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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 1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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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찬양하라 (시 150:1-6)

 
내 용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가운데 음악이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제 생각에는 신앙의 깊은 표현이 음악을 떠나서는 불가능할 때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세 가지의 관계를 떠나지 못하고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입니다. 이 세 가지의 관계가 언제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기를 노력합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사람이 일평생 접근하며 살아가야 할 대상이고, 이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서 절대적으로 사랑의 관계로 연결되어져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관계를 연결지어주는 것으로서 감정이라는 것이 작용해야 되고 그 감정을 작용하는 데는 음악이라는 힘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가장 중요한 연결체가 예배라는 것인데 그 예배는 성가대의 송영이라고 하는 음악으로 시작해서 송영이라고 하는 음악으로 끝을 맺도록 예배의 모범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 초기 때부터 성전 안에서 성가대가 성가를 불러서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를 가져왔습니다. 

우리 목사들에게 아주 존경받는 20세기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 선생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기도를 드리는 일이고, 두 번째 하는 일이 음악 감상을 했다고 발표를 했는데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모차르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인간의 깊은 영혼을 움직이는 음악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의 음악을 평생 들었다고 했습니다. 

시편은 기도와 찬양으로 엮어져있는데 히브리 민족성은 음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아주 잘한 것으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동안 나라 형편이 가난하고 약소민족으로 늘 눌려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음악인이 세계무대에서는 크게 배출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사정이 달라지리라 봅니다. 지금 보십시오. 

K-POP이 세계를 흔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민족성은 본래부터 노래를 좋아하는 백성입니다. 생활 가운데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감정을 그 하고 있는 일에 맞추어서 노래로 표현한 민족입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가면서 부르는 노래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면 나무를 해서 등에다 잔뜩 걸머지고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땀을 흘리면서도 그 고난을 해소하는 노래가 있어서 즐겁게 했습니다. 지금은 모 심는 일이 기계화 되었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엎드려서 하나씩 하나씩 논에다 모를 심었는데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 모를 심으면서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모를 심으면서 그 노래를 부르면 힘든 고난을 잊어버립니다. 또, 여섯 명이 양쪽에서 어깨에 장대를 꽂아서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을 하면서도 그냥 가는 게 아닙니다. 장단을 맞추어서 “어기어차 어기어차!” 하면서 발을 맞추어서 재미있게 했습니다. 시집살이 하는 며느리가 부르는 노래도 따로 있습니다. “고초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보다 더 매울쏜가?” 그러면 고난이 없어지는 겁니다. 하다못해 사람이 죽어서 상여를 매고 나가면서도 그 슬픔과 고통을 이기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어어야!” 상두꾼이 종소리를 쩔렁쩔렁 흔들면서 부르면 모두 따라서 “어어어야!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 하면서 “딸네 집에 갔더니 술 한 잔도 안 주고!” 이렇게 고난을 다 노래로 소화시켰습니다.

또 시체를 땅에 묻을 때 부르는 노래도 따로 있었습니다. 집터를 닦으면서도 부르는 노래가 따로 있었습니다. “여기다 터를 닦고 천년만년 살고 지고 어야!” 모든 노래가 다 있습니다. 제가 잘 알고 지낸 교회 권사님과 집사님 부부는 때만 있으면 추억을 평생 이야기하면서 웃으시는 부부가 계셨습니다. 옛날에는 시골에서 결혼식하면 그날 저녁은 신랑 친구들이 반드시 술판을 벌렸습니다. 그러면 빼놓을 수 없는 순서가 신랑 친구들이 요청을 해서 신부가 와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신랑을 거꾸로 매달아놓고 두들겨 패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신부가 자기 신랑이 얻어맞으니까 할 수 없이 와서 노래를 한 곡 불렀습니다. 문화적으로 시골에서는 어느 집이나 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도 끌려 나갔으니까 노래를 한 곡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셨지 않습니까? 무슨 노래를 불렀느냐 하면….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 가 만나리!” 이 찬송을 부르셨답니다. 그래서 신랑이 “아니, 첫날부터 요단강을 건너가자고 하느냐?” 그분에게 저는 이 말을 10번도 더 들었습니다. 앉기만 하면 그 소리를 하며 깔깔 대고 웃으셨습니다. 왜 그 노래를 부르셨냐고 물었더니 아는 노래가 그거 밖에 없어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슬퍼서 그 서러운 역사 때문에 문학이 비애 문학으로 발전했습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리 한국의 가수가 히트송을 부르려면 이별가를 불러야 했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 “허공” “이별의 부산 정거장” “비 내리는 호남선” “목포의 눈물” “그때 그 사람” 다 이별가입니다. 비가 오고 헤어지고 울어야 사람의 감정을 건드렸습니다. 지금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독일어인지 프랑스어인지 분간이 안갑니다.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이어령 씨의 “흙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책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거기 보면 비애 문학으로 발전하는 우리나라의 이 말의 표현이 소리가 나는 것은 다 운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새가 막 노래하는 것도 “새가 울어요.” 이렇게 “꼬끼오!” 첫닭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송아지도 울어요.” 모든 짐승의 소리를 우는 것으로 표현하고, 하다못해 문풍지를 발랐는데 그 문풍지에 매달린 창호지가 바람에 “푸욱” 소리를 내면 “문풍지가 운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집을 짓는 목수들이 집을 지을 때 약간 삐뚤어지면 “기둥이 울었다”고 해서 고쳤습니다. 

옷을 만드는 여인들이 옷깃이 조금만 틀리면 “여기가 조금 울었습니다. 고치십시오.” 다 울었습니다. 역사 때문입니다. 제가 보니까 파티가 열리면 남미 사람들은 춤을 춥니다. 하루 종일 춤을 춥니다. 지치지도 않습니다. 삼바 문화입니다. 쿵짝쿵짝 하면서 흔들어 대면서 하루 종일 춤추며 놉니다. 미국 사람들은 보니까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커피 한잔이나 와인 한잔 들고서 끝없이 서서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모이면 노래 불러야 합니다. 노래 못 부르게 하면 큰일 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노래를 좋아하느냐 하면 온 세상에 노래방 문화가 이렇게 발전한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노래 부릅니다. 한국의 음악은 본래 부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창이라는 것입니다. 음악이 있어서 이 화음을 맞춘다는 것은 교회 공헌입니다. 저는 특별히 심포니 오케스트라 같은 것을 생각하면 거기에 큰 진리가 있는데 우리 성가대는 보통 네 가지의 음색을 가지고 화음을 맞추지 않습니까? 소프라노 하는 사람, 알토, 테너, 베이스, 혹은 바리톤을 해서 화음을 맞추는데 다 각자 자기 소리를 내는데 아주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 아름다운 화음에는 반드시 몇 가지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지휘자가 있어야 합니다. 

지휘자 명령에 순종해야 음악이 됩니다. 두 번째는 반주자 기악 소리가 여기에 합쳐져야 음악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가 소리를 낼 때만 내야 됩니다. 아무 때나 내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한 파트만 빠져도 음악이 안 됩니다. 여기에 교회 공동체의 진리가 하나 들어있는데 그것이 하나라도 안 될 때 전체 작품은 망쳐버리게 됩니다. 화음이 지닌 신비를 우리가 잘 터득하면 어느 공동체든지 아주 훌륭한 발전을 가져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가대의 발전사의 기초를 보면 모우리 선교사(E. M. Mowry)가 평양의 숭실학교 교사로 있었을 때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중의 하나인 장대현교회에서 성가대를 조직하고 4부 합창의 훈련을 시켜서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성가대를 만들었습니다. 

모우리 선교사는 다시 밴드부를 조직해서 우리나라 기악 발전에 기초를 놓았고, 그때 멤버로서 우리나라의 유명한 음악가 현제명, 박태준, 김세형, 김동진 씨가 다 그때 멤버들이었습니다. 장대현교회 성가 대원이었던 김인식 씨가 서울에 와서 성가 합창을 위해서 크게 공헌을 했고 한국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 합창단을 창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합창단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가 공헌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 서울에 있는 최초의 교회 새문안 교회를 비롯해서 모든 교회들이 성가대를 조직해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가대는 세계적 성가대로 발전을 한 것입니다. 

성가의 유익이 무엇인가? 찬양의 유익함이 무엇인가? 부르는 사람의 영혼의 폭이 넓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찬양을 불러 보십시오. 그 찬양 속에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는 사람의 마음이 열리고 닫히고 하는 문제가 이 찬양에서 많은 영감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따라해 보십시오.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할렐루야! 벌써 보니까 금방 얼굴들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마음이 열립니다. 

제 경험으로 불만 있는 사람은 교회에 와서 찬송가를 안 부릅니다. 입을 딱 닫고 눈을 지극히 감고 따라하지 않습니다.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와서도 요구가 무엇인지 불만스럽게 항상 왔다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에게 좋지 않습니다. 급기야는 그것으로 시험에 걸리게 되고 교회에 대해서 안 좋은 생각이 듭니다. 찬양을 열심히 하면 마음 문이 열리고 듣는 사람의 영혼을 깨워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지나가시다가 찬송가 소리 들으면 반갑지 않습니까? 내 마음을 와서 건드리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회개한 것도 찬송 때문입니다. 

방탕한 저녁에 어디를 지나가다가 찬송가가 들리는데 어머니가 늘 부르시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를 찾아가 본 것이 성 어거스틴이 되는 기초가 되지 않았습니까? 찬송가 소리 하나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문을 여는 힘이 찬송가에 있습니다. 마음을 바꿔야 됩니다. 찬양을 해보십시오. 제가 IMF때 미국에서 소식을 듣고 선교비를 마련해서 서울역에 왔습니다. 수백 명 서울역에서 노숙자들과 하루 저녁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도 노숙자 같이 차려입고 대화를 하면서 그것을 주최하는 선교부에 헌금을 해서 그 수백 명에게 밥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헌금할 테니 이 경비로 사람들 이렇게, 이렇게 밥을 며칠 해주라고 했더니 너무 반갑다고 하면서 저녁마다 수백 명 밥을 해주는데 리어카로 국과 밥을 전달해서 수백 명이 먹는 그 시간에 주최자 측에서는 7~8명이 나란히 서서 그 사람들이 식사 다 끝날 때까지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여러 가지 찬송가를 부르는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와! 이 어려운 시대에 저 형제들이 이 밤에 밥을 해서 따뜻한 식사를 저 노숙자들에게 대접하면서 찬송가를 부르는구나!” 거룩해 보이니까 지나가질 않는 것입니다. 거기 다 참여합니다. “나도 그냥 지나갈 수 없습니다. 찬송가 같이 부르겠습니다.” “그러십시오.” 7~8명이 불렀지만 끝날 때쯤에는 5~60명이 찬송가를 함께 불렀습니다. 찬양은 다른 사람의 영혼의 문을 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예배에는 기도와 찬양과 설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찬양을 제일 즐기십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기도는 날마다 달라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정신 차리기 힘드십니다. 설교는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설교의 신학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면 때렸느니 만졌느니 별 소리가 다 나옵니다. 그런데 찬양은 아무 소리가 없습니다. 찬양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설교는 시사성이 있어서 아무리 잘한 설교도 때가 지나면 그 설교 똑같이 못합니다. 새로 해야 합니다. 찬양은 하나 가지고 영원합니다. 찬송 하나 만들면 100년을 불러도 괜찮습니다. 그대로 불러도 괜찮습니다. 천국에서는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천국 갔는데 무슨 기도를 더 합니까? 천국은 설교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신데 어떤 목사가 거기서 설교를 합니까? 찬양뿐입니다. 2500년 전에 살았던 피타고라스는 음악을 리듬과 선율과 화성의 세 요소로 분리하고 리듬은 우리 육신의 영향, 선율은 정신의 영향, 화성은 영적인데 영향을 미친다고 정의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음악의 힘이 오늘날 여러 곳에서 음악에 다 투자하지 않습니까? 음악 틀어주면 젖소가 젖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축산업자들도 다 스피커로 음악 틀어주면서 젖을 짭니다. 기분 좋으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음악 들려주면 채소도 빨리 성장한다는 것이 과학입니다. 식당에서 템포가 빠른 음악을 틀어주면 손님들이 급하게 먹고 빨리 나가고, 백화점에서 느린 음악을 틀어주면 안 나간답니다. 과학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히브리말로 “찬송하다”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많은 말이 “하랄” “영광을 돌리다.” 이런 말인데, 이것이 “할렐루야”가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왜 이렇게 노래가 많은가? 성경이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찬양하라. 성소에서 찬양하며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라 그의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광대하심을 찬양할지어다. 나팔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라 춤을 추면서 찬양하고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는 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사야 43장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을 왜 창조하셨는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하라고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음악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면 우리 모두의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향해서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희생의 대명사, 존경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어머니 노래”가 있는 것입니다.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그래서 어머니 찬양 노래가 생겼고, 선생님은 고마운 분이라 존경해서 “스승의 노래”가 생겼고,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도 있습니다. “남편에게 바치는 노래”는 영원히 안 나올 거 같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세 가지 노래를 배운 기억이 납니다. 

“최영 장군의 노래”는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즉, 물질 욕심을 버리고 살라고 해서 어린이들에게 최영 장군의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 그 노래가 있었고, “이순신 장군의 노래”는 “이 겨레 구원하신 이순신 장군!” 이렇게 노래 불렀고, 그 다음에는 여든 평생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이승만 대통령 찬양 노래” 이 세 가지 노래를 날마다 부르게 했습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하늘에 천군천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뭐하는 천사들인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보십시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수많은 천군이 찬송하기 위해서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을 보십시오.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을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하고 찬양을 했지 않습니까?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새 노래를 부르며 거룩한 길을 가니라.” 찬양입니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구속함의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다 찬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차꼬에 몸이 채워서 아무 자유가 없습니다. 오직 자유는 말할 수 있는 자유 밖에 없습니다. 그때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을 찬미하니까 옥토가 움직이고 차꼬가 풀어지고 옥문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차꼬에 채워있는지 어떤 감옥에 갇혀있는지 찬송을 부르십시오. 영적인 힘이 있어서 아무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보십시오. 

차꼬가 풀어지고 옥문이 열리고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어문화를 아예 바꾸십시오. 성경이나 세상에서 불만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거 보셨습니까? 안 쓰십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거 보셨습니까?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고 긍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서도 성공하지, 좋은 곳에서도 불만이 뭐가 그리 많은지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기도와 찬양으로 언어문화를 감사로 바꿔 보십시오. 하나님이 좋으시면 나를 붙잡고 쓰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찬송,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사랑받는 “메시야”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 음악은 헨델의 음악 활동 중 가장 어려운 처지가 되었을 때, 거의 음악인으로서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절망 상태에 이르렀을 때 1741년에서 1742년에 작곡한 것입니다. 그 음악은 처음에 자기와 같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선 음악회에서 연주가 되었습니다. 헨델은 그의 마지막 생애를 기아 보호소 소장 일을 보면서 살았는데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서 일했고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 메시야 악보를 이 기아 보호소에 기증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성가대를 통해서 가끔 “할렐루야”를 듣지 않습니까? 제2장 마지막 부분 “할렐루야”를 들을 때 런던에서 이것이 처음으로 연주되었을 때 영국의 국왕인 조지2세가 거기 참석했는데 앉아서 들을 수가 없다고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니까 일어났습니다. “이야! 이렇게 감동적인 음악이!” 그래서 지금도 그 “할렐루야”를 할 때 일어나는 문화가 그때부터 생긴 것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에서 교도소 선교도 하지 않습니까? 거기 담당하시는 선교사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죄수 가운데 90퍼센트가 사형 당할 때 “마지막 소원이 뭐냐?” “내가 찬송가 부르는 동안에 나를 사형시켜 주십시오.” 이게 90퍼센트 정도라고 합니다.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은 이북에서 공산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와 딸 선경이는 교회를 늘 다닌단 말입니다. 공산당으로 출세하려면 가족 가운데 기독교인이 있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핍박을 가하는 겁니다. “도대체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교회를 다녀서 나를 어렵게 하느냐? 이 아빠가 이 사회에서 출세를 해야지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지! 날마다 너희 집에 왜 예수쟁이를 만드느냐고 나를 핍박하니 도대체 거기는 왜 다니는 거냐? 왜 나를 못살게 하는 거냐?” 그러면서 아내와 딸을 핍박하고 때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아내와 딸 선경이는 “내 주를 가까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때는 그 찬송가가 162장이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그 찬송가를 부르고 매 맞고 피 나면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하고 핍박을 견디면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하도 많이 들어서 자기도 외웠습니다. 인민군으로 전쟁하다가 미군에게 붙잡혔습니다. 막 그 자리에서 서로 죽이고 죽는데 꼼짝 없이 들판에서 총살당해 죽을 일이 생겼습니다. 순간적으로 ‘아! 미국 사람들은 예수 믿는다는데…. 그렇지!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발표하면 혹시 살려줄지 모르겠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나서 총부리 앞에서 찬송가를 부른 것입니다. 자기가 핍박하면서 들은 소리 “내 주를 가까이”를 열심히 부르니까 미군들이 곡조는 아는 것입니다. 

“어? 이놈이 찬송가를 부른다?” 그러니까 막 물어볼 거 아닙니까? “Are You a Christian?” “Oh! Yes!”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렇게 대답해서 살았답니다. 그래서 반공 포로 석방에 의해서 풀려났는데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어른이 간증한 것을 한번 들었는데 자기는 해마다 자기가 미군들한테 꼭 죽을 뻔했는데 아내와 딸 선경이가 들려주었던 “내 주를 가까이” 그 찬송 하나를 자기가 부르고 살아났다면서 그 날이 되면 허가를 받아 휴전선 철책 선에서 북한을 향해서 자기 아내와 선경이의 이름을 막 부르는 겁니다. “선경아! 선경아!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 나는 네가 불러준 찬송가 때문에 살아서 이제는 남한에서 목사가 되었노라. 너희들이 나를 살렸다. 

내 죄를 용서해다오.” 그러면서 눈물 흘리신다고 합니다. 저는 그분의 간증을 들을 때 얼마나 가슴이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찬송은 선교에도 큰 비중을 둡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울립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배 음악이 이렇게 모든 예배의 3분의 1정도가 찬송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 오시면 입을 딱 다물고 명상에 잠기지 마시고 찬송가를 부를 때 열심히 부르시며 찬양을 해보십시오. 내가 변화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 그런 힘이 들어 있는 겁니다. 예배의 모범을 잘 따라 하셔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평생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큰 소리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다 찬양하라.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소고 치며 춤을 치며 찬양하라. 너희가 세상에 있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영적인 힘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는 능력의 아버지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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