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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속한 사람 (대하 24: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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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속한 사람 (대하 24:15-22)  

<요아스>는 남왕국 유다의 8대 왕으로서 주전 835-796년 사이에 재위한 왕입니다. 그의 통치 말년 어느 날 유다에서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 내용도 충격이요, 사건이 벌어진 장소도 충격이었습니다. 내용이란 요아스 왕이 제사장 스가랴를 죽인 것이고, 그 장소는 놀랍게도 하나님께 제사하는 성전 뜰이었습니다. 짐승의 피가 흘러야 할 곳에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의 피가 흘렀습니다. 

이 사건이 더 큰 충격이었던 까닭은 죽임을 당한 스가랴가 왕의 고모인 여호사브앗과 고모부인 여호야다의 핏줄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에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3장 35절에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가랴가 오늘 본문의 스가랴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야다에게 바라갸라는 아들이 있었고, 스가랴는 바라갸의 아들인 셈이지요. 이렇게 되면 스가랴는 여호야다의 손자가 됩니다. 어쨌든 스가랴는 고모와 고모부의 핏줄이었고, 더구나 거룩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요아스 왕은 죽여서는 안 될 거룩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비극의 뒤에는 긴 배경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달랴>라는 여인을 아십니까? 당시는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는데, 남 왕국 유다에 여호사밧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여호사밧이 치명적 잘못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귀어서는 안 될 사람을 가까이 한 것입니다. 그가 가까이 한 사람은 북 왕국의 왕 아합이었습니다. 아합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시돈의 공주로서 아합에게 시집온 이세벨이란 간악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아내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했고, 당시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를 만들어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은 아합과 사돈지간이 되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 여호사밧의 며느리가 되었는데, 바로 그 며느리가 <아달랴>입니다. 

여러분, 이런 아달랴가 부모에게 배운 그대로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고, 간악하고 탐욕스러웠습니다. 그녀는 여호사밧의 가정에 불행을 몰고 왔습니다. 아달랴는 후에 남편 <여호람>왕을 악한 왕이 되게 했고, 여호람은 얼마 못되어 죽었습니다. 

역대하 21장 20절을 보면 <여러 날 후 이 년 만에 그의 창자가 그 병으로 말미암아 빠져나오매 그가 그 심한 병으로 죽으니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그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여호람이 죽은 후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는데, 그는 일 년 만에 죽게 됩니다. 역대하 22장 2절을 보면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요 오므리의 손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하시야는 북 왕국 이스라엘, 즉 외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때 마침 북 왕국에 예후의 반란이 일어나 아하시야는 거기서 죽게 됩니다. 아달랴는 남편도 아들도 불행하게 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아달랴는 아들이 죽은 소식을 접한 후 손자를 왕이 되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손자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이런 간악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와중에서 고모부인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고모 여호사브앗이 간신히 아기 하나를 숨겼는데, 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아스입니다. 그들은 요아스를 성전에서 육 년 동안 숨겨 키웠고,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달랴를 축출하고 그를 왕이 되게 했습니다. 그 후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결혼도 주선했고,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러니 요아스 왕의 입장에서 보면 여호야다 부부는 부모보다 더 고마운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평생을 두고 갚아도 다 못 갚을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핏줄인 스가랴를 죽인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 뜰에서 죽였습니다. 도대체 왜 배은망덕하게 은인의 핏줄을 살해했을까요? 

표면적으로 보면 스가랴의 책망하는 말이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세요.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스가랴는 성전 뜰에서 왕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것을 책망했고, 왕과 백성들은 이런 책망이 귀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아스가 스가랴를 죽인 데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벗어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호야다는 요아스에게 아버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감히 그의 가르침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호야다가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본문을 다했습니다. 본문 24장 2절을 보십시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라고 했지요. 

언뜻 보면 요아스가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신실한 왕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요아스 왕이 하나님을 섬긴 것은 결코 기쁨에서 우러난 게 아니었습니다. 여호야다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여호댜다의 간섭을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해 보고 싶었습니다. 여호야다의 울타리 안에서는 왕 다운 왕이 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게다가 백성들이 자신보다 여호야다를 더 따르고 존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백성들이 얼마나 여호야다를 존경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장례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5-16절을 보세요. <여호야다가 나이가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백삼십 세라  무리가 다윗 성 여러 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의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그는 왕들의 무덤에 묻힐 만큼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것도 요아스로서는 참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왕보다 더 존경을 받다니....> 

이러다 보니 요아스는 어서 여호야다가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여호야다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해 보고 싶었습니다. <여호야다를 벗어나고 싶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이런 마음을 이용하는 간교한 세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여호야다가 죽기를 기다리던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아차리고, 여호야다의 장례식이 끝난 후 요아스 왕의 마음에 불을 붙였습니다. 17-18절을 보세요.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왕이시여, 그 동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여호야다가 공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동안 그가 왕이나 진배없었습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여호야다의 흔적을 지우시고 왕의 나라를 세우십시오. 여호야다의 흔적을 지우려면 먼저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부터 버려야 합니다. 이웃 나라 모두가 섬기는 아세라를 섬기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가 앞장서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충동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 깨우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19절을 봅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라> 결국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여호야다의 핏줄인 스가랴를 직접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생각한 것처럼 성전 뜰에서 의로운 스가랴를 죽여 피를 흘리게 된 것입니다. 은혜를 악으로 갚은 셈이지요. 

여러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없으십니까?  자녀들은 나이가 들면서 떠나고 싶어 합니다. 저희 집 5학년짜리 막내가 어느 날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아빠, 나 대학생 되면 원룸 얻어서 나갈 거야...> 전 충격을 받았습니다. <괘씸한 녀석, 벌써 나갈 생각부터 하다니....> 아마 대학생 언니들이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얻어들은 모양입니다. 

현대 문명 자체가 벗어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문화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학자인 <데리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해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게 해체됩니다. 가정도, 학교도, 나중에는 국가도 해체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에 소속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다보니 결혼도 굴레로 여겨 결혼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무 간섭도 없이 유유자적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벗어나는 삶>은 고단한 삶입니다. 혼자 사는 것이 쉽습니까?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최근에는 세계적 경제 불황이 어이지면서 미국, 캐나다 등에서도 집을 떠났던 자녀들이 다시 부모님 집으로 돌아오는 추세라고 합니다. 벗어난 삶이 고단해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아버지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지만, 결국은 빈털터리가 되고 돼지와 더불어 살아야 할 처지로 전락했을 때, 그는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 벗어나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게다가 <벗어나는 삶>은 일탈과 타락을 부추깁니다.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는 부모님의 눈이 무서워 나쁜 짓을 못합니다. 부모님의 감시와 꾸중이 두렵고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때는 안전하게 삽니다. 그러나 부모를 떠나면, 혼자 있게 되면, 그 때부터 온갖 유혹에 넘어지게 됩니다. 타락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벗어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사단은 우리가 혼자 있을 때를 노려 유혹합니다.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한 것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리석은 방백들과 어울려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마음대로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일 주년 말에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려고 올라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러 백성 중에서 모든 방백들을 다 죽이고 노략한 물건을 다메섹 왕에게로 보내니라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들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  

여기 <일 주년 말에>란 표현이 나오지요? 이 표현은 <그 해 말에>, 혹은 <해가 바뀔 무렵에>란 뜻입니다. 스가랴를 성전 뜰에서 죽이는 악을 행한 후 일 년도 채 지나기 전에 아람이 유다를 침공하여 요아스로 하여금 하나님과 여호야다를 배반하게 한 방백들을 다 죽이고 물건을 노략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벗어나 봐도 별 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벗어나면 완전한 자유일까요? 아닙니다. 빛에서 벗어나는 순간 어둠의 포로가 됩니다. 하나님을 벗어나는 그 순간 사단의 포로가 됩니다. 결코 자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유만이 축복된 자유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을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속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43장 1절의 유명한 말씀을 아시지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벗어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소속됨으로 얻는 자유>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종이란 주인에게 속해 있습니다. 자유가 없을 것 같지요.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한없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을 <스스로 되는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함으로 고통을 느낀다면 누가 스스로 종이 되려 하겠습니까?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주님께 소속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됩니다. 여러분, 이번에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축구대표팀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선물했습니다.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일본에게 이겼기에 승리의 기쁨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선수들이 군 면제 혜택을 받으려면 1분이라도 출전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중 한 선수는 한 번도 출전하지 못했는데, 일본과의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 출전 기회를 얻어 혜택을 함께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선수는 골을 넣은 것도 아니고, 수비에서 공을 세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홍명보 감독의 팀에 속해 있었기에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홍명보의 사람들>은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구원도 그렇습니다. 셈과 함과 야벳이 대단히 믿음이 좋고 훌륭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왜입니까? 노아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노아의 며느리들은 그 남편들에게 속해 있었기에, 노아의 아내도 노아에게 속해 있었기에 그들은 함께 방주를 탄 것입니다. 그들 여덟 명은 <노아와 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아스 왕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계속 남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여호야다의 사람으로 계속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는 은혜를 배반하고 여호야다에게서 벗어나려 했고, 그 결과 하나님에게서도 벗어나게 되었고, 마지막에는 눈이 어두워 스가랴까지 죽였고, 결국 일 년도 되기 전에 파국을 맞았습니다. 그의 최후는 어떻습니까? 

25절을 보세요. <요아스가 크게 부상하매 적군이 그를 버리고 간 후에 그의 신하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말미암아 반역하여 그를 그의 침상에서 쳐죽인지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왕들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 결국 그는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왕들의 무덤에도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교우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는 죄 많고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사람이 되기만 하면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십시오. 성령님께 속하십시오. 결코 바깥에 눈길을 주지 마십시오. 영원히 주님의 사람으로 축복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속해서 살면서 복종하던 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나, 사단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해야 합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주 되신 주 앞에 나가 /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우리 모두 이렇게 살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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