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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양식, 참된 음료 (왕상 2:10-12, 3:3-14, 요 6:5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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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양식, 참된 음료 (왕상 2:10-12, 3:3-14, 요 6:51-58)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물이신 예수님>
      
우리는 4주 동안 연속으로 요한복음에 나온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신학은 언제나 깊고 신비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지 사람들의 육신을 배불리 먹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생명의 양식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단지 육신의 양식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훨씬 더 중요한 진리로 이끄십니다. 영원히 주리지 않은 영생의 양식으로 이끄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로 이끄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양식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물입니다.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은 생명의 양식을 먹고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의 물을 마셔 다시 목마르지 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도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결코 주리지 않게 될 줄로 믿습니다! 생명의 물이신 예수님을 마셔 다시 목마르지 않게 될 줄로 믿습니다. 
      
먼저 오늘 봉독한 요 6: 51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찾을 수 있는 떡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기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요 1: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살아있는 떡”입니다. 달리 말하면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생수는 우물이나 웅덩이에 있는 물처럼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쉼 없이 흘러넘치는 물입니다. 생수는 맛도 좋고 신선하고 계속해서 살리는 물이지만 고여 있는 물은 썩고 냄새 나서 죽이는 물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떡이요 생수로서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되 풍성하게 주시는 주님입니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생명의 떡이요 생수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차고도 넘치게 주십니다. 

<성만찬, 그 심오한 의미>
      
예수께서 생명의 떡으로서 이 떡을 먹어야지만 영생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 간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52절을 보면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 주어 먹게 하겠느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서는 오해한 것이지요. 실제로 초대교회 시대에 교인들이 주기적으로 성만찬을 나눌 때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주장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오해한 적이 있습니다. "Cannibalism," 즉 인육(人肉)을 먹는 사람들로 오해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 유대인들 역시 예수님의 인육을 먹는 것으로 오해해서 논쟁이 불거진 것입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나중에 말씀하실 성만찬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십니다. 성만찬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지요. 53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신 당신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사람의 살을 먹는 것은 악마나 하는 야만적인 행위로서 철저히 금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피는 생명 그 자체이므로 이 역시 철저히 금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행위는 이유를 불문하고 악마나 하는 야만적인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성만찬 하나만이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들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쓰시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죄인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다 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과 피라는 말에는 예수님의 전부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살과 피, 즉 전부를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살이 찢기고 우리가 피를 다 흘려 우리의 죗값을 치러야 하는데 예수께서 대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만찬 예식을 통하여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나를 위하여 살과 피,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그 예수님을 내 마음과 몸에 그대로 모셔 들이는 행위입니다. 
      
55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고,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할 수 있으면 자주, 이 살을 먹고 이 피를 마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이든 먹고 마시면 그 음식이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우리 생명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성만찬 예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우리 몸의 구석구석까지 예수님의 생명이 넘쳐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표현을 쓰셨을 때 먹는 것은 그냥 우물우물 삼키는 것이 아닙니다. 먹는다는 말은 희랍어 원어로는 “trogo”인데 그 뜻은 소리가 들릴 정도로 오랫동안 씹어 먹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만찬 예식을 통하여 떡을 먹을 때 그냥 영적인 의미로만 성찬을 대한다면 이는 잘못입니다. 육적인 것은 나쁘다고 생각해서 배제하고 영적인 것만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영지주의”(靈知主義, docetism)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성만찬을 할 때 가장 좋은 떡은 의식용으로 만든 똥그란 제병(祭餠)이 아닌, 생김새도 투박하고 맛도 나는 일상생활의 빵입니다. 이런 빵을 오랫동안 음미하면서 내 몸, 아니 내 생명의 일부로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천천히 씹어 삼키는 것이 성만찬의 본정신입니다. 다시 말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진짜 살을 씹어 먹고, 진짜 피를 마신다는 생각으로 성찬을 대하는 것이 옳습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 세례와 성만찬에 달려 있다>
      
사실 성만찬은 세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독교 예전입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교인은 언제 어디서나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킵니다.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보고서는 그 사람이 참 유대교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안식일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래서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지켜준 것이 안식일이라는 말이 있지요.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 역시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만찬은 가능하면 자주 주기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1년에 최소한 네 차례 정도 성만찬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성만찬을 경멸하고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복음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에 성만찬은 오늘처럼 대중화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몸 성체는 오직 사제들만 만질 수 있으므로 신부님이 집어주는 떡을 입을 벌려 수동적으로 받아먹을 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포도주는 오로지 신부님들만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런 폐단을 없애고 누구나 다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게 한 것은 종교개혁의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성만찬을 대중화했던 루터도 성찬만큼은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믿으려고 했습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가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려고 한 반면에 루터는 주님이 직접 떡과 포도주 안에 들어오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성만찬을 나눌 때마다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로 임재하신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자, 이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성만찬 예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53절 말씀을 보면 먼저 우리 안에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음식을 먹고 마셔야지만 영양분을 공급해서 피와 살을 만들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주기적으로 먹고 마실 때마다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54절을 보세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 살 수 있습니다. 56절을 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게 됩니다. 57절에 보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58절에 보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두 선언이요 약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살과 피는 한 결 같이 생명, 혹은 영생과 직결됩니다. 현재나 미래에나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가 매일 음식을 먹을 때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듯이 성만찬 예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되 넘치듯이 누립니다! 단지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립니다! 내 안에 예수의 생명으로 가득 차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사랑과 용서, 그리고 생명의 유지>
      
몇 년 전에 조지 바르나(George Barna)라고 하는 여론조사가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I love you."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두 번째로 “I forgive you." 용서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Dinner is ready." 저녁 준비가 됐다는 말이었습니다. 
      
사랑(love)과 용서(forgiveness), 생명의 지탱과 유지(sustenance), 이 세 가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열망이 성만찬 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I love you!"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함께 성만찬을 나눌 때마다 “I forgive you!"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러도 다 용서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영양분이 되어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다가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면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무개야, 빨리 와라! 저녁 준비 됐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이 세상의 그 어떤 만찬과도 비길 데 없는 천국 만찬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생명의 떡 예수님을 먹고, 생수이신 예수님을 마셔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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