 그는 언제 하나님께 나아가야 했을까요? 그것은 아도니야가 산수를 쳐서 요압 장군, 아비아달 제사장 등을 모아 왕의 되었다고 선포하면서 축제를 열던 바로 그 시간, 이미 나라가 아도니야에게로 넘어간 것처럼 보였을 때가 솔로몬에게는 최고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나가서 제사하고 부르짖는다면 바로 이 때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그를 힘들게 할 위협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본문을 보면 솔로몬은 최선을 다해, 온 힘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아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와 기도,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은 일상 속에서 늘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믿음은 항상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렵든지, 형통하든지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다 그러하였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창세기 12장 8-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아멘. 아브라함은 계속 양떼를 몰고 이동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는 데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또 창세기 13장 18절에도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어디에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상관없이 제단을 쌓고 경배했습니다. 

또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시편 16편 7절은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7편 15절을 보면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편 57편 8절을 보면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밤에, 새벽에 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길 때도, 왕이 되었을 때에도, 죄를 지었을 때에도, 언제나 하나님께로 나갔습니다. 이게 다윗의 신앙의 일상적 모습입니다.  

다니엘은 또 어떻습니까?  어리석은 다리오 왕은 간신들의 꼬임에 넘어갔습니다. 한 달 동안 그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오직 왕에게만 기도하게 했습니다. 만약 이를 어기면 사자 굴에 넣는다고 했습니다. 그 악한 신하들은 다니엘에게서 다른 흠을 찾지 못하자, 그의 기도 생활을 근거로 무너뜨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 때 다니엘은 어떻게 했나요?  

다니엘서 6장 10절을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사자 굴을 각오하고도 변함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전에 하던 대로>란 말입니다. 그의 기도생활은 어려움을 당했기 때문에 시작된 게 아닙니다. 아무 어려움이 없을 때도 그는 기도했습니다. 총리로 승승장구할 때도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깊은 단계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이미 그의 삶에 녹아 있었고, 신앙이 곧 삶이었으며, 예배와 기도가 그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게 있어서 그것을 얻고자 할 때만 하나님께 나가는 게 아니라, 늘 하나님께 나가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미 잘 되고 있지만 남녀가 연애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만나서 무엇인가를 얻어 내려고 하는 사람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냥 함께 있는 게 좋아서, 그래서 아무 일도 없어도 늘 함께 하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도 그렇습니다. 필요한 때만 나아가는 신앙은 자신을 위한 이기적 신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데 불과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항상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리고 예배하는 신앙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 신앙입니다. 그 사람은 목적은 무엇을 얻어내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그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진짜 신앙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을 때 더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매달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을 때 더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예배하지 않아도, 하나님 없어도 잘 살 것처럼 모든 것이 갖추어져 갈 때, 더 열심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형통할 때 더 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게 오늘 본문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기브온 제사를 통해 솔로몬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께 소원을 아뢸 기회를 얻었습니다. 7절을 보세요. <그 날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하시니> 아멘. 늘 예배하고 기도하다보면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허락이 임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필요할 때만 고개를 내미는 얄미운 사람이 되지 말고, 늘 하나님께 나아가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알고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무엇을 구했습니까? 잘 아시는 것처럼 그는 <지혜와 지식>을 구했습니다. 10절을 보세요.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하니>라고 했지요. 열왕기상 3장 9절에서는 <듣는 마음>을 달라고 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백성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것들을 구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엄청나게 주셨습니다. 

11-12절을 다같이 읽읍시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하시니라> 

그 후 솔로몬은 엄청난 것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지식도 주시고, 그의 나라는 부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 주셨습니다. 14절 이하는 그가 얼마나 창대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 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금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 

여러분 잘 보십시오. 솔로몬은 정적을 제거하고 왕권은 견고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브온으로 올라가 경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지 않아도 견고하던 그의 나라가 더 견고해지고, 더 부강해졌습니다.
 
예배는 잘 되는 것을 더 잘 되게 하는 힘입니다. 기도는 흥왕하던 사람을 더 흥왕하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잘 될 때 더 하나님을 찾아 경배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만약 예배가 중단되고, 기도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정도 은행에 저축한 사람이 술과 도박으로 다 까먹은 후에 다시 저축한다면 힘들겠지요. 그러나 중간에 까먹지 않고 꾸준히 저축을 계속한다면 은행 잔고가 점점 늘어나겠지요. 

이와 똑같습니다. 예배와 기도가 중단되면 한 때 견고했던 인생도 수렁으로 떨어집니다. 가졌던 것도 잃게 됩니다. 그 때서야 다시 하나님께로 나간다면 이건 정말 큰 손실입니다. 그 때 예배하고 부르짖어 다시 만회한다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한 것에 비하여 너무도 손실이 많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좀 살만 하면 또 하나님을 소홀히 한다면, 다시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증거가 솔로몬 자신입니다. 나중에 솔로몬이 늙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찾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예배가 식었습니다. 기도가 중단되었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 도취되어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우상에게 빠졌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나라는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고, 사방에서 적들이 쳐들어 왔고, 그가 죽은 후 나라는 둘로 쪼개져서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지파만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젊어서 예배의 사람, 기도의 사람일 때 얻었던 그 모든 축복을 스스로 까먹게 되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예배가 평생 이어지길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가 평생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절대 중간에 식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형편이 어떻게 변하든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멈추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이게 바로 축복에서 축복으로 나아가는 비결입니다. 축복을 이어나가는 비결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평생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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