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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내가 죽어야 합니다! (로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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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내가 죽어야 합니다! (로 6:1-11)


한국 초대교회 시절에 아주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조폭으로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분입니다.  이 목사님이 예수를 믿고 나서 제일 먼저 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부고장을 마을에 돌린 일이었습니다.  "김익두 사망"  이렇게 써서 자기 마을에 돌렸다고 합니다.

그 부고장을 받았던 마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부고장을 돌린 김익두가 버젓이 장터에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가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비슷한 또래의 불량 청년 한 사람이 지나가는 김익두를 보고 "죽기는 뭘 죽어"라고 하면서 물바가지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물을 털고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김익두가 죽었으니 망정이지 김익두가 살았으면 넌 벌써 요절났다."

옛사람 김익두가 죽음으로 새사람 김익두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참으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는 복음의 역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설이란 모순되어 보이지만 진리인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치열한 경쟁의 사회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럴수록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역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진리입니다.

오늘의 본문 로마서 6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4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유에 대한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특별히 사데교회를 향해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 편지에 보면 당시의 사데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진단한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살아있는 자답게 새 생명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살았으나 죽은 인생은 아니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자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부활은 주님 한 분만의 사건으로 끝날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 부활의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모시고 그를 믿고 따르는 그의 제자들이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

그렇다면 오늘이라는 이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과 제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새로운 생명 가운데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비밀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6장에는 이 비밀을 풀 수 있는 세 가지 키워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알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새로운 생명이 충만한 인생을 살기 위한 첫 번째 열쇠는,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자신의 삶의 내용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어떤 일로 열을 받아서 그것을 잘 극복하지 못했다고 느꼈을 때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제가 아직 죽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더 죽어야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본문 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본문에서는 죄에 대하여는 이미 죽은 우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죄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본문에서는 우리가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가장 현실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동일시'라는 말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말하면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연합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합했다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5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여기에서도 연합이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건에 동일시되었다, 예수님의 사건에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 예수님께 연합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우리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를 대신해서 그가 죽으셨다는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그가 죽었을 때 나도, 여러분도, 우리 모두도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셨을 때 그를 믿는 제자들은 모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와 더불어 그 안에서 함께 죽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라는 복수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했고, 2절에 보면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죄에 대하여 우리가 정말 죽었다면 어떻게 죄 짓는 일에 아직도 내가 살아 있는 것입니까?  정말 죄에 대해서 죽었다면, 정말 죄에 대해서 자유롭다면 지금쯤 우리 모두는 다 성자가 되어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아직도 죄와의 싸움에서 피나는 갈등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진단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3절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자유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때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습니다.  당시 필리핀에서 싸우고 있던 일본군인들이 전세가 불리해지니까 필리핀 섬들의 깊은 정글에 들어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군인들 가운데 전쟁이 끝난 줄을 모르고 있었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정글에 숨어 있었습니다.  1974년에 일본인 히로 오나다 중위가 정글 속에서 마을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무려 30년을 정글에 숨어서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전쟁이 끝나서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로처럼 피난 생활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아직도 죄에 매여 있는 이유, 아직도 사망에 종속되어 있는 이유, 그리고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6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죄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죽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우리는 자유할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었습니다.  언제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셨을 때 우리도 거기에서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십시오.  그것이 생명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첫 번째 걸음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생명이 충만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두 번째 열쇠는,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죽은 사실을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에서 '여긴다'는 단어는 본래 회계학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래 뜻이 '여긴다'는 말은 '계산한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로 여기라는 말은 죽은 자로 계산하고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계산은 정확해야 합니다.  계산은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실을 사실대로 인지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영적인 사실입니다.  실감이 나지 않으시겠지만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사실대로 늘 의식화하고 생활화하며 살아야합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나는 죄에 대해서 자유하지 못하다, 계속해서 패배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의식화하고 생활화하는 삶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계속해서 일깨워야 합니다.  계속해서 내가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된 다음에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왜 받습니까?  세례는 장례식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머리에 물을 뿌리는 약식세례를 받습니다만 세례에는 침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 침례는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장례식입니다.  사실은 이미 죽은 것인데 그것을 형상화시키는 사건이 세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죽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 속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식입니다.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형상화시키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4절과 5절의 내용이 바로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과 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세례는 우리가 일 평생에 한 번만 받는 일회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내용은 한 번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기억해야 됩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기억시켜야 합니다.  나는 죄에 대해서는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계속해서 자신에게 의식화시켜야 합니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그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 훈련될 때 승리로운 삶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과거 유럽과 미국에서 노예 해방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노예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한동안 노예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거 노예의 신분에 있었던 사람들이 노예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들은 자유인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유인으로서의 새로운 자기 신분에 대한 의식화인 것입니다.  그는 노예의 행동이 나올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노예는 죽었어.  넌 이제 자유인이야."

사도 바울은 아마도 이런 경험을 가르쳐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지만 이 사실을 확인함으로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음의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죄의 충동이 우리를 괴롭힐 때마다 이 사실을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죽은 자는 유혹 받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욕심을 내지도 않습니다.  죽은 자는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죄가 고개를 들거든 자신에게 소리치십시오.  "넌 죽었어.  네 죄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때 넌 이미 죽은 거야."  그렇습니다.  죄에 속한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날마다 선포하며 사십시오.  그리고 승리하십시오.

생명으로 충만한 인생을 사는 셋째 열쇠는, 우리를 다시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6장 11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이제 다시 산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게 되었다고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살았다"는 이것을 단순히 의식화하는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본문 다음에 나오는 12절 이하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드리라'는 단어입니다.  살아난 자로 여길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삶을 지켜나가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13절의 말씀입니다.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에서는 '드리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몸을 죄의 목적으로 드리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의 목적에만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죄짓는 일에 사용되어지면 우리의 몸은 죄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우리의 몸이 쓰임을 받으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의 도구로 쓰임 받지 말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으십시오.  소중한 내 인생을 사탄의 자녀로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쓰임을 받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일에 내 몸을 드리기를 힘쓰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신 이유는 바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인생이 되게 하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국교회의 지도자인 워치만 니의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아주 순결한 마음과 믿음을 가진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긴 기차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그 세 사람이 한 그룹 같았는데 기차여행이 길어지니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한 사람이 카드놀이 게임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 카드놀이는 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그리스도인 형제에게 같이 카드놀이를 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청년이 정중하게 사양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묻습니다.  "아니 카드놀이를 할 줄 모르십니까?  한 번도 안 해 보셨습니까?"  "해보았지요."  "그러면 할 줄 아시네요?"  "할 줄 알지요."  "그런데 왜 안 하십니까?"  그러면서 그 다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손 뒀다 뭐에 쓸려고 하십니까?"

이때 청년 그리스도인이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손이 제 손이 아니라서요.  이 손은 달리 할 일이 있어서요."  이상한 대답을 하니까 "도대체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간증을 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이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구원받은 감격을 간증하면서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므로 내 몸은 이제 성령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었습니다.  내 몸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따라서 이 몸은 내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입니다.  이 손도 내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입니다.  그런데 이 손, 주님의 손으로 카드놀이를 하는 것을 이 손의 주인이 별로 기뻐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제가 하지 못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형제의 대답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적인 거룩함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거룩함은 무엇을 안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 불의를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적인 거룩함은 보다 적극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청년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제 손을 따로 쓸데가 있어서요."

거룩이라는 말은 '따로 구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써야 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손으로, 입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손으로, 입으로, 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이상하게도 사람은 안 지으려고 하면 더 짓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적극적으로 거룩한 일에 자신을 드려 열중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앞에 자신을 던져보십시오.

전도해 보십시오.  전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에는 힘들고 어렵지만 전도하는 일이 습관화되면 그렇게 즐겁고 기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다.  찬양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는 놀라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내어주고 이웃을 섬겨 보십시오.  사랑해 보십시오.  연약한 이웃들을 돌아보십시오.  그때 당신은 세상이 결코 제공하지 못하는 그런 기쁨의 인생을 다시 사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속담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존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일에 드려 보십시오.  그러면 죄를 지을 여유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적을 위해 드려보십시오.  내 속에는 놀라운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인생은 싱싱한 장미꽃처럼 새롭게 피어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위해 죽으시고 다신 사신 이유입니다.

미국에 후버 댐이 있습니다.  본래는 불더 댐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이 댐의 공사는 건축사상 랜드 마크로 불리우는 어마어마한 대 공사였습니다.  이 공사의 결과로 미드호로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거대한 호수가 생겨났고, 미국의 남 켈리포니아 일대에 집집마다 전력을 공급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공사의 결과로 거친 사막의 한복판에 세계적인 오락 도시인 라스베가스가 태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댐 입구에는 인상 깊은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 공사를 진행하는 가운데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단이 있고,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들이 여기에서 생명을 버린 이유, 그것은 이 사막이 장미꽃처럼 피어나고, 이 골짜기에 생명의 강이 흘러가기 위해서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어 올라가신 골고다 언덕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저로 하여금 골고다 언덕에 게시판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된다면 저는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볼 것입니다.
"여기에서 2천년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생명을 버리신 이유, 그리고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이유, 그것은 사막 같은 인생들이 장미꽃처럼 피어나고, 죽음의 골짜기에 생명의 강이 다시 흘러가기 위해서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새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 앞에 나오십시오.  거기서 당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다시 사셨을 때 우리도 다시 살았습니다.  우리가 다시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 때문에, 그 예수 때문에, 그 십자가 때문에 여러분과 저도 성령 충만한 새로운 인생을 살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우리가,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가 참으로 새 생명 가운데 성령 충만한 삶을 살려면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죽으면 나도 살고, 가정도 살고, 믿음의 공동체도 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자 몸부림치면 나도 죽고, 가정도 죽고, 믿음의 공동체도 죽을 것입니다.  먼저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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