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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의를 굳게 붙잡으라 (욥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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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의를 굳게 붙잡으라 (욥 23:1-12)


1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4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주일 오후 예배 시간에 우리 교회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원죄론 부분이 있는데 원죄론은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인간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락 이전의 인간은 죄에 대해서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에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철저히 파괴되어 더 이상을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졌습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하여 타락 이후에는 자유의지가 없고 오직 죄와 악의 노예가 된 노예의지만 있을 뿐입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는 말씀은 개신교가 바라보고 있는 인간상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노예의지론이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 은혜를 설명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인간에 대한 태도가 기본적으로 부정적고 비관적이 된다는 데 그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선함과 악함 중에서 개신교는 인간의 악함을 먼저 봅니다. 아기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예쁘고 사랑스럽고 천사와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눈으로 보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고, 어린아이도 그 안에 악이 지배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소위 선인이나 위인의 존재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세종대왕도, 간디도, 테레사 수녀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이런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인간관은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자신은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욥25:6)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분이 바뀌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근본 바탕에는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과 불가능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잘못해도 자신을 죄인처럼 취급합니다. 이기적인 욕구를 따라 살면 무언가 잘못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예민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잘못된 행위를 하면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지도자 루터가 기독교 인간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루터가 수도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두려운 하나님 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비오는 날 길을 가다가 벼락이 자기 곁에 내리치자 두려워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성 안나여(당시 광부들의 수호신), 나를 도우소서. 제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이후에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가 수도사가 된 이유는 신앙에 대한 어떤 동경 같은 것도 아니며, 먹고 살기 위한 것도 아닌, 다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염려에서 피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수도사가 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는 죄인 된 자신이 지금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는 이런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은 모든 가능성과 선함을 박탈당한 죄인일 뿐입니다.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라는 문장이 신앙인의 실존을 규정합니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의인입니다. 죄인과 의인됨의 갈등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어찌되었든 인간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배경 위에 밝은 색을 칠해가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런데 정말 의인은 하나도 없는가? 이에 대해서 도전하는 한 인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읽은 말씀의 욥이라는 사람입니다. 욥은 비록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자기가 살았던 인생이 의로웠다는 굳은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욥이 가진 이런 자신감과 당당함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 14) 하나님 말씀은 쉬운데 우리 스스로 너무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3:6)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613가지 밖에 안 되는 율법은 지킬 수 있고,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걷는 길이 잘못되었을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에서입니다. 하나님의 체는 촘촘하지 않습니다. 매우 성성하고 커서 큰 잘못이 아니라면 자기 선택과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져도 좋습니다. 

욥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욥은 부자이면서 동방의 의인이라고 불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욥에게 불행이 닥칩니다. 그 전 소유물을 도적들에게 빼앗기고 자연재해로 잃고 맙니다.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기 자녀들이 모두 일시에 죽임을 당합니다. 자신의 몸에는 악한 피부병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생겨 잿더미 위에서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욥만큼 불행한 인생이 또 어디 있을까요? 

욥기는 이런 불행해 빠진 욥과 그 세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로 이어집니다. 세 친구들의 주장은 동일했습니다. 죄 있는 자는 벌을 받고 의인은 복을 받는다는 인과응보 신앙입니다. 따라서 욥이 이렇게 고통을 당한 것은 그가 어떤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자중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에 대항하여 욥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자신은 이렇게 정죄를 받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를 굳게 잡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욥이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며 자기 의를 변명하는 부분입니다. 대표적으로 23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 구절이 자주 오해가 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불순물이 섞여 있는 존재와 같은데 고난이라는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금같은 존재로, 곧 존귀하고 단단한 존재로 빚어져 나올 것이라 식의 해석입니다. 그래서 주로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나를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정금같은 사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의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으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표준새번역은 지나치게 의역을 하였지만 그 의미는 통하고 있습니다. NRS 영어 번역판입니다. “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shall come out like gold.” ‘하나님은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아신다. 그가 나를 시험하신다면 내가 정금처럼 나오게 될 것이다.’ 곧 내가 100% 순금 같은 사람임이 증명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뜨거운 용광로에서 짚이나 나무 등 헛된 것들은 타버릴 것이고, 불순물들은 다 빠져버리고 정금만 나옵니다. 그것처럼 자신이 정금 같은 사람임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앞뒤에 있는 말씀들을 보면 더 뚜렷해집니다. 7절입니다.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 7절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내 무죄가 드러나 하나님의 심판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역시 의역을 많이 했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NRS 번역은 “I should be acquitted forever by my judge.”라고 하고 있습니다. 

11절과 12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자기는 하나님의 길에서, 하나님의 율법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살인범으로 모함할 때 억울한 피해자가 “나는 결백합니다. 내 심장을 내어 보일까요? 하나님만이 내 진실을 알 것입니다.”하는 항변과 같다 할 것입니다.

욥의 당당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 명의 친구가 둘러서서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다고 하는데 사람들의 이런 말을 견디기 쉽지 않습니다. 우린 단 한사람의 말에도 쉽게 낙담하고 걸려 넘어집니다. 요즘 인터넷이나 SNS가 무섭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비난과 조롱의 댓글이 쏟아집니다. 요즘은 그룹 티아라가 공격을 많이 당하고 있습니다. 그룹 내 한 멤버에 대한 왕따설 때문입니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댓글들을 보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잡아먹을 듯이 달려듭니다. 물론 잘못했으면 적절한 비난을 받고 돌이키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제 말의 요점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가고 자기 확신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의 눈입니다. 욥과 같은 경우라면 자기 탓으로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재산도, 자식도, 건강도 모두 잃고 났다면 자신은 실패자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을 자책하지 않습니다. 욥은 단호합니다. 자기는 결코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선택이나 자기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옳았다고 확신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이지 자신은 아니라는 태도입니다.

지난주에는 묻지만 살인 때문에 우리 사회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습니다. 의정부에서, 여의도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흉기를 휘둘러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여의도에서 이런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은 진술 과정에서 “혼자 죽기는 억울했다. 모든 일이 전 직장 동료들 때문이라는 증오심이 일었다”고 자백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오랜 실직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그 원인이 자기를 회사에서 몰아낸 동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백주 대낮에 그들을 상대로 범행을 계획했던 것입니다. 

이미 이런 식의 범죄행태는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데 ‘다중 살인’이라고 명명합니다. 미국정부가 26년간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들을 분석한 결과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범죄자 전원이 남성이었으며, 98%는 범행 직전 중대한 실패나 상실을 경험했다. 오랫동안 좌절과 분노를 내면에 축적하면서 자살을 시도하거나 고려하다가 결국 그 증오를 사회를 향하여 표출했으며 93%가 사전에 범행을 계획하는 특성을 보였다. 이번 범죄가 경각심을 일으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동안 분노를 자기 자신에게 쏟아 부었고 그 결과가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분노를 바깥으로 쏟기 시작하지 않았나 하는 염려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가 안전망을 확충하여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자리와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부분 범죄는 일자리가 없거나 극심한 상실과 가난의 상황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성을 갖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마십시오. 또 자기가 하는 일이 도적질과 같은 범죄가 아니라면 자기 인생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너무 자신을 쪼지 마십시오. 우리는 잘 가고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 위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는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외쳤던 말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지만 저는 이 말씀을 나라는 존재가 소중하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모든 문제의 출발도 ‘나’이고 문제의 해결도 ‘나’에게서 비롯됩니다. 나의 마음에서 모든 욕심과 불행이 결정이 되고,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선택과 걸어온 길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십시오. 사도 바울 또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깨달은 복음에 대해서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하면서 대 사도 베드로일망정 하나님의 복음에서 벗어나면 가차없이 책망을 하였습니다. 자신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3:6)라 고백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되 흠이 없도록 지킨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알고 나서 구원의 길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전까지 바울은 욥처럼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향하여서는 자신을 본받으라고까지 요청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4:16)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3:17) 사도 바울은 교만하게 여겨질 정도로 당당합니다. 어떻게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자신감을 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을 확신과 당당함을 가지고 살아왔고 너희들도 그렇게 살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겸손하지만 자기 인생에 대해서는 당당하십시오. 설교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설교도 당당하지 못하면 선포가 어렵습니다. 이 시간만은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고 내가 주인공이고 내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선포해야 합니다. 칼 바르트와 그 제자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칼 바르트가 자기 제자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제자는 설교하다가 자기 스승이자 대신학자인 칼 바르트가 예배에 참석한 것을 보자 맥이 풀리면서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횡설수설, 그야말로 죽을 쑤는 설교를 하고 예배를 끝마치고 칼 바르트에게 인사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바르트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설교에서 은혜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 제자 목사가 말합니다. “오늘 제가 횡설수설하신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선생님 같은 훌륭하신 분이 어떻게 제 설교에 은혜를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칼 바르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나를 위대한 신학자로 보았습니까? 나는 당신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말씀을 들었는데...”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우리가 위기에 처하고 확신을 잃어버릴 때는 언제인가? 바로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입니다. 욥이 힘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침묵 때문입니다. 8절과 9절입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하나님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 7절 이하의 찬양과는 정 반대의 심정입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하나님의 침묵은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말씀을 읽어도 감동이 없는 현실을 말합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해도 열매가 없고 마치 광야를 걷는 것처럼 퍽퍽할 때입니다.

이때는 묵묵히 우리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 전 유행했던 책 중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불교의 『남전대장경』이런 경전에 실렸던 내용의 제목입니다. 무소의 뿔은 코뿔소를 말합니다. 코뿔소는 일직선을 향해서 막무가내로 달려갑니다. 코뿔소가 달려갈 때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처럼 혼자서 해쳐나가란 뜻입니다. 그 중 일부입니다. “최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 정진하고 마음의 안일을 물리치고 수행에 게으르지 말며 용맹 정진하여 몸의 힘과 지혜의 힘을 갖추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장애가 있든 그렇지 않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승리하고 정상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갖는 확신이 있습니다. 10절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하나님께서 내가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고 앞으로 걷게 될 그 길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욥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천상에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1장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시험을 하고 난 이후에도 하나님은 욥을 인정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욥2:3) 

이런 하나님의 인정의 소리가 욥의 귀에는 직접 들리지 않았습니다. 욥은 제대로 길을 가고 있지만 자신은 혼자인 듯이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광야를 걷는 것처럼 퍽퍽하고 고단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욥의 길을 알고 있으며 숨죽여 욥의 길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욥은 실은 하나님의 명예가 걸린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욥은 믿음을 통해서 확신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가는 길을 아시고 나 또한 그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확신이 그의 믿음입니다.

길은 우리가 갑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는 길을 인정하시고 돕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쪼잖하게 우리 인생길을 막거나 사사건건 개입하는 분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또한 우리 길을 대신 걸어주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그 길을 잘 걸을 수 있도록 격려하시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큰 잘못된 길이 아니라면 확신 있게 걸으십시오. 그 걸음이 나중에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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