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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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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조각가 로댕은 프랑스 국립미술학교 입학시험에 3번이나 낙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호구지책으로 은세공이 되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날마다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동료가“눈에 보이는 나뭇잎만 만들지 말고 내면의 것을 만들어 보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때 로댕은 순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점을 지적당한 것입니다. 사실 그는 그때까지 먹고 살기 위해서 보이는 것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는 비로소 내면을 보는 눈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4년 후 마침내 불후의 명작“생각하는 사람”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몰두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한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소중한 것은 모두 깊은 곳에 감춰져 있습니다. 진주조개는 심해에서 서식하고 있습니다. 황금은 지표에 있지 않고 깊은 땅속에 있습니다. 신안 앞 바다의 보물도 깊은 바다 속에서 발굴했습니다. 예술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모든 것들은 얕은 생각에서는 나올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고뇌하는 사람의 깊은 생각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도 이러한데 하물며 영적인 문제인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겠습니까? 깊이 생각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고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 2장 4절~5절에 말씀하시기를“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은을 구하듯, 감춰진 보배를 찾듯 깊이 있게 찾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인 히브리서 3장 1절 말씀에“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하셨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 예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건축에 쓸데없어 버려야할 돌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여 깨달은 사람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건축물에 있어서 버릴 돌이 아니라 가장 고귀한 머릿돌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7절~8절 말씀에“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알고 멸시하며 조롱하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면 어떠한 분일까요? 

一.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얼핏 생각해보면 시골 나사렛 동네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멸시하여 말하기를“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한복음 1:46)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타락한 유대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듣기 싫어한 나머지 예수님을 살려둘 가치가 없는 죄인처럼 취급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후 예수님의 몸인 교회는 로마의 황제 네로로부터 약2백년간 참혹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가치 없는 사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국기독교 초기에도 교회는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기독교가 우리 조상들이 섬겼던 미신보다 못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에도 교회는 핍박을 받아 수많은 성도들이 고문을 받았고, 많은 성도와 주의 종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기독교의 교리가 일본의 국시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볼세비키 혁명 이후로 공산당에 의해 죽어간 성도들의 수는 셀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6.25전후에도 엄청난 성도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의 이념을 펼치는데 교회가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천대받고 멸시받을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전능자이십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에 비길 분이 아니십니다. 우주의 설계자, 우주의 건설자, 우주의 관리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3절에 말씀하시기를“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8절 말씀에는“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행적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이 곳곳에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나실 때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 가셨습니다. 광풍노도가 휘몰아치던 갈릴리바다를 향해“잔잔하라”하신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바다가 즉시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귀신들이 떨고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소경의 눈이 뜨여졌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간질병자가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치유의 역사는 지금도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이와 같은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송장 썩는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어린아이 도시락 하나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었으나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후 40일간 세상에 더 계시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나라로 승천하실 때의 상황에 대해 사도행전 1장 8절~11절에 기록하기를“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8~11) 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예수님은 단순한 사람이 아닌 인성과 신성을 함께 지닌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이 1821년 5월 5일 유배지 세인트 헤레나드 섬에서 죽으면서“나사렛 예수는 승리자요 나는 패배자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백악관 뒤뜰의 흰 눈 위에 엎드려 간절하게 눈물로 기도하며 도움을 구했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계정치사의 가장 위대한 정치인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 집무실 카펫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을 치듯 도움을 간청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천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전쟁영웅 맥아더 장군이, 태평양 전쟁의 승리를 위해 밤을 새워 기도하며 도움을 구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국인들이 영국 역사상 가장 존경한다는 처칠이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식음을 전패하고 기도로 도움을 구한 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발명왕 에디슨과 그의 어머니가 하루 두 시간씩 에디슨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간청하며 기도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처럼 세계를 움직인 위인들이 한결 같이 받들어 섬긴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二.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간결하게, 가장 분명하게 나타낸 곳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이 말씀은 신구약 성경전체의 요약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1. 선행(先行)적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다니기 전 언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들은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그때 우리들은 죄인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에“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5장 16절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습니다.“택했다”는 말은 많은 사람가운데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는“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나와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행적 사랑을 입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한 빈민촌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길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는데 천사같이 황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없이 생각나고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의 고민은 이러 했습니다. 

첫째,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의 진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
둘째, 신분의 격차가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합니다. 내가 비록 왕 자이지만 왕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신분의 격차 따위는 상 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릴 수가 있을까? 
셋째, 무슨 문제가 있던 모든 책임은 내가 질 수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가 내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고, 저도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고민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연구도 하고, 주변의 의견도 구했습니다.

그는 많은 고민 끝에 결론을 얻었습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가서 조그마한 방 하나를 얻어 목수가 됩니다.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의 풍습을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하는 일을 같이 하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인과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듯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왔노라”고 자신의 진심을 설명했습니다. 비로소 이 여인은 왕자의 깊은 사랑을 알고, 믿고, 깨닫고, 받아들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이 마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2.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구약성경 호세아서의 저자인 호세아 선지자를 사랑의 선지자라 부릅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은“구원”이란 뜻으로 예수와 의미가 같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음란한 여인인“고멜”을 아내로 맞아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창녀인 아내는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때마다 호세아는 찾아가서 몸값을 지불하고 아내를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집을 나가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호세아 개인의 사랑이 아니라 범죄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표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끊임없는 사랑,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모습은 꼭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과 같습니다. 배신을 합니다. 도망을 갑니다. 잘 변합니다. 환경 따라 변하고, 기분 따라 변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조석지변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려고 때로는 질병을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물질적인 어려움을 당하도록 하시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가정의 어려움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 한없이 넓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한복음 3:16)하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세상이란 우주를 가리킵니다(요한복음 1:10). 또한 세상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에 물든 세력을 가리킵니다(요한복음 15:8).

세상이 이와 같이 하나님을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의 범위를 넓혀야 하겠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교회 전체를 품는 사랑, 더 나아가 한국교회를 품는 사랑, 더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를 품는 사랑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1895년 겨울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북극의 한 지점에서 노르웨이의 탐험가인 난센이 인류 최초로 북극의 환경을 살폈습니다. 그는 돌로 오두막을 짓고 바다코끼리 가죽으로 지붕을 덮은 곳에서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지냈습니다. 그때 그는 바다의 깊이를 알아보려고 긴 줄을 바다로 던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줄을 밀어 넣어도 바닥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 날 그는 탐험일기에다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이곳 북극의 바다 깊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다.”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무한한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 3:16)하셨는데,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인간이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끝없이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의해 우리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도었습니다. 

三.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그 안에 행복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행복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부족함이 없이 잘 갖춰진 환경으로부터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은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사치스러운 환경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은 종이 위에 태양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 그림에서 햇빛이 발산되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음과 같다.”그렇습니다. 행복은 부족함이 없는 환경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조사보고에 의하면 60년 전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것이 72가지였고, 절대로 필요한 것이 18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생활에 필요한 것이 5백가지이고, 절대로 필요한 것은 50가지라고 합니다. 이렇게 더 많은 것을 가진 현대인들이 과거 사람들보다 더 행복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더 불만이 많고 불행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결코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이나 문명의 발달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행복을 차자 더없이 사치스러운 삶을 살아보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가 깨닫고 전도서 1장 2절,14절에 말하기를“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행복은 결코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행복에 대해 말씀하시기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하셨습니다. 환경을 초월한 행복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원하십니까? 예수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몇 년 전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이 몸통만 가지고 태어난 닉 부이치치라는 호주의 젊은이가 우리나라를 다녀갔습니다. 그 몸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도 그는 너무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과 정신이 너무 밝고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온통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건강한 사람들에게“감사의 조건을 찾아 감사하세요.”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나는 팔다리가 없지만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피조물이니까요. 여러분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38개국을 다니며 강연을 했고, 네 명의 대통령을 만나 간증했고, 5개국 국회에서 연설을 했고, 지금까지 그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이 3백7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3만여 곳에서 강연 초청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도 한때는 자살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죽은 후에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릴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생각해보니까 도저히 죽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15살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어느 장님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는데 제자들이“이 사람이 장님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대답하십니다. 이 젊은이가 그 말씀을 읽는 순간“나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부터 그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나는 하나님이 내 몸을 얼마든지 정상적으로 만들어 주실 능력이 있음을 믿는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만들어 주시면 나는 지금처럼 사역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이렇게 두시는 것에 감사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현대인들에게 말하기를“행복은 자신의 가치를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희망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희망은 포기하지 않는 한 당신 곁에 있습니다.”라고 권고했습니다. 팔다리가 건강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웃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가까워지면 실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세계가 우러러보는 위인도 그의 곁에서 수종드는 하인의 눈에는 범인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가까이가면 갈수록 흠과 티와 허물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반대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범인처럼 보입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참모습을 깨닫고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나의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참된 행복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인 히브리서 3장 1절 말씀에“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무더웠던 긴 여름이 지나고 하늘이 높고 말이 살지는 계절, 가을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생명과 축복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깊은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감동하심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깨닫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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