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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신을 속이지 말자! (약 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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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속이지 말자! (약 1:19-27)


일찍이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과연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세상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서 너무 예민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꼭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 교회가 비난과 조롱을 당하고 있는 것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겉으로는 제법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믿음에 걸맞는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한국 교회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아주 잘라서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상태가 아주 나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심하게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알고 보면 초대 교회 때부터 교회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단순히 믿는 문제가 아닙니다. 행위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선을 행해야 하는데 오히려 악을 행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믿음과 행위의 불일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쓰는 가운데 대체로 두 가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 하나가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믿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입니다. 과연 어느 편이 옳은 것 같습니까? 교회의 전통에 따를 것 같으면 율법주의는 틀렸고 복음주의가 옳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를 무조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율법주의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오늘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좋은 방편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야고보가 강조하고 있는 행위가 과연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아주 분명히 말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속고 속이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속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사실은 어린 아이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속입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간단히 말해서 부당한 이익을 얻기 위해서 속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을 속이면 부당한 이익이라도 얻을 수 있지만 스스로 자신을 속이면 어떻게 됩니까? 자신을 속이면 아무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원하지 않는 큰 피해를 보게 마련입니다.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자를 가리켜서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로 자기의 생긴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아서 들은 말씀을 곧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거울은 청동이었습니다. 때문에 거울에 비친 모습은 또렷하지 않고 흐릿했습니다. 그리고 흐릿한 모습은 쉽게 잊어버리게 마련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결국 그 말씀을 쉽게 잊어버리게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야고보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물론 그가 행위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더불어 행위도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지 않았습니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똑같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야고보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사도 바울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누구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여기서 어느 한 주장을 선택하는 것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 어떤 행위보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교회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선한 행위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어찌 보면 행함은 지나칠 정도로 많습니다. 

오죽하면 지자체들이 복지 프로그램을 교회들에게 맡기겠습니까? 물론 그런 다양한 행함은 우리의 영성을 진작시킬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의 경우 프로그램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올바른 믿음이란 결국 주님과의 깊은 영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야고보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율법의 행위를 유난히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폐기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와 사도 바울은 분명히 신학적인 차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였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였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행위를 부정한 것처럼 보였고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부정한 것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렇게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극단적으로 믿음에만 치우친 사람들을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들은 믿음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더 이상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매우 복음적인 주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방패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부정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 대표적인 무리가 바로 니골라 당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도 그들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한국 교회 안에도 니골라 당과 같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신도들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번 회개했으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거의 병적으로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그럴까요? 그 까닭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역사의 신비를 그들의 정신 세계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머니 치마에 감싸인 마마보이와 비슷한 심리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정신 세계는 인간의 윤리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과 더 나아가 허무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구원이나 믿음이라는 자기만의 성 안에 숨어서 이 세상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어려운데 무슨 역사에 대한 책임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적금을 해약해서 구호 단체에 몽땅 기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장차 심판하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0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함 사이에서 영적인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라는 주님의 강력한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와 정반대의 주장을 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사도 바울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야고보도 또한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결코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먼저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그 주님 보좌 앞에 섰을 때에 “잘했다!” 칭찬 듣는 참으로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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