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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먼저 돌을 (요 7:53-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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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먼저 돌을 (요 7:53-8:11)


먼저 “나를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기도”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이 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에 따라, 국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 형이다. 새벽 시간에 일어나 설친다. 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 형이다. 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 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제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 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style)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떠나야 할 시간에」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可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향(香) 다 날아가고 뭐 땜에 비싼 돈 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 확 부어버려. 맹물 부어줄까 그래.”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세마포와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그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안 되니까「붙여 놓은 것」아니냐” 
너무 큰 충격이었다. 생각의 전환, 그렇게 나 자신을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게 있다. 나의 은사(gift)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 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느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섬기라고」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 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ㆍㆍ

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제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 때는 전혀 꿈쩍도 않던 아내가,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 더러 뚜껑 좀 열어달라고 한다. 아내의 변화가 아닌, 나의 변화(變化).

그렇게 철들어진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하느님에게,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평안히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늙어 여생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저는 저의 우둔함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남을 변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게 하는 글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전혀 과오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흔히 완벽주의자라고 합니다. 무엇 하나를 해도 철두철미하게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실수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이기에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연극의 각본처럼 살아지는 것이 아니기에 예기치 못한 일을 벌이기도 하고 생각지 못한 일에 말려들기도 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인연이고 싶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만남이란 좋은 인연의 관계가 있을 수도 있으나 가끔은 악연이라 하는 잘못된 만남도 있다. 친구의 만남, 연인의 만남, 부모형제의 만남, 타인의 만남, 모든 만남은 인연이라는 줄기 따라 가지에 맺힌다.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기 위해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오다 시시각각 우리 곁을 떠나고 있는 젊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갈망의 공허함은 우리 나이엔 누구나 공통으로 느끼는 분모일 것이다.
바람 부는 날이면 가슴이 시려오고, 비라도 내릴라치면 가슴이 먼저 젖어 오고, 겨울의 스산한 바람에 온 몸은 싸~아함으로 퍼져 가고, 창가에 서서 홀로 즐겨 마시던 커피도 누군가를 필요로 하면서 같이 마시고 싶고 늘 즐겨 듣던 음악도 누군가와 함께 듣고 싶어진다.

사람이 그리워지고 사람이 만나고픈 사소한 것까지도 그리움이 되어 버리고 아쉬움이 되어 버리는 결코 어떤 것에도 만족과 머무름 없이 새로운 외면의 세계를 향해서 자꾸자꾸 뻗어 오르고 싶어 한다.
한살 한살 세월에 물들어 가고 있는 빛깔은 형체도 알 수 없는 색깔로 물들이고, 숨겨진 욕망의 파도는 더욱 거센 물살을 일으키고 처참히 부서져 깨어질 줄 알면서도 여전히 바람의 유혹엔 더 없이 무력하기만 솔직히 그런 나이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이 품어야 할 유혹임을, 끝없는 마음의 반란임을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긴 세월 만들어진 내 인연의 숲 안에서 소중한 내 인연들에게도…….
새롭게 다가오는 인연에도 악연으로 기억되지 않게 부끄럽지 않은 진실 된 서로의 메아리로 평화로운 인연의 숲을 만들고 싶다.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연이고 싶습니다.^^*
이 글처럼 우리는 좋은 관계를 맺어가며 살기를 원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오히려 악연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죄를 짓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죄의 경중을 따지지만 실상 큰 죄냐 작은 죄냐를 따지기에 앞서 모두가 죄인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데리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옵니다. 그건 저들이 예수를 흠잡으려는 또 다른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선지자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예수를 잡아오라고 보냈던 아랫사람들조차도 누구도 그 사람처럼 말한 사람은 없다고 하며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 누구도 반박하지 못한 올가미를 씌울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침 좋은 올가미가 하나 생겼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 것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 이 여인을 데리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묻는 것은 예수를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 시험하려고 하는 의도에서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남자는 어디 가고 이 여자만 데리고 왔는가 입니다. 분명 현장에서 잡혔다고 하면 남자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여자만 데리고 왔는가는 참으로 의문입니다. 
어쨌든 예수가 함정에 빠진 것은 분명합니다. 여자를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고 여자를 죽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동안 쭉 이야기하던 자비는 어디에 갔느냐고 할 때에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때 예수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몸을 굽히셔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땅에 쓰십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저들이 다그치자 비로소 예수님이 한 말씀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무언가를 땅에 쓰십니다.
일순 시끌벅적 하던 무리들 가운데 침묵이 흐릅니다.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한 시간이 잠시 흐릅니다. 이윽고는 하나씩 하나씩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모두가 그 자리를 떠나가고 여자만 홀로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사람들이 왜 말없이 돌아섰을까? 아니 도대체 예수님은 땅에 뭐라고 쓰신 걸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미루어 짐작하기는 그들 자신을 돌아보도록 촉구하는 어떤 말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역시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사람들은 모두가 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를 범하며 살아갑니다. 꼭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잘못들을 저지릅니다. 단순하게 십계명만 가지고 말한다고 해도 그 십계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우리 가운데 누가 있겠습니까? 

아니 보다 쉽게 신명기의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든 계명의 첫째와 둘째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 6:6을 통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셨고 예수님 또한 마 9:13을 통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엘 2:13 또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이요 죄인을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우리를 죗값을 담당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음을 깨달아 주님 앞에서 긍휼을 베풀며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간음한 여인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못된 속셈을 가지고 주님 앞에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먼저 그 의도가 순수하지 못합니다. 여인을 정죄하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비록 저들이 반드시 죽을 것이나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드셨습니다. 

그랬기에 아담이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자기 아내의 이름을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의 하와라 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람을 부르실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람이 무슨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우상 장사를 하며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불러 믿음의 조상 삼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믿음의 조상으로 든든히 세워지기까지 여전히 믿음 없는 모습으로 잘못을 저지르곤 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런 아브람을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운 손길로 붙들어 주시어 아브라함으로 그 이름도 바꾸어 주셨고 그의 상급이요 방패가 되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믿고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시험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치 않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를 시험할 수 있겠고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단 한 가지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신 말 3:10의 말씀 외엔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였다가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먼저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한참 동안 땅 위에 무언가를 쓰시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계속해서 답변하시기를 재촉합니다. 이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십니다.
순간 시끌벅적하던 무리들이 조용해집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떠들어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 그들은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습니다.

그토록 여자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다 그 자리를 떠나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예 주님!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 누구도 단 한 사람 여자를 정죄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세상에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살아간다고 해도 전혀 실수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니 남들을 말할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완전합니까? 우리는 완전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서 어쩌고저쩌고 한다면 남들 또한 나에 대해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너는 왜 밤낮 그러느냐?”고 하지만 그러는 나는 얼마나 나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겉으로는 잘 하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그렇지 못한 모습이 얼마든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우리도 용서하여야 한다는 것이요 그럴 때 계속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하여 주시는 사랑 안에 머물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리고는 이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한 종이 있는데 자그마치 일만 달란트나 빚을 졌습니다. 오늘 우리 돈으로 따져보면 6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입니다. 

그래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하니 그 종이 엎드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니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집에서 나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그러니까 천만 원 빚진 동료를 만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 하였더니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기를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였다는 것입니다. 

한데도 그는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니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그 말씀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의인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돌을 던지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렇다면 죄를 지은 사람은 그냥 내버려 두라는 뜻이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러니까 조용히 그 사람을 바로 세워나가라는 것입니다. 온 동네 소문내고 비판하지 말고 오히려 그 사람을 바로 잡아 나가라고 하십니다. 
바울 사도 역시 골 3:12~13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권면합니다.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갈 6:1~2에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과 더불어 나를 바로 세우는 기회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그 은혜처럼 아니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져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자가 아닌 온전히 세워나가기 위한 수고와 중보의 기도를 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병이 오는 가장 큰 원인”이라는 글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나무라면 젖 빨던 아이가 그 자리에서 생 똥을 싼다. 실화다. 아이의 수유를 위해 아무리 대 자연의 정기담긴 음식을 정성 다해 먹는다 해도 사람들과 불화하면 젖 먹는 아이가 먹은 것은 엄마 사랑 아닌 엄마의 홧독이다.
수유기에 시름시름 앓는 아이, 잘 자라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가족 관계를 살펴보라. 느닷없이 아기에게 병변이 왔다면 틀림없이 부부 싸움이나 고부간의 갈등에 한 원인이 있음이다. 면박을 받아서 서글픈 여인은 그냥 훌쩍훌쩍 울면서 돌아 앉아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그 순간, 아기 밖에는 자신이 기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상의 피는 그 맛이 대략 달고 짭짤하다. 그러나 애(오장육부)를 태우거나 화가 나면 홧김에 의해 쓰고 떫으며 흑갈색을 띤 강한 산성의 피로 변해 버린다. 피는 생명이다. 그러면 산성을 좋아하는 호산세균들이 혈액 안에 급속히 팽창하게 된다. 그것들이 인체 중에서 가장 방비가 허술한 부위로 몰려들어 암 등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독일에서 인간이 내는 화에 대해 실험을 했는데 그 결과는 매우 섬뜩하였다.
극도로 화가 났을 때 입에서 나오는 공기, 그러니까 홧김을 비닐에 받아 농축 시켜 보니 0.5cc의 노란 액체가 모였다. 이 액체의 0.5cc를 돼지에게 주사했더니 돼지가 비명을 지르며 그만 즉사 해 버리더란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얘기인가?
홧김을 호박이나 오이 같은 넝쿨의 생장점에 대고 불면 생장점은 하루도 못가 이내 시들어 버린다. 또 홧김은 공기를 금방 독성화시킨다.
우리 속담에 “장맛이 나쁘면 집안이 기운다”라는 말이 있는데, 메주를 담가서 새끼줄로 엮어 벽이나 천장에 걸어두는데 그러면 집안의 온갖 미생물이 메주에 달라붙어 그것을 발효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 가족 간에 다툼이 잦다면 그 다툼의 홧김에 의해 메주 균이 죽게 된다. 그래서 메주가 꺼멓게 되고 결국 장맛이 고약해진다.

이렇듯 무서운 것이 홧김인데, 잔뜩 화를 품고서 아기나 사람을 대하면 어찌 될까?
싸움이 잦은 집에서 사는 아이들이 끊임없이 온몸에 부스럼과 종기를 달고 사는 것은 그 이유다. 노여운 기운은 항상 그 죄 없는 아이들의 혈관 속을 흐른다. 
화를 내는 사람을 보면 얼굴이 새파래지거나 새하얗게 변하며 비정상적인 사고와 흐린 판단력이 찰나를 지배하는 것이어서 느닷없이 휘발유를 끼얹고 방화를 하거나 기물을 닥치는 대로 부숴 버린다. 즉, 일순 미쳐 있는 것이다. 

잠시 후, 화가 풀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그렇지 그 순간은 분명 미친 것이다. 짧은 순간 그는 정신병자가 됐던 것이다. 또, 그의 육체는 그 순간 식욕이 정지되며 피는 거꾸로 순행하고 명치끝이 바짝 긴장되며 간은 강한 타격으로 극심하게 발작하는 것이다.
잠시 후, 화가 풀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그렇지 그 찰나에 중병환자가 된 것이었다. 그 짧은 순간 그의 몸은 사경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노여움과 증오, 화는 그 사람의 정신과 몸에 심한 타격을 입히며 그 앞에 서서 꼼짝없이 분풀이 당하는 사람의 정신과 몸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는 것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서로간의 사랑과 극진한 보살핌에 힘 얻어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라고 빵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씨알” 안에 “인의예지신”의 바른 품성 키울 재료가 들어 있다. 하늘 사랑이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빛이다.
보이는 빛은 몸을 치료하고, 보이지 않는 빛은 마음을 돕는 치료 광선이 된다. 빛은 진리다. 빛 앞에 어둠은 소멸한다.
빛의 힘으로 사람은 살기에, 원래 사람은 빛의 자녀다. 곧 사람은 육체를 지닌 빛이다. 광명하여 만물을 살려야 하는 존재다. 칠흑 같은 밤하늘의 별이다. 어둔 세상에 “원래 태양” 반사할 스타이다.
“화”는 도대체 왜 나는 것일까?

간단하다.
상대방의 생각이 내 마음의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에서이다.
즉, 내가 기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 속에서 화가 끓어 오른 것이다.
그 때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간에서 피가 솟구쳐 피를 토하게 된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리를 지른 것이다.
“화”는 내 욕망의 좌절에서 기인 한다.
또, “화”를 분석해 보면 “화”의 원인은 이미 지난 일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집안에서 무언가 큰 잘못을 했다 치자.
그러니 잘못한 시점은 이미 지난 과거지사이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금이다.
즉 현재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을, 현재 파악하여 화를 터트린 것이다.
그러니 "화'를 터트린 시점은 잘못한 과거에 대하여 미래가 된다.
이런 미친 짓이 어디 있는가?

과거의 일 때문에 미래를 향해 화를 내고 있었다니!
과거의 잘못은 지나간 것이라 하여 과오(過誤)라 한다. 
과거의 것은 “용서라는 큰 바다”에 던지지 않고서는 없어지지 않는다. 
자애는 무서운 교훈이다.
용서라는 턱 없이 큰 포용함에 한 없이 뉘우치고 재범(再犯)하지 않는다. 
담장 높은 교도소의 형벌은 거듭 전과 2범, 전과 3범 더 큰 죄수를 만들고, 품어 주는 자비는 새로 거듭 난 삶을 살게 한다. 
다 들으시고도 다음에 화를 내신다면, 화를 참으면 병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자신에게는 위로가 되겠으나, 상대를 불태웠을 것임을 반드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주옥같은 향기로운 말…….”이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말을 하는데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한 사람이 평생 5백만 마디의 말을 한다는 것이다.
원석도 갈고 다듬으면 보석이 되듯 말도 갈고 닦고 다듬으면 보석처럼 빛나는 예술이 된다.

같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라. 그 곳에서는 히트곡이 여기서는 소음이 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다. 말에도 온도가 있으니 썰렁한 말 대신 화끈한 말을 써라.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열 올리지 말고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지 말라. 체로 거르듯 곱게 말해도 불량률은 생기게 마련이다.

상대방을 보며 말하라. 눈이 맞아야 마음도 맞게 된다. 풍부한 예화를 들어가며 말하라. 예화는 말의 맛을 내는 훌륭한 천연 조미료이다.

한번 한 말을 두 번 다시 하지를 말라. 듣는 사람을 지겹게 하려면 그렇게 하라.
일관성 있게 말하라. 믿음을 잃으면 진실도 거짓이 되어 버린다.

말을 독점 말고 상대방에게도 기회를 주어라. 대화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교류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줘라. 말을 자꾸 가로채면 돈 빼앗긴 것보다 더 기분 나쁘다.

내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상대방의 의견도 옳다고 받아들여라.
죽는 소리를 하지 말라. 죽는 소리를 하면 천하장사도 살아남지 못한다.

상대방이 말할 때는 열심히 경청하라. 지방방송은 자신의 무식함을 나타내는 신호다. 불평불만을 입에서 꺼내지 말라. 불평불만은 불운의 동업자다.

재판관이 아니라면 시시비비를 가리려 말라. 옳고 그름은 시간이 판결한다.
눈은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표정으로도 말을 하라.
조리 있게 말하라. 전개가 잘못되면 동쪽이 서쪽 된다.

결코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을 감싸주는 것이 덕망 있는 사람의 태도다.
편집하며 말하라. 분위기에 맞게 넣고 빼면 차원 높은 예술이 된다.
미운 사람에게 각별히 대하여라. 각별하게 대해주면 적군도 아군이 된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을 향해 쏘아올린 화살이 자신의 가슴에 명중된다.

재미있게 말하라. 사람들이 돈 내고 극장가는 것도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선한 말로 기분 좋게 해주어라. 그래야 좋은 기의 파장이 주위를 둘러싼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말을 하지 말라. 듣고 싶어 하는 얘기하기에도 바쁜 세상이다. 말에도 맛이 있다. 입맛 떨어지는 말을 하지 말고 감칠 맛나는 말을 하라. 

또박또박 알아듣도록 말하라. 속으로 웅얼거리면 염불하는지 욕하는지 남들은 모른다.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과는 가까이 말라.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 

올바른 생각을 많이 하라. 올바른 생각을 많이 하면 올바른 말이 나오게 된다. 
부정적인 말은 하지도 듣지도 전하지도 말라. 부정적인 말은 부정 타는 말이다. 

모르면 이해될 때까지 열 번이라도 물어라. 묻는 것은 결례가 아니다.
밝은 음색을 만들어 말하라. 듣기 좋은 소리는 음악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상대방을 높여서 말하라. 말의 예절은 몸으로 하는 예절보다 윗자리에 있다. 칭찬, 감사, 사랑의 말을 많이 사용하라. 그렇게 하면 사람이 따른다. 

공통 화제를 선택하라. 화제가 잘못되면 남의 다리를 긁는 셈이 된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사람은 경솔한 사람이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라. 

대상에 맞는 말을 하라.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듯 좋아하는 말도 다르게 마련이다. 말로 입은 상처는 평생 간다. 말에는 지우개가 없으니 조심해서 말하라.

품위 있는 말을 사용하라. 자신이 하는 말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낸다. 자만, 교만, 거만은 적을 만드는 언어다. 자신을 낮춰 겸손하게 말하라.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하지 말라. 그것은 임종할 때 쓰는 말이다. 표정을 지으며 온 몸으로 말하라. 드라마 이상의 효과가 나타난다.

활기 있게 말하라. 생동감은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원동력이다. 솔직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행하라. 그것이 승리자의 길이다.

말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라. 실언이 나쁜 것이 아니라 변명이 나쁘다. 실언을 했을 때는 곧바로 사과하라.

말에는 메아리의 효과가 있다. 자신이 한 말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말이 씨가 된다.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라. 

말하는 방법을 전문가에게 배워라. 스스로는 잘하는지 못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

이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대안 없는 비판자가 아니라 화목을 이루어나가는 아름다운 언어의 예술가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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