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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들, 디모데야! (딤전 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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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디모데야! (딤전 1:18-20)

딸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아들은 기대되는 모습에서 사랑한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아들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말입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명언입니다. 그가 필리핀 어느 섬에서 기록으로 남긴 아버지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고 아버지였습니다.   
  
“오 하나님! 저의 아들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의 약함을 알만큼 강하고, 두려울 때 스스로를 직시할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고, 정당한 패배에 비굴하거나 위축되지 않으며, 이겼을 때 거칠지 않고 겸손하게 하옵소서, 행동은 없으면서 소원만 부풀어 있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아는 우리 아들이 되게 해 주시옵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옵건대 안이하고 편안한 길로만 가게 하지 마시고, 어려움과 도전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들, 디모데야!” 그 음성 속에 아버지 하나님의 기대가 스며 나옵니다.  

  
󰊱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르라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18절)
  
“너를 지도한 예언”이란 다른 말로 “예언과 같은 명령”입니다. 장차 될 일의 씨앗이 예언입니다.  
  
어떤 점쟁이가 어린 프로이드를 보고 프로이드의 부모에게 댁의 자녀냐 묻고 “이 아이가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부모들은 자기 아들 프로이드가 위대한 사람이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점쟁이의 말은 예언이었습니다. 프로이드는 어릴 적부터 “너는 특별하다. 너는 훌륭하게 될꺼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가 훌륭하게 된 것은 어릴 때부터 들어온 예언의 성취입니다. 
  
예언자란 앞일에 대한 예고자로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자를 말합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비밀한 계시의 말씀입니다. 
  
나폴레옹은 “마음에 영웅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디모데의 마음에 예언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언은 미래를 바라보고 살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예언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예언이 있는 사람은 예언이 지도자입니다. 예언이 있는 사람은 예언에 이끌려 갑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도록 하라”(고전14:1)
  
이명박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으로 있을 때 누가 그랬답니다. “정회장은 만수(萬數)고 이사장은 구천수(九千數)는 되겠다.” 그때 이 사장은 손 사례를 치며 “난 구천수가 아니다. 구천수로는 만수를 못 당한다. 내가 만수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구천수가 아니라 단수(單數)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을 이깁니다. 단순한 것에 힘이 있습니다. 아마추어는 복잡하고 프로페셔널은 단순합니다. 성령을 받으세요. 성령은 단순하게 하십니다.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성령의 검으로 끊어버립니다.    
  
예언은 미래를 향해 도전하는 능력입니다. 예언이 미래를 향해 도전하게 합니다. 예언이 내일의 나를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성령이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게 합니다. 예언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렘33:14)  
  
하나님 아버지는 예언을 주시고 예언을 성취하여 주십니다.
 
  
󰊲 선한 싸움을 싸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18절) 예언을 이루기 위해 싸우는 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고후10:4)
  
싸움의 승패는 어떤 무기로 싸우느냐에 달렸습니다. 

1532년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오합지졸 168명을 거느리고 8만명의 군대를 거느린 잉카제국 황제 아타왈파를 사로잡았습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스페인은 강철로 만든 투구와 쇠칼과 창으로 무장한데 비해 잉카제국의 군대는 돌도끼와 나무곤봉이 주무기였습니다. 강철 무기와 석재무기의 싸움에서 군대의 수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인생이란 그가 지닌 우수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예언의 힘으로 됩니다. 
예언자들은 모두 야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야인이란 예절이 없는 사람,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 시골사람, 야만적인 사람을 연상합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가죽을 걸치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였습니다. 
  
이사야서나 예례미야를 예언서라고 합니다. 예언을 기록한 책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꿈을 시나리오로 작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차 될 일을 말하면 예언이고 내가 장차 될 모습을 기록하면 예언서가 됩니다. 나의 예언서, 나의 십계명이 필요합니다. 
  
선한 싸움은 예언을 이루기 위한 싸움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이 이루실 비전과 계획입니다. 우리는 예언을 가로막는 세력을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고 선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합니다. 진리의 띠, 의의 호심경,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으로 완전무장해야 합니다(엡6:11-17).
  
한일 합병 직후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은 민립대학을 설립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총독부가 선수를 쳐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여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경성 제국대학 개교식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개교식 하는날 YMCA 직원들을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민립대학이 개교하는 날이니 함께 가봅시다.” 청년들이 말뜻을 못 알아듣고 어리둥절 하자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 일본놈들의 관립대학(官立大學)은 얼마 안 가서 우리 민립대학(民立大學)이 될꺼란 말이오.” 월남 선생의 예언대로 해방이 되고 경성제국 대학은 국립 서울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예언을 지도자로 삼으면 지도자가 되게 합니다. 

   
󰊳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19절) 
  
디모데는 바울의 친아들이 아니라 믿음의 아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입니다. 그의 믿음은 겉 믿음이 아니라 속에 있는 믿음, 거짓 없는 믿음입니다(딤전1:5).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시51:6)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예선될 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은 중심을 열어보십니다. 믿음을 보시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는 믿음이 연결고리입니다. 이것이 빠지면 하나님과 단절됩니다. 가정도, 인간관계도 믿음이 로열티royalty 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19절) 

파선이 무엇입니까? 풍랑을 만난 배가 바위에 부딪쳐 파손된 것입니다. 
  
눈에 보인다고 다 믿을 것도 아니고, 안 보인다고 못 믿을 것도 아닙니다. 외모는 가자가 진짜 같고 진자가 가짜 같습니다. 독서벗이 더 하려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착한 양심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착한 양심이란 성령으로 거듭난 도덕심을 말합니다. 정확한 판단이 전제된 건전한 도덕의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음은 양심입니다. 양심이 약하면 사람도 약합니다.     
  착한 양심을 가질 때 두렵지 않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로 자유롭고 당당하기 바랍니다.   
  
A. 쇼펜하우어는 “명예는 밖에 나타난 양심이며, 양심은 안에 자리 잡은 명예이다”라고 했습니다. 양심은 천명의 증인보다 강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8:33)
  
양심을 버리고 믿음이 파선된 사람의 이름을 지적합니다. 그 가운데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했습니다(20절). 이 사람들은 착한 양심 없이 믿음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허하고 위선입니다. 
  
믿음 없는 착한 양심은 불가능합니다. 믿음과 양심이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믿음과 양심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 있는 곳에 양심이 있고 양심 있는 곳에 믿음도 있습니다. 믿음은 양심의 원천이며, 양심은 믿음을 증거합니다.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3:8,9)

다윗은 자기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의 왕권을 빼앗으려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음이 아파 흐느껴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롭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아들아!”(삼하18:33)
  
이것이 아버지입니다. 패륜아이지만 그래도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도 잘못해도 자비를 베푸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조건 ‘내 아들’ ‘내 딸’ 입니다. 그 자식이 아무리 몹쓸 짓을 했더라도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합니다.  
  
신성을 모독하지 맙시다. 신성이란 하나님의 성품이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성을 가진 자로 하나님의 친구,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 
  
성령을 받아 예언하고 예언대로 되시기 바랍니다.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기 바랍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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