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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심을 위로하시는 예수님 (요 1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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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을 위로하시는 예수님 (요 14:7-14) 
  
지난 주 말씀은,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근심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근심을 아시고,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너희와 늘 함께 함을 믿어라. 나의 약속을 믿어라. 내가 하나님임을, 믿으라고 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근심했다. 제자들에게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면, 어떠한 상황이라도,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결국 믿음이 문제다. 예수님의 위로의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된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어느 때보다 놀라운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했다. 예수님은 근심에 쌓인,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3가지를 말씀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큰 위로를 받기 바란다. 

1.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밝혔다(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볼 수 있는, 영적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으로 틀림없이 알게 된다는 말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분명히 알면,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같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조차, 믿지 못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했다. 하나님이 계시해 주셔야만 안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온전하게 알지 못했는데, (7下)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완료태로 말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살아나심은, 성령 강림으로 분명히 알게 된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성령강림 이후에, 예수님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순교까지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또 다른 제자, 빌립은 이렇게 말했다.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은 눈으로 직접 봐야만 믿겠다는, 낮은 수준의 믿음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빌립의 말은, 믿음이 부족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예수님은 (9上)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 속에, 예수님의 슬픔을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과 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고, 많은 것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제자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한 사람은 예수님을 배신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할 것이다. 열 명의 제자들도 믿음이 부족해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 예수님이 사로잡히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제자들의 상태가 나쁘다고 해서,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9下)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上)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빌립에게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하면서, 그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하셨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며, 2가지 증거를 제시했다. 

(1) 예수님이 그 동안, 제자들에게 하신 증거의 말씀이다(10中).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예수님 스스로 하신 말씀이 아니고 하셨다. 그러면 무엇인가? 

  (요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예수님이 지난 3년 동안,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말씀들이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했다. 

(2)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증거다(10下-11).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임을 믿지 못하겠으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믿으라는 말이다. (요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행하시는 역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증거다. (요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거늘” 예수님이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려고만 하는구나. 내가 곧 너희가 보기 원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한 말과 한 일을 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단 말이냐?”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 알려주셨다. 

비록 예수님이 이제 제자들을 떠나,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보이지를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그들과 언제나 함께 하면서, 그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2. 예수님이 능력을 주시니,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떠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낙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할 것이며,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도, 더 큰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귀가 성도들에게 가해오는, 여러 가지 시험 가운데, 제일 큰 시험은, 우리를 고정관념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도할 수 없다.”고 하고, “더 이상은 성공할 수 없다.”고 하고, “나는 약하기에,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를 자꾸 묶어버린다. 

1950년대에 신문에 이런 보도가 난 적이 있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주제로 한 기사인데, 마라톤을 예로 들었다. 인간의 심폐 기능을 분석해보면, 42.195Km를 2시간 10분 이내로 뛸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2시간 10분 이내로 뛰게 되면, 심장이 파열될 것이라고 했다.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다 이 분석을 믿었다면, 아마도 마라톤의 신기록 갱신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마라톤 기록은, 케냐의 패트릭 마카루가 세운 2시간 3분 38초다. 마라톤 주자도 아무 사고 없이, 잘 뛰고 있다. 그러니 두려움의 한계는 깨져야 한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는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그대로 하며, 심지어 그보다도,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12下)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면,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보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있는 것보다, 아버지께 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이 된다고 했다. (요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임했다. 제자들은 큰 권능을 얻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그들도 이적을 행했다. (행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이라는 성전 문 앞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했다(6-8). (행5:12上)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행5:15-16)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이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했다. 어떤 면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는, 더 큰 일을 했다. (행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하루에 3천명이나 되는 제자들을, 한꺼번에 얻으신 적이 있었나? 없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한 지역과,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지역의 범위를, 한번 비교해 보자.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부근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복음을 들고, 세계로 나갔다.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제자들은 더 큰 일을 했다. 이는 주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젖먹이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맡기려고,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이다. 근심이나 하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큰일을 하라고 불렀다. 성도들의 모습 가운데, 제일로 보기 싫은 모습은, 어두컴컴한 구석에 앉아서, 궁상떨고 있는 것이다. 

컴컴한 구석에 앉아서 낙심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 때문에, 쓰러지고 넘어지는데, 우리를 그렇게 하라고, 부르지 않았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그것보다 더 큰일을 감당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 

사도 바울은 힘든 일을 당할 때, 무섭고 두렵다고, 훌쩍거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었다. 오직 사명밖에 없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다른 것들은 배설물처럼 여겼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복잡한 인생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며, 단순하게 산다. 

왜 성도들이 염려가 많고, 근심이 많은가? 잔가지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 복잡하기 때문에 그렇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손쓰지 않아도 될 부분들, 성도가 나아가서는 안 될, 부분들에 손을 대니까, 마음에 번민이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라.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지금 한 눈, 팔 때가 아니다. 우상 숭배자들이 들끓는다. 그들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비난만하지 말고, 충성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님이 행하겠다고 하셨다(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은 ‘내가 행하리라.’고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분명히 약속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통해, 행한다고 하셨다. 베드로와 요한은 미문에 앉아,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에게,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자신의 능력으로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도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걷지 못하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으니, 누가 나를 일으켜줄까, 하면서 외치고 있다. 성도들이 자신을 불구자처럼 여긴다. 일어나지 못할 자가 되었다. 

그 이유는 기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난다고 말씀하셨을 때, 사실 제자들의 마음에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 동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모든 것을 돌보셨다. 예컨대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기를 잡는 것을 도우셨다. 

(눅5:4-7)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다. 

제자들이 주릴 때, 오병이어로 이적을 베푸셨다. 5천명이 먹고도, 그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제자들의 모든 것을, 일일이 돌보시던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제자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세상이 자기들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이 어디 가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러한 마음을 읽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을 떠나가지만 너희가 필요한 것들은, 무엇이든지 내게 구해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계속 공급해 주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이제 예수님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있을 예수님과, 이 땅에 머무르는 제자들 사이에는, 언제나 기도로서 연결이 된다. 사도 바울은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예수님은 본문에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한 가지 조건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무턱대고 아무 것이나 구하면, 예수님이 다 이루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만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을 빠뜨리지 말아야만 들어주신다는 뜻인가? 

그런 뜻이 아니다.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이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이루어질 때, 예수님을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기 때문입니다.” 

  (약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위하여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하는 식의 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성취됨으로 과연 예수님을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일인가를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그리할 때 예수님은,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그대로 시행한다고 약속하셨다. 왜 근심하고 있는가? 낙심하면서,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맺겠다. 예수님은 3가지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1)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밝히셨다. 
(2) 예수님은 계속 능력을 제공하시니, 할 수 있다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 
(3)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시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믿자. 아울러 우리가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그것을 시행하신다는 약속도 믿자.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큰 용기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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