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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받을 상이 무엇인가? (고전 9: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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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받을 상이 무엇인가? (고전 9:16-27)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 앞서서 교회에 사랑으로 덕을 세우기 위하여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을 자유를 포기하고(고전8:1-13)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하여 사도로서 교회로부터 생활을 보장받을 당연한 권리도 행사하지 않았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고전9:1-15). 사도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어떻게 자기 자신을 다 내려놓았는지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기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이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하여 자기가 자랑할 만 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은 “부득불 할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부득불 해야 할 일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기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본문 16절).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자기가 스스로 원하여 선택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며 따라서 상 받기를 기대할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본문 17절을 봅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사명을 받은 사람은 그 사명을 준 사람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마치 주인에게 속한 종이나 노예 같습니다. 종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한다고 상을 받거나 대가를 받거나 무슨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라는 일을 하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 18절입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종은 주인이 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종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주인에게만 종이 아니라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누구 앞에서든 얼마든지 자기를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종이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충성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그는 본래 종의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적으로 보면 누구 못지 않게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빌3:4-6). 그러나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자유인으로 태어났으며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도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 자유로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대로 복음을 전하여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이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 사람을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사명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당연히 하나님께로 사람을 얻고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서 유죄판결로부터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베푸신 놀라운 은혜의 소식입니다. 

그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사람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기 위한 것이지 사도 바울 자신의 사람을 만들기 위함이 아님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것도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한 일이어야지 자기 사람들을 만들기 위한 일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보면 자기 사람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자기 패거리를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일꾼들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자기 부하, 자기 파벌을 만들어 권력을 휘두르려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나고 시험 드는 이들이 생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사람들을 포섭하고, 포섭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항존직에 선출되지 못하게 막는 일도 하며, 자기들에의 눈에 가시 같이 여겨지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하여 사람을 부추겨 거짓 증언도 시키고 대리 비난과 공격을 하게 하는가 하면, 무슨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치리를 받게 일을 꾸미고, 심지어는 자기들 뜻대로 따르지 않는 목사는 모함하여 내쫓는 일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만인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러운 교회가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음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에로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합니까? 먼저 유대인들을 대할 때는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본문 20절에서 그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합니다. 유대인들을 대할 때는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을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 뜻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깨닫고 율법의 문자적 이해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로 얻기 위하여 그들과 같이 행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편 유대인이 아니고 모세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어떻게 했느지를 사도 바울은 또 본문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방인들을 대할 때는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 예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도 않고 필요하다고 말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로 깨달은 율법을 따라 행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라고 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렇게 한 것 또한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로 얻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약한 자들 즉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믿음의 이해가 깊지 않은 사람들을 때할 때는 그들의 이해의 수준에 맞추기를 힘썼다고 합니다. 본문 22절에서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이라 한 말이 그 뜻입니다. 그 또한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들을 대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인 것은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맞추거나 그들 아래로까지 자신을 낮춘 것을 가리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전하라고 명하신 복음을 위하여, 그 복음의 진전을 위하여, 복음에로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하여,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복음의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무슨 일이든 못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그러한 뜻을 표명한 것이 본문 23절의 말입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그가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를 운동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예를 비유로 들어 설명합니다. 본문 24-27절을 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여러 선수가 경기에 임하지만 우승자는 오직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경기에서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목표를 향해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승을 위하여 자기의 경기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훈련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훈련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일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는 훈련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기 위해서는 올림픽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처럼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합니다. 운동경기에서 우승한 선수가 받는 상은 월계수 가지로 엮은 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어버리거나 썩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상은 썩지 않을 상을 바라고 믿음의 삶을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합니다. “이와 같이”라는 것은 “상을 얻도록”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라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선수들을 보면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듯 최선을 다합니다.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하여 경기에 임합니다. 그저 슬슬 해가지고 금메달 따는 사람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우리의 전도활동도 그렇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한다.” 합니다. 달리기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골인 지점을 향해서 달려야 합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달리지 않습니다. 0.001초 차이로도 메달 색갈이 달라지는 달리기에서 한눈 팔 순간이 없는 것입니다. 권투나 태권도 경기에 임하는 선수가 상대방을 맞추지는 못하고 공중에다 주먹이나 발길을 날리고 있다가는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골인 지점 아닌 데다 한 눈 팔거나 허공에다 대고 헛발질 하는 인생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했다고 합니다. 스스로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은 25절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는 말에 상응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경기에 나갈 선수들이 승리를 위하여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으며 놀고 싶은 대로 다 놀려는 욕망들을 누르고 오직 훈련에만 전념하듯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세상의 온갖 욕망을 다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는 것은 그런 자기절제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힘과 역량을 오직 복음 안에서의 우리의 삶의 목표에 사용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시간, 물질 , 건강, 재능 등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복음의 사역을 행하는 데 온전히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에 주어진 구원과 영생의 약속을 함께 누리려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한 말의 뜻입니다. 여기서 “버림을 받는다”는 말은 운동경기로 말하면 실격으로 처리되어 상을 놓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경기에서는 경기시간이 다 될 때까지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에서 열린 세계육상경기대회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라고 주목을 받던 우사인 볼트 선수가 순간적인 실수로 부정출발해서 허무하게 실격이 되고만 일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어가던 유도 선수가 타임아웃 1초를 남기고 방심하여 한판으로 넘어가 패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운동선수들 가운데 4년 혹은 8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 동안 피땀 흘리며 준비하였다가 본선에도 나가지 못하고 물러나야 하는 허무한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봅니다. 선수가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메달을 목에 걸고 금의환향하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자기 절제와 관리가 필요하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적으로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상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받기를 바랄 상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고 교회를 섬기며 복음을 전하면서 세상에서의 상과 대가를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삶을 살면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부와 명예와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8절에서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묻고는 스스로 대답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합니다. 

즉 그는 복음을 전하며 물질적 대가나 어떤 명에나 권리행사도 원하지 않는 것 그 자체를 자기의 상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본문 24절에서는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썩지 아니할 상입니다. 즉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 좀 했다고 인정받고 칭찬 받으며 어떤 보상을 기대하거나 권리를 주장하거나 세도를 부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이든 받거나 안 받거나 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사명에만 충성하며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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