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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창조질서의 보전과 교회의 사명 (롬 8: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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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질서의 보전과 교회의 사명 (롬 8:18-2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육신(the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의 사건이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제 재림하실는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각종 사고와 질병과 고통과 갈등, 불안과 염려가 없고 죽음이 없는 완전한 나라에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생활의 움직일 수 없는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과 환경, 좀 더 넓은 의미로 생태계와는 어떤 관련성이 있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다면 인간이 살고 있는 땅과 자연과 환경은 포함되지 않을까요? 인간을 구원하는 사건과 자연을 구원하는 사건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일까요? 연관성이 있다면 구원받은 성도들은 생태계에 어떤 관심을 기울여야 할까요? 이 문제는 오늘날 아주 중요한 이슈가 되기도 합니다. 

요즘 여러 정보들을 통하여 우리는 '생태계'(ecosystem) 또는 '생태학'(ecology)이라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하고, 사용하기도 합니다. 생태계라는 말은 영국의 식물생태학자 A. G. 탠슬리에 의하여 1935년에 처음으로 사용된 용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지역에 사는 모든 생물과 그 지역 내에 살고 있는 비생물적인 요소가 상호작용하면서 그 속에서 물질이 순환하기도 하고, 교류하며 에너지의 흐름이 일어나는 환경체계를 말합니다. 오늘날 생태계라는 말을 자연환경이라는 말과 상호교체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태학이라는 용어는 생태계라는 말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1869년에 독일의 E. H. 헤켈에 의하여 "생물과 환경 및 함께 생활하는 생물과의 관계를 논하는 과학"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생태학은 생물 상호간의 관계 및 생물과 환경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인간과 생물, 인간과 환경에 대해 성경적으로 살펴보려고 하였기 때문에 "창조절과 생태학", '창조질서의 보전과 교회의 사명'이라고 붙였습니다. 이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태환경은 인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당시의 본래적인 하나님의 형상과 생태계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본래적인 하나님의 형상과 생태계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창조기사를 사람들이 지어낸 신화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이 우연히 생겼다거나 어떤 물질에서 스스로 진화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만물들을 창조하시고, 또는 그 모든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진리는 창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그 중에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창세기 1:26-28에 처음으로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로는 하나님과 닮았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아와 인격을 가진 자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과만 관계하는 존재로 만드셨다면 왜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서로 관계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을까요? 그리고 왜 자연환경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이 환경 속에 살게 하시고, 관리하고 돌보게 하셨을까요? 

창세기 1:27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성적인 구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동물들도 성적으로 구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창세기 2:18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문자적인 의미로 '그에게 적당한 조력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를 보완하고 그 부족을 채워가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사람을 떠나서 혼자서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을 창조하셨을 당시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풍요하게 하는 관계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할 때 동료 인간과 서로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사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동료 인간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이듯이 자연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8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인간이 온 세상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지배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을 문화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고 발전시켜야 할 말씀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정복하다'는 말이나 '다스리다'라는 말은 만물을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이 동사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15에 보면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동사는 히브리어 '섬긴다'는 뜻인 '아바드'와 '지키다, 보존하다, 돌본다'는 의미인 '샤마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지구의 자원이나 생태계를 무책임하게 착취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을 가꾸며 돌보라는 문화명령은 땅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꾸면 보존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에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할 때 세 가지의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는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여기에 첫 번째 관계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세 관계 중에 어느 하나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바르게 기능할 수도 없습니다. 이 세 관계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어느 하나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1서 4:20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거짓말쟁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하게 되어있고, 동시에 자연을 사랑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을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적인 자아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이고, 인간과의 관계에서 서로 협력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또한 자연과의 관계에서 지배권을 가지고 있되, 자연을 관리하고 돌보며 조화를 이루는 관계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교리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인간을 서로 사랑하며 조화롭게 지내며,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조화롭게 지내는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며 지금처럼 인간관계에서 고통과 다툼과 시기가 없었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공해와 오염이 없는 이상적인 세계에 살았습니다. 


2.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과 생태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관계가 오늘날 컴퓨터의 칩이나 로봇처럼 어떤 명령을 입력하면 기계적으로 유지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이며 인격적으로 이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창세기 2:16-17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이 명령을 지켰다면 인류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처음의 상태대로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언약관계를 일방적으로 우리의 교만과 탐심으로 말미암아 선약과를 따먹고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그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은 심각하게 왜곡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에 헛된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모함하고, 해롭게 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역시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땅과 땅에 속한 모든 자원을 착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에 중대한 변화를 주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17-18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땅이 저주를 받아 자연적으로 음식을 주지 않았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권리를 오용하여 자기 이익과 편리 때문에 생활하수를 무분별하게 버려 강과 호수들을 오염시키고, 수확량을 늘리기 위하여 땅을 혹사시키기도 하고, 공장의 폐수들을 강과 하천으로 흘려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태환경에 크게 오염되었고 동물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산성비로 인하여 생태유지에 꼭 필요한 미생물들이 죽어 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8:19-20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인간은 자연과 조화로운 관계에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 관계가 왜곡되어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생태계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개발이나 세수확보라는 미명하에 자연경관이 좋은 곳이면 예외없이 갈비집이나 러브호텔이 들어서 있고, 삼림자원과 수자원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숨쉬는 공기가 오염되고 식수가 오염되어 오늘날은 수돗물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늘 먹는 음식물인 야채, 과일, 육류, 생선, 유제품 등을 대할 때마다 농약이나 중금속, 환경호르몬 등 여러 가지를 걱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환경 문제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수확을 늘리기 위해 농약을 여러 번 뿌리고, 때로는 심지어 인간에게 유해한 약품마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철저하게 경제적인 이득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이 탐욕이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함으로 치명적인 위험이 부메랑이 되어 인간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3. 새롭게 된 하나님의 형상과 생태계(:19-21)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회복되어 본래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환경을 잘 관리하고 돌보는 조화로운 관계가 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철학이나 교육이나 과학이나 종교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범죄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로 인하여 고통받는 인간과 자연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신비와 은혜는 여기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 자체는 인간의 논리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으면 이 모든 신비들이 믿어지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은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사람과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하시고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점차적으로 죄의 오염에서 구원해 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아 죄가 시키는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에서 이웃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정의와 인권, 가난한 자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자연과의 관계도 새롭게 되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독재자가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방식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를 돌보는 선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바울은 로마서 8:19-21에서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피조물들이 누구를 기다린다고 하였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릴까요? 그것은 인간이 지은 죄로 인하여 왜곡된 자연을 회복해 주기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요즘 전 지구적으로 생태환경의 위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미 세계교회는 생태계와 환경을 중요한 문제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신학계도 생태계의 문제가 단순히 삶의 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의 생존 자체가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파괴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는 절박한 상황을 인식하고 생태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생태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연구분야가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속의 의미를 단순히 인간에게 제한되어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과 생태계에도 구속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우리 신자들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탄식하고 있는 자연을 회복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믿는 신자들은 땅을 경작하는 문제에서부터 자원을 보호하고 이용하는 문제를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의 복지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몸에 좋다면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잡아먹는 이상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동물자원을 무자비하게 잡아먹거나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대기와 수질 오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환경을 보존하는 일과 반대되는 결정을 내린다면 여기에 대하여 정당한 방법으로 반대하는 운동을 벌일 수 있고, 또한 벌여야 합니다. 우리가 직접 이 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면 이 일을 할 수 있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나 환경운동연합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헌금으로도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 가운데 대통령이 된다면 이 철학을 통치에 반영하고, 국회의원이 있다면 여기에 관련된 법안을 입안하고 적용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과학자가 된다면 역시 생태계에도 구속의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개인 생활에서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철저하게 분리하는 일부터 생활화해야 합니다. 자기 한사람의 편리함만을 생각하고 전체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환경문제는 절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실천한다면 우리나라의 환경은 더 아름답게 보전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구속받은 신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4. 완전하게 된 하나님의 형상과 생태계(:22-25)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우리 신자들이 자연을 잘 관리하고 돌본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완전한 자유가 이르기까지는 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인 우리 신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2-25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성령의 첫 열매라고 하는 말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첫열매라고 하는 사상은 구약에서 많이 나타나는 사상인데 앞으로 있게 될 수확의 보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있게 될 더 충만한 선물인 완전한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주어진 증표입니다.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이것은 미래에 있게 될 구원을 미래 맛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고, 브루스(F. F. Bruce) 는 신자의 신분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전체적인 뜻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증인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구속을 기다리고 있고, 자연 역시 완전한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생태계에 구속의 원리를 적용하는 일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지만 완전한 구속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다만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한 회복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회복은 요한계시록 22:1-5에 다시는 저주가 없고 생명수가 흐르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때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상질서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심으로 완전한 세상으로 대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걱정하는 문제나 질병이나 고통이 없고, 다른 사람들로 인하여 고통이나 상처를 받지도 않고, 환경이 우리를 고통스럽게도 하지 않는 완전한 나라에서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깨어진 하나님과 우리, 이웃과 우리, 자연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대신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태계를 보전하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신자가 머무는 자리는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가 머무는 자리마다 자기만이 아니라 자연도 함께 회복되고 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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