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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자가 없도다 (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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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자가 없도다 (전 4:1-6)
  

강한 부정은 역설적으로 강한 긍정을 나타낼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무슨 잘못을 했을 때 부모님은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 나는 다신 너를 보지 않겠다.”라고 강하게 부정적으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 부모님의 말씀은, “너 같이 미운 자식은 영원히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알아듣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면 그 자식은 바보이지요. 
이 부모님의 말씀에는, 그와 정반대로 자식을 사랑하기에 자식이 바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전도서는 삶의 허무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그러나 이 고백은, ‘삶은 허무하기에 목적도 없이 흐르는 세월에 몸을 맡기고 되는대로 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생은 살만한 것이다. 삶에 애정을 가져라.’라는 삶을 긍정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하나님 없는 삶은 허무한 것이다. 정말 허무한 것이다. 지식도, 부귀도, 영화도, 쾌락도,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삶은 의미를 갖게 된다. 인생은 살만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꼭 모시고 살라.’ 입니다.
전도서는 이렇게 강한 부정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강한 긍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솔로몬은 모순된 역사를 지적하면서 인간 삶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여기 보십시오! 
‘어떤 자가 복이 있느냐? 죽은 지 오랜 죽은 자가 복이 있다. 아니 차라리 출생하지 않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염세적이고, 허무적인 표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모순된 사회라는 강한 부정의 표현에는 역사의 모순을 개선하라는 강한 긍정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무차별 흉기를 휘두르는 이른바 ‘묻지마 범죄’로 시민들의 공포와 불안이 커지고 있습니다. 지난 8월 18일 경기도 의정부, 20일 서울 삼전동, 21일 경기도 수원, 22일 서울 여의도 등 ‘묻지마 범죄’는 때와 장소, 이유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고 있습니다.

진화생물학자인 데이비드 바래시와 정신과 의사인 주디스 이브 립턴 부부는 '화풀이 본능'(고빛샘 옮김, 명랑한지성 펴냄)에서 복수와 보복, 화풀이를 진화론으로 풀어냈습니다.저자가 내세운 '3R(retaliation·redirecting aggression·revenge) 개념' 중 보복과 화풀이는 동물의 본능이라고 할 정도로 진화한 생물 대부분에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새끼를 위협하는 생물학자를 공격하려던 검독수리 어미는 상대가 자신보다 수 배 크다는 것을 깨닫고, 근처를 비행하던 굴뚝새 무리를 추격합니다.

저녁 사료가 늦어지면 서열 높은 암말은 짜증이 나 옆에 있던 어린 수말을 걷어차기 일쑤입니다. 
일종의 화풀이지요. 
모든 동물의 본능이라고 해서 인간의 보복과 화풀이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건 너. 그건 너 때문이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삶을 자기가 책임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됨의 기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사회현상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 사회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지 않는가?’
‘이 사회는 실패자, 낙오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몰인정한 사회로 변질되고 있지 않는가?’
‘이 사회는 소외자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는 따뜻한 손길을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한 사회로 변질 되고 있지 않는가?’ 

고민이 많아집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슬퍼집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려고 국민소득 2만 불, 3만 불 타령을 했는가?’
오늘 읽은 본문에는 이런 모순된 사회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할지에 대한 몇 가지 지혜를 줍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모순된 사회

1절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재판정에서 무고한 백성이 권력을 가진 관원에게 압박당하고 있었습니다. 
피해자는 울면서 눈물로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호소에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책이 없었습니다. 

정의가 추상같아야 할 법정에서 약한 자가 유린되고 착취되는 부정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전무죄이고, 무전유죄입니다. 
사실 보통 사람들은 못 느끼지만 교통사고를 당했다든지 민사나 형사사건에 한번 쯤 연루돼 본 사람들은, 이런 검사를 만나고 저런 변호사를 만나면서 재판을 받아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사회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할 법정에서조차 불의와 부정이 판을 친다는 절망감입니다. 
터무니없이 높은 수임료를 받아 가난한 자를 울리는 변호사들! 
돈 있는 사람, 돈 없는 사람 가려서 죄를 묻는 검사들! 
전관예우랍시고 인간관계의 사슬에 묶여 판결을 굽게 하는 판사들! 
이들이 다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이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모순된 듯 보입니다. 
불의가 의를 누르고 승리합니다. 
악이 선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가립니다.

2. 이런 모순된 역사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의 지혜를 살펴봅니다.

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는 결국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16절 “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어떤 사람이 왕이 되어 많은 백성을 다스리게 되고, 백성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가 일어나더니 그 왕을 내치더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왕 노릇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것 또한 의미 없는 일이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허무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한국의 전임 대통령들만큼 권력의 허무를 절감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대통령직을 퇴임한 후에도 그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일정한 역할을 하던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완전히 박살이 나요. 
권좌에 있을 때에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죽은 듯이 있다가 권좌에서 내려오자마자 벌떼처럼 무슨 죄인 다루듯이 덤벼들고 있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했을 때 ‘월간 조선’ 별책 부록의 부제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기 위해서는 김대중을 고발하지 않을 수 없다.’였습니다. 
그 말이 정당한지 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권력무상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역사를 사람이 주물럭거리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마 28:18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가족의 운명을, 한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권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독교 역사학자인 찰스 베어드는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고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착각하기 쉽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맷돌로 표현한 것은 아주 철저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가긴 하지만 철저하게 갈라냅니다.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불의와 악은 망하게 하시고 의와 선은 승리하게 하십니다.
갈 6:7-9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역사의 주권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봉사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바르게 살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역사의 모순을 제거하는 데에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5-6절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팔짱을 끼고’ 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결국 모든 것은 헛된 것인데 뭔가 성취해보려고 아등바등 댈 필요가 어디 있느냐? 대충 대충 그럭저럭 살다가 가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두 가지 삶의 태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① 사람들은 자기가 이뤄놓은 것들이 영원할 줄 믿고, 많은 사람들이 오래 기억해 줄줄 믿고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잘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지위, 인기, 명예도 지나놓고 보면 의미 없는 것이고, 실상이 없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데에 소중한 삶을 걸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② 반면,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모든 성취는 헛된 것인데 뭘 그렇게 아등바등 댈 필요가 있느냐 그럭저럭 살다가 죽지라고 냉소주의에 빠지는데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본문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모순으로 가득 찬 역사를 깨뜨리는 것은 역사에 회의하는 방관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거는 성도들입니다. 
성경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0장 20~22절에는 그 유명한 ‘남은 자’ 사상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남은 자!
세상이 온통 정신없이 돌아갈 때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는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남은 자에 의해서 역사는 변화되고, 개혁되고, 발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그러면 남은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 하는 자! 
즉 하나님께만 생명을 건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만 철저한 사람! 
하나님이 인정하심에만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의 보장하심에 참 평안을 누리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남은 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순으로 가득한 역사를 남은 자가 되어 더 좋은 세상으로 변화시키길 바랍니다.   

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는 한사람이라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1절~12절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삶은 서로 어울려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원수는 한 사람이라도 많고, 친구는 백 사람이라도 적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합니다. 
두 사람이면 한 사람이 넘어져도 다른 사람이 손을 잡고 일으켜 줍니다. 
두 사람이면 공격을 받아도 등을 맞대고 싸우니까 안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애초부터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창조 때를 보십시오! 
창 2: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다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을 지으신 다음에는 ‘좋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이 외로움을 느끼니까, 그게 좋지 않아서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애초부터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군은 패전한 독일에게 전쟁 배상금을 물렸습니다. 
독일로서는 100년 동안을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정도로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결국 배상금을 물기는커녕 히틀러가 등장하여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의 전철을 밟지 않고, 성경의 원칙대로 패전국을 다뤘습니다. 

마샬정책을 펴서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의 경제 재건을 도왔습니다. 
그랬더니 일본은 미국을 가장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미국에 대하여 동경심과 콤플렉스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원수를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친화력,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감화력으로 모순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웃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는 위로자가 되길 축원합니다.
원수는 하나라도 많고 친구는 백이라도 적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모순된 듯 보입니다. 
불의가 의를 누르고 승리합니다. 
악이 선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순된 역사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은 자가 되어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자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더불어 살아가는 좋은 세상 만들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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